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열국(夨國): 서북에 존재했던 수수께끼의 국가

by 중은우시 2023. 5. 22.

글: 소연부독서(召燕不讀書)

 

"보천지하(普天之下), 막비왕토(莫非王土), 솔토지빈(率土之濱), 막비왕신(莫非王臣)"(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땅 위에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 이는 역사학자들이 서주(西周)시대를 개괄한 말 중에서 가장 적절한 말이다. 그 의미는 주왕조의 통치범위내에 모든 사람은 주나라천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칭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치대로라면 일반적으로 다른 어느 사람도 '왕'이라고 스스로를 칭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 그랬을까?

 

섬서성(陝西省) 농현(隴縣)에는 서주의 도성에서 10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열왕(夨王)"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동기(銅器)가 나왔다. 이는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럼 서주시기에 감히 '왕'을 칭할 담량을 가졌던 이 나라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 열왕궤개(夨王簋蓋)의 발견

 

1969년, 섬서성 보계시(寶鷄市) 가공촌공사(賈公村公社) 상관촌(上官村)의 한 농민이 흙을 파다가 문화재들을 발견한다. 그 농민은 처음에는 그다지 주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 문화재들 가운데에는 완전하거나 혹은 대형의 청동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열왕궤개

그는 아무렇게나 이 낡은 물건들을 뒤집어 보다가 둥그런 두껑같은 물건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그 둥건 물건을 들어올려 살펴봤는데, 돌연 두껑에 몇 줄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놀란 농민은 이 일을 현지의 문화재부문에 신고한다.

 

고고전문가는 이 둥근 물건을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청동궤(靑銅簋)의 두껑이다. 그러나, 청동궤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고, 두껑만 남은 것이다. 동시에 그 두껑에는 3줄의 15개의 글자가 남겨져 있었다:

 

"열왕사전강존궤(夨王乍奠姜尊簋), 자손기만년영보용(子孫其萬年永寶用)" 그 뜻은 열왕이 자신의 "정(鄭, 奠)"의 땅에서 온 강(姜)씨성의 여자를 위하여 이 제기를 만드니(乍, 作), 자손들이 영원히 대대손손 쓰길 바란다는 것이다.

열왕궤개상의 명문

이 중요한 발견은 고고전문가들의 눈길을 끌었다. 1975년부터, 고고학자들은 전후로 2차례에 걸쳐 이 지역에서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작업을 진행한다. 이곳의 지세는 전체적으로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다. 거기에서 많은 서주시대의 교혈(窖穴), 회갱(灰坑), 도요(陶窯)와 건축유적지등의 유적을 발견한다. 유적지 동쪽은 견수(汧水)에 가까운 골짜기지역이다. 거기에서는 많은 수혈묘(竪穴墓)가 발굴되었다.

 

열왕궤개외에, 고고학자들은 석경(石磬), 청동거마기(靑銅車馬器)등의 문화재도 발견했고, "당로(當盧)"라는 이름의 청동거마기에서도 "열(夨)"이라는 글자의 명문(銘文)이 발견된다.

 

고고전문가들은 기본적으로 보계가촌, 상관촌, 영롱촌(靈隴村) 일대가 서북은 거주지, 동쪽은 매장구역인 취락유적지이 ㄹ것이라고 보았고, 이곳은 아마도 "열(夨)"이라고 부르는 고대국가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2. 고열국(古夨國)의 청동기와 고열국의 이야기

 

'열왕궤개'는 '고열국'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작은 나라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문헌에서 이 소국의 존재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주(周)나라때의 청동기에는 적지 않은 명문(銘文)에서 이 신비한 소국을 언급하고 있다. "열국"과 관련된 청동기는 현재까지 13종이 있으며, 유(㔽), 반(盤), 과(戈), 방이(方彛), 궤(簋)등 여러가지이다.

 

청동기의 명문과 기물 자체의 시대로 보아 우리는 "열"은 일찌기 서주초기부터 스스로를 '왕'으로 칭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서주말기까지 계속되었다. 명문에는 또한 "열희(夨姬)"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열국의 희씨성과 주(周)의 왕실이 같은 성이라는 것을 말해주어 아주 흥미를 끈다. 이를 보면 "열국"의 지위는 서주때 아주 존귀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천자와 같은 성을 썼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주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동시에 명문의 정보를 보면, 우리는 개략 강씨성의 국가와 정략결혼하여 동맹을 맺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3. 고고발굴에서 찾아낸 열국의 위치

 

