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대우전위(大禹傳位): 익(益)과 계(啓)의 왕위계승다툼

중은우시 2024. 11. 15. 12:12

작자: 미상

대우(大禹)의 왕위승계에 대하여 기록에 따르면, 대우의 아들인 사계(姒啓)의 승계는 선양제(禪讓制)를 타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 과연 어떤 권력투쟁이 있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대우가 사계에게 왕위를 승계시키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당시 대우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일찌감치 죽어버린 고요(皋陶)외에 치수에 공이 있는 익(益)이 있었다. 사계와 익의 관계에 관하여는 3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익계읍양(益啓揖讓)"설.

<맹자.만장상>, <사기.하본기>등 문헌이 대표적이다. 대우는 영명한 지도자라고 주장하면서, 계와 익은 모두 대현(大賢)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선양제가 폐지된 것은 대세의 흐름이고 사람이 이를 되돌릴 수 없었다고 한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먼저 선양이 요순(堯舜)때는 합리적이었다. 왜냐하면, "단주(丹朱)의 불초(不肖), 그리고 순의 아들도 불초했기 때문이다. 순은 요의 재상으로, 우는 순의 재상으로 오랫동안 일을 하면서 백성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 요의 아들인 단주, 순의 아들인 상균(商均)이 모두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었고, 부하인 순과 우는 재능이 탁월하고, 백성들이 옹호했다. 그래서 순과 우에게 선양한 것은 너무나 적합한 일이었다. 같은 이치로, "계가 현명하면 우를 승계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다" 다만, 우의 계승자 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익이 우의 재상으로 있었지만, 그 기간이 오래되지 않았고, 백성들에게 미친 혜택도 오래되지 않았다." 익, 너는 젊다. 경력도 길지 않고, 백성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운명을 받아들여라. 그리하여 선양할 것인지 선양하지 않을 것인지는 우두머리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과 인심에 달려 있다. 순, 우, 익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아들이 현명한지 아닌지도 하늘의 뜻이다. 그건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맹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 하늘(天)이고, 그렇게 만들지 못할 일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 명(命)이다.

<사기.하본기>는 기본적으로 <맹자>의 주장을 승계한다: "삼년상을 마치고, 익은 제우(帝禹)의 아들 계(啓)에게 양보한다. 그리고 기산의 남쪽(箕山之陽)으로 가서 은거했다. 우의 아들 계는 현명했고, 천하가 모두 그를 마음에 두었다. 그러나 우가 죽었을 때, 비록 익에게 왕위를 넘겨주었으니, 익은 우를 보좌한지 오래되지 않았고, 천하가 아직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후들은 모두 익을 버리고 계에게 간다. 그리고, "우리의 임금 제우의 아들이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계는 천자의 자리에 앉는다. 그가 하후제계(夏后帝啓)이다." <사기>에서 말하는 것은 비록 왕위다툼이지만 '그 다툼도 군자스럽다'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모두 좋다는 식이다. 이 설은 <사기>에 쓰여지면서, 정사가 된다.

<월절서.오내전>은 아예 계와 익간의 갈등은 언급을 회피한다. "익과 우는 순의 신하였다. 순이 우에게 왕위를 넘길 때, 익을 추천하여 그에게 백리의 땅을 봉했다. 우가 죽고 계가 왕이 된다. 왕의 일을 잘 알고 있어, 군신의 뜻에 이른다. 익이 죽은 후, 계는 희생을 잘 마련하여 그의 사당에 제사지낸다. 경전에 이르기를 "하계가 익에게 희생을 잘 바쳤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계는 여전히 익을 우에게 선양받은 군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희생으로 군신의 예로 제사지낸 것이다. 엄격한 군신간의 구분이 그 속에 숨어 있다. 이는 진한이후 깊이 심어진 생각이다.

그러나, 진정 그렇게 고상했을까? 1940년대, 고힐강(顧頡剛), 동서업(童書業)이 <하사삼론(夏史三論)>이라는 글을 쓸 때, <계화오관여삼강(啓和五觀與三康)>에서 고힐강은 유가경전의 입장을 비판했다. <맹자.만장상>의 두찬(杜撰)을 비판하면서, "계는 우에 의해 천하를 맡기에 부족하다고 보았던 인물이다....다만 우의 이 불초자(不肖子)는 유가의 학설에서는 극가(克家)의 영자(令子)가 되어버렸다. 유가는 익, 계를 모두 현인으로 만들어, "계는 확실히 우의 아들이고, 익도 대현인의 자격을 잃지 않았다." 서로 정벌하고 주살하는 참극을 선양으로 미화하다니 우리는 정말 유가의 고대사를 조작하는 총명한 수단에는 감탄을 금치 않을 수 없다."

둘째, "익간계위(益干啓位)"설.

<고본.죽서기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익간계위계살지(益干啓位啓殺之)" 즉, 계가 이미 왕이 되었는데, 익이 그것에 불복하여 왕위를 빼앗으려 했고, 결국 계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다. 확실히 계는 가천하(家天下)의 사심을 품고 있었지만, 일을 일으킨 책임은 익에게 있다는 것이다. <초사.천문>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계대익작후(啓代益作后), 졸연리얼(卒然離蠥), 하계유우(何啓惟憂), 이능구시달(以能拘是達)? 개귀사국(皆歸射鞫), 이무해궐궁(以無害厥躬), 하후익작혁(何后益作革), 이우파강(而禹播降)" 이 글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오리무중이다. 고힐강 선생은 <계화오관여삼강>에서 이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왕일(王逸)이 말하기를 '리(離)는 조(遭)이고, 얼(蠥)은 우(憂)이다'라고 하였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왕일은 익이 왕위를 잃어서 '이얼'한다고 했는데, 문장의 뜻이 통하지 않는다. 보(補, 洪興祖의 <보론(補論)>을 가리킴)에서는 유호(有扈)가 불복한 것을 '얼'한다고 하였는데 문장이 억지로 통하지만, 역시 충분치 않다. 아마도 당시에 다른 사실이 있다는 소문이 있지 않았을까? <사기>에는 연(燕)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우가 죽고 익이 천자의 일을 보고, 계가 그의 무리를 이끌고와서 익을 공격하여 빼앗았다라고 되어 있고, <급가서(고본죽서기년을 가리킴)>에는 익을 계가 죽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익이 왕위를 빼앗기고나서 되찾으려는 음모가 있었다. 그것을 계가 우려했다. 계가 우려하다가 결국 익을 죽였다. 어찌 구금하는 것으로 달성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고힐강선생은 홍흥조의 '유호씨가 불복했다'는 것을 우려하였다는 설에 반대하고, 주희의 의견에 찬동했다. 이건 마땅히 익이 먼저 계를 구금하고, 계가 반격하여 익을 죽였고, 그렇게 겁난을 피하고 왕위를 획득했다. 고힐강선생은 <천문>이 이 말을 궁중정변으로 해석했다. 궁중드라마처럼 갈수록 기이해진다. 고힐강선생의 생각은 <찬문> <고본죽서기년>등 문헌을 종합하여 본 결과 <맹자>와 <하본기>는 틀렸다고 본 것이다.

셋째, "계간익위(啓干益位)"

<한비자.외저설우하>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옛날에 우가 죽자, 천하를 익에게 넘긴다. 계의 사람들은 함께 익을 공격하여 계를 왕으로 세운다." <전국책. 연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우는 익에게 천하를 넘기고, 계는 그 관리가 되도록 했다. 나이가 들어, 계는 천하를 맡기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익에게 왕위를 전한다. 계와 일당은 익을 공격하여 천하를 빼앗는다. 우가 명목상으로는 천하를 익에게 넘겼지만, 실제로는 계에게 스스로 빼앗아 취하라고 한 것이다." <한서.율력지>에는 "화익(백익)이 천자가 되어 우를 대체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정보는 익이 확실히 우로부터 천하를 넘겨받았고, 나중에 계에게 빼앗겼다는 것이다. 익으로서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뒤의 두 가지 견해가 보여주는 것은 그렇게 인간적이지 않다. 왕조교체는 손님을 불러서 식사하는 것이 아니고, 꽃놀이도 아니고, 글쓰기도 아니다. 그렇게 따뜻하고 겸양하는 일이 아니다. 하나의 집단이 다른 하나의 집단을 소멸시키는 일이다.