보계시 가촌일대에서뿐만이 아니라, 보계시지역의 서쪽에서도 마찬가지로 열국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감숙에 가까운 농현일대에는 감숙성 화정현에서 발원한 하류가 흐르는데, "견수"라 한다. 견수를 따라 동남쪽으로 농현, 천양현, 보계현등 인류가 활동한 여러 취락이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이 일대에는 '열국'과 관계있는 유적지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1974년, 고고발굴팀은 농현에서 마찬가지로 4개의 서주시기 묘장을 발굴했는데, 그중 비교적 큰 묘에서 60여건의 청동기가 발견된다. 출토된 일부 동기에는 "열(夨)"자 명문을 볼 수 있었다. 이는 농현일대로 마찬가지로 서주시기 열국의 세력범위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현 조가만 남파촌에는 LNM6으로 명명된 묘장의 규모가 가장 크고, 출토된 기물도 가장 많다. 6호묘는 길이가 약 4미터, 너비가 약 8미터이며, 전형적인 수혈토갱묘(竪穴土坑墓)이다. 묘안에서 출토된 많은 진귀한 부장품들에는 동존(銅尊), 동정(銅鼎), 동궤(銅簋), 동언(銅甗)등이 있다. 그것들은 묘주인 머리부분에 가까운 이층대에 놓여 있었다.

 

견수는 감숙에서 발원하는 중요 수계(水係)이다. 동남으로 풍가산(馮家山)으로 나온 후, 물길이 돌연 넓어지며, 관중평원으로 들어간다. 이 평원의 서쪽은 금릉하(金陵河)에 가깝고 등뒤로 웅산(雄山)이 있다. 삼면은 강으로 둘러싸여서 생활거주지로 이상적이다. 이 20여킬로미터에 이르고 여러 서주시기 거주지와 묘지가 흩어져 있는 땅은 3천년전에 이곳에서 사람들이 번성했던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정도이다.

열국의 대체적인 범위

4. <산씨반(散氏盤)>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섬서금석지>의 기록에 따르면, 저명한 청동기 <산씨반>은 건륭연간에 봉상(鳳翔)지구에서 출토되었다. 명청시기 봉상부의 위치는 지금의 섬서성 천양현, 농현지역이다. 이곳은 바로 "열국"의 기물이 많이 출토되는 곳이기도 하다.

산씨반

산씨반의 명문은 서주역사상 아주 중요한 토지분쟁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열국(夨國)과 산국(散國) 두 국가의 지리위치와 토지관계가 언급되어 있다. 명문에는 열국사람이 산국사람에게 토지를 주었으며, 경계지점을 확정하여 토지범위를 획정했다. 그리고 산씨반이 출토된 장소와 열국청동기의 출토유적지를 보면 오늘날의 섬서성 천양현, 농현일대가 역사사 열국의 영토였을 것이다.

 

5. 왜 왕을 칭했을까?

 

그렇다면, 이제 열국에 대하여는 비교적 전면적인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왜 열국의 국군이 스스로 '열왕'이라고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알아보자. 기실 서주시기에, 만일 주천자가 분봉한 제후국이라면, 긔 국군은 예법에 따라 왕을 칭할 자격이 없다. 일반적으로 "공(公), 후(侯), 백(伯), 자(子)"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서주왕조의 변방지역에는 여전히 여러 크고 작은 정권이 존재했다. 그들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어떤 나라는 주나라사람의 통치를 받으면서 주천자의 명을 따르지만, 어떤 나라는 때로는 주천자에 복종하고 때로는 주천자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 어떤 나라는 아예 주천자의 명을 듣지 않아서, 주천자가 여러번 군대를 파견하여 정벌한다. 이들 정권을 어떤 학자들은 "방국(方國)"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여기서 얘기하는 "열국"도 바로 그런 주나라서쪽변방의 "방국"인 것이다. 현재의 자료를 보면, 열국은 주나라에 반기를 들기도 하고, 복종하기도 했다. 그래서 주나라의 왕조체계내에 들어가 있지 않았고, 그래서 자칭 '열왕'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

 

열국은 비록 전적(典籍)에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동기의 명문에서는 여러 번 발견되었다. 열국과 주왕조간에는 여러가지 관계가 있다. 열왕은 주천자와 같은 성을 지닌 국군으로 지위가 아주 높았으며, 일찌기 주나라와 전쟁을 하기도 했고, 귀순후에는 주나라를 위하여 서북영토를 지켰다.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열국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수수께끼를 남겨놓고 있다. 열인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의 족속은 어떠했을까? 그들과 주왕실이 같은 성을 쓴 것은 같은 종족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공로가 뛰어나서 주천자가 희성을 하사했기 때문일까? 이런 많은 의문들은 아직도 고고학적 발굴을 기다려야 답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