도대체 어느 주장이 합리적인가?

"익간계위"설에 대하여, 우리는 여전히 의문이 있다: 첫째, 위의 여러 문헌의 연대는 모두 비교적 늦다. 전국시대이후의 작품이다. 왜 굳이 <고본죽서기년>의 "익간계위"를 사실이라ㅏ고 보고, <맹자>가 말한 "익계읍양"은 가짜라고 보는 것일까? 둘째, 이상의 논증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는 바로 <천문>이다. 다만 그 의미는 불분명하다. 누가 이렇게 말한 배경을 명확히 설명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천문>이 말하는 사건이 무엇인지는 앞으로도 고증이 더 필요하다고 할 것이다. <천문>의 상하문의 격식으로 보면, 분명 두 구의 진술, 두구의 질문이 상호 교차한다. 그래서 고힐강이 인용한 <천문>은 반드시 뒤의 두 구절 "하후익작혁, 이우파강"까지 묶어서 해석해야 한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계대익작후(啓代益作后), 졸연리얼(卒然離蠥), 하계유우(何啓惟憂), 이능구시달(以能拘是達)? 개귀사국(皆歸射鞫), 이무해궐궁(以無害厥躬), 하후익작혁(何后益作革), 이우파강(而禹播降)"

고힐강은 "개귀사국, 이무해궐궁"의 구를 앞뒤로 이어서 계가 위기를 넘겼다고 말한다; 다만 '하우힉작혁, 이우파강'을 더하게 되면 뜻이 바뀌어 버린다. 즉 '개귀사국, 이무해궐궁'은 우, 익이 똑같이 무력을 쓰지 않고 선양받았고, 자신의 몸을 해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만 백익은 쿠데타를 당했고, 우는 공을 세워서 두 사람의 운명이 달라졌다고 말하게 된다.

그 중의 "개(皆)"가 관건이다. 즉 우와 익은 모두 "귀사국"했다는 것이다. 윗글의 계(啓)가 아니라. '국(鞠)'의 원래 의미는 죄인을 심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미는 두 가지가 된다. 하나는 궁(窮)으로 흉험한 생존상태를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곡(梏)으로 구금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후자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귀사국"이 말하는 것은 무력을 포기하고 선양의 형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곽말약(郭沫若) 선생의 <굴원부금역>에서는 고힐강의 설을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위의 8구를 이렇게 해석했다:

"하계가 백익을 대체하여 국왕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백익을 죽였다.

실의의 상황에서, 계가 어떻게 상황을 바꾸어 득의할 수 있었겠는가?

정벌하여 죽이지 않고, 같이 선양을 받았는데,

왜 백익은 실패하고, 하우는 번창하였는가?"

원가(袁珂) 선생의 <중국신화전설사전>에서도 익의 피살은 '익간계위'때문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계간익위'라고 본다. 그렇게 보면 <전국책.연책> <한비자.외저설우> 및 <사기.연세가>의 기록과 부합한다.

"계간익위"가 더욱 합리적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약간의 증거가 더 있기 때문이다.

첫째, 최근 <상박간(上博簡)>의 일서(佚書) <용성씨(容成氏)>가 공개되었느넫, "계간익위"설을 방증한다. 간33, 간34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는 다섯 아들이 있었다. 아들을 후계자로 삼지 않고, 고요가 현인인 것을 보고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 고요는 다섯번 사양하며 천하의 다른 현인에게 넘겨주라고 한다. 그리고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다가 죽었다. 우는 그리하여 익에게 선양한다. 계는 익을 공격하고 스스로 왕위를 취했다."

대우가 백익에게 왕위를 선양하기 전에, 일지기 고요에게 양위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요는 다섯번이나 사양하며 병을 핑계로 집에서 나오지 않다가 죽어버렸다. 고요의 이런 태도는 의미심장하다. 그가 정말 허유처럼 산림에 은거할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그는 이미 자신이 즉위하더라도 계와의 간에 최고권력을 놓고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후자의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고요가 회피한 것은 그가 세습이 선양을 대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극을 다른 사람에게 넘긴 것이다. 나는 거기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익의 운명이 비극적인 것은 필연적이다. 그의 책임은 "익간계위"의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계의 야심팽창과 "가천하"시대의 도래때문이다. 이는 계가 여러 문헌에서 폄하되는 것과 결합해보면 익은 그저 희생양이었다.

둘째, 전해져 내려오는 전적에는 익(益)의 역사발전에 대한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 <맹자.등문공상>에는 "순이 익으로 하여금 불을 관장하게 했고, 익은 산택(山澤)을 뜨겁게 하여 그것을 태웠고, 금수가 도망쳤다." <사기.하본기>에는 "(우)가 익에게 명하여 백성들이 벼를 심게 했고, 습한 곳에 심을 수 있었다." <회남자, 본경훈>에는 "백익이 우물을 만들어 용이 검은 구름으로 올라갔고, 신이 곤륜에 거쳐했다." <제왕세기. 오제>에는 "익은 짐의 우려를 생각해서 백성들에게 물건을 심어 번식하게 했다." 심지어 <오월춘추>, <논형>은 <산해경>을 백익의 공이라고 돌렸다. <위고문상서.대우막>의 기록에 따르면, "삼묘(三苗)가 말을 듣지 않아, 순이 우에게 토벌하게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익이 건의하기를 오로지 덕만이 하늘을 움직입니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가득 타면 줄어들게 되고, 겸손하면 더욱 얻게 됩니다." 덕으로 원한을 갚으면 하늘과 땅을 감동시키니, 지극한 효와 지극한 인의 순을 모범으로 하면, 성심수덕하면 지덕으로 천지귀신도 감동시킬 수 있는데, 하물며 삼묘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우는 익의 말을 듣고, 제순에게 건의하여 전략을 바꾸어 병력으로 토벌하지 않고, 양계(兩階)에서 간우(干羽)춤을 추었다. 칠십일후 삼묘는 마음으로부터 복종한다. 이 글은 비록 위조고문이지만, 참고작용은 할 수 있다.

주나라사람들이 전해준 것은 익이 우, 고요, 후직과 같은 성현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묵자.상현상>에는 "우가 익을 음방(陰方)의 가운데에서 그에게 행정권한을 주니, 구주를 이루었다." <묵자.소량>에는 "우가 고요, 백익에 영향을 받았다." <순자.성상>에는 "우가...천하를 평정하고 직접 백성등을 위해 힘든 일을 했다. 득익, 고요, 횡혁, 직성이 보좌했다." <사기.진본기>에는 이렇게 익의 공적을 상세히 기록한다: "진나라의 선조인 전욱의 후손으로 여수(女脩)가 있다. 여수가 베를 짜고 있는데, 현조(玄鳥)가 알을 떨어뜨린다. 여수가 이를 삼키고 대업(大業)을 낳고, 대업은 소전(少典)의 자식을 취하니 여화(女華)이다. 여화는 대비(大費)를 낳고, 우와 함께 천하를 평정했다. 천하를 평정한 후 제는 현규(玄圭)를 내린다. 우는 이를 하사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은 대비가 보좌했기 때문이다.' 제순이 말하기를 너 비는 우를 도우는 공이 있으니 너에게 검은 깃발을 내리겠다. 너의 후손은 반드시 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요씨성의 여자를 주어 처로 삼게 한다. 대비가 이를 받아 순을 도와 새와 짐승을 훈련시킨다. 그러자 새와 짐승중 순화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백예(柏翳)가 된다. 순은 그에게 영씨를 하사하한다.

'백예'는 바로 '백익'이다. 익은 우를 도와 치수에 공을 세우고, 영씨성을 하사받는다. 그는 우관이 되어 순을 도와 조수를 순화시키고 조수가 많이 순화된다.' 사람들은 백익이 불을 관장하고, 우물을 만들고, 벼를 심었다고 칭송한다. 그리고 각종 방법으로 기념한다. <여씨춘추. 신행론.구인>에는 요, 화익(백익), 진규, 횡혁, 지교의 5명이 우를 보좌한다. 그리하여 공적을 금석에 새기고 반우에 써넣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백익등 5명의 보좌로 공적이 후대에 명문으로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금문(金文)에도 '익(益)'자가 많이 나타난다. 이는 '익'이 그때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의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익공위초씨화종(益公爲楚氏和鍾)"(<집성>16)

"필선작황조익공궤(畢鮮作皇祖益公尊簋)(<집성>4061)

"익공우주마휴(益公右走馬休)(<집성>10170)

"익공내즉명어천자(益公內即命於天子)(<집성>10322)

셋째, 전국후기부터 서진의 <죽서기년>이전까지, 사람들은 "익간계위, 계살지"사건을 모르고 있었다. 최소한 오늘날 볼 수 있는 문헌자료를 보면, 이 점에 부합한다. 그 원인은 전국시대 선양의 기풍이 크게 흥성하여, 유학에서 선양을 고취하는 것을 통치자들이 이용한 외에 '익간계위, 계살지" 사건 자체의 취약성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원인일 것이다. 만일 '익간계위, 계살지'가 정말 사실이라면, 왜 고서에 이를 증명하는 것이 없고, 오히려 익을 칭송하는 글만이 많이 남아있는 것일까?

넷째, 이학근(李學勤) 선생은 이렇게 지적한다. 전국시대의 현실정치를 위하여 역사를 개조한 것이 <고본죽서기년>의 사상경향이다. "익간계위, 계살지"는 "순이 요를 평양에 가두고, 제위를 취했다" "후직이 제주를 단수에 유배보냈다." "이윤이 대갑을 동으로 유배보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윤이 즉위하고 대갑을 유배보낸지 7년만에 대갑이 동에서 몰래 나와 이윤을 죽였다"는 이야기와 극히 유사하다. 이는 전국시대 유세의 의미가 짙다. 이학근 선생은 이윤을 예로 들어, "이윤의 일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은허의 복사에도 이윤에 대한 제사를 매우 융중하게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가 태갑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나중에 태갑에게 주살당한 죄인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숭고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겠는가?" 이학근 선생은 복사를 통해 이윤의 일을 설명하였는데, 우리가 오늘날 익에 대하여 이해하는데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익이 야심가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청나라때 사람 마숙(馬驌)은 <강사(絳史)>에서 "익간계위, 계살지"라는 문구를 "이는 호사가의 말이다"라고 비판했다. 그것이 이치에 맞는다. <죽서기년>에 근거하여 <사기>의 오류를 수정했던 전목(錢穆) 선생도 "익간계위, 계살지"라는 내용에 대하여는 의문을 가지는 태도를 취했다.

* 참고: 내용에 고문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번역이 제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큰 틀에서 보아주시고, 상세한 사항은 원문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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当前位置: 首页 > 民间说史 > 中国古代史 > 夏朝 > 大禹传位的历史秘辛:益和启的王位之争 http://www.newdu.com 2017-08-29 未知 佚名 参加讨论     大禹传位 根据记载,大禹的儿子姒启的继位打破了禅让制。而这种打破背后究竟隐藏着怎样的权力争夺呢?根据记载,大禹的传位和姒启的继位并不是一帆风顺的,当时有资格成为大禹继承人的人并不只有过早死掉的皋陶,还有治水有功的益。关于姒启和益的关系总共有三种说法: 第一种是“益启揖让”说。 以《孟子·万章上》、《史记·夏本纪》等文献为代表,主张大禹是英明领袖,启、益也是大贤,之所以禅让废除,大势所趋,人无力回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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