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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왕치산(王岐山)과 쩡칭홍(曾慶紅)간의 원한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by 중은우시 2024. 10. 14.

글: 호해(胡亥)

왕치산이 최근 국경절 리셉션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원로들이 즐거워하는 것과 반대로, 카메라에 보이는 왕치산은 마치 나무토막같았다. 모습이 형편없었다. 고민이 많고 원한이 깊으며, 죽지못해 사는 것같았다. 해외여론은 보편적으로 왕치산의 실세(失勢)는 시진핑의 토사구팽의 결과라고 말한다. 시진핑의 심복들에 의해 그의 심복들부터 하나하나 제거되어, 결국 그의 곁에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으며 막다른 골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건 그저 표면적인 현상이다. 실제로 왕치산은 토사구팽당했을 뿐아니라, 원한을 맺으면 안되는 사람과 원한을 맺었기 때문에 결국 그 보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든지 부패의 거악으로 언제든지 사람들 앞에 끌려나와 처벌받을 위험에 처해 있게 된 것이다. 이 원한을 맺지 말았어야할 사람은 바로 중공원로 쩡칭홍이다.

왕치산과 쩡칭홍의 원한관계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관점이 있다. 그중 가장 설득력있는 것은 중공원로간에 제5대지도자에 대한 논의때부터라는 것이다.

당시 쩡칭홍과 한 무리의 장쩌민파 인물들은 후진타오를 이을 제5대중공후계자 후보를 추천했는대, 당시에 세 사람이 후보에 올랐다: 보시라이(薄熙來), 시진핑(習近平), 왕치산(王岐山). 장쩌민읜 중공의 진정한 황제로서 회의를 주도했다. 그의 본심으로 말하자면 장쩌민은 왕치산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왕치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 역사적 은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은원은 바로 궈원꾸이(郭文貴)가 폭로한 핵심이기도 하다; 장쩌민, 왕치산 그리고 야오씨(姚氏) 자매간에는 아주 먼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다. 궈원꾸이는 아주 은유적인 수법으로 서술했다; 무슨 관쥔(貫軍), 류청제(劉成傑)등, 그 생부 생모가 누구이고, 혹은 드러나게 혹은 드러나지 않게, 그저 역사만이 답을 내줄 것이다. 이런 춘추필법은 많은 사람을 미혹시켰다. 그리하여 도대체 궈원꾸이가 폭로한 주제가 무엇인지 알기 힘들었다. 다만 아는 사람은 알고,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궈안(國安)의 입은 한 마디로 장쩌민, 왕치산의 관계를 묘사했다. 즉, 왕치산은 "30년간 숨겨둔 히든카드"라는 것이다. 이를 보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을 것이고, 외부인들이 상상하는 것을 훨씬 넘는다.

주제로 돌아가서, 장쩌민이 비록 왕치산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지만, 시종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발언하도록 놔두었고, 기회가 되면 나서서 한 마디로 정리하고자 했다. 쩡칭홍은 장쩌민 뱃속의 회충이다. 어찌 장쩌민의 진정한 뜻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쩡치산은 왕치산의 사람됨을 너무나 잘 알았다. 이 외척이 후계자가 되는 것은 태자당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장쩌민이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일단 말을 꺼내게 되면 수습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른 장쩌민파의 거물들과 협의하여, 함께 시진핑을 추천했다. 모든 사람이 말을 맞추어 장쩌민의 입을 막고, 왕치산을 추대할 생각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왕치산은 원래 노황상이 자신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았고, 후계자가 될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쩡칭홍이 중간에서 방해하여 그의 등극을 망쳐버린 것이다. 그렇게 되다보니 쩡칭홍과는 불공대천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필자가 2017년 5월에 쓴 글이 있다. 쩡칭홍과 왕치산이 충돌한 전과정을 묘사했다. 지금 다시 아래에 소개할테니 여러분들이 당금정계의 인과를 해석하시기 바란다:

원문:

장쩌민은 비록 18대를 전후하여 신사인방세력을 분쇄하고, 공청단파를 소멸시켜, 시진핑이 장악하고, 계속 수렴청정하려는 정치의도를 실현했지만, 여전히 한 가지 문제는 철저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어, 마음 속의 우환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쩡칭홍문제였다.

18대이전에, 쩡칭홍을 우두머리로 하는 석유방(石油幇)은 장쩌민의 상하이방(上海幇)의 한 갈래였다. 쩡칭홍은 중공원로 쩡산(曾山)의 아들이고, 오랫동안 석유계통, 상하이시에서 일했다. 사람됨이 제왕술과 권모술수에 정통했고, 지모가 뛰어났다. 게다가 고관자제로 상층부에서의 관계도 좋아서, 태자당내에서 큰형님이라고 할 수 있는 중요인물이다. 장쩌민이 취임한 초기, 쩡칭홍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를 통해 중앙과의 관계를 열 수 있었고, 많은 아이디어도 제공하여,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고, 험악한 환경 속에서도 낙마하지 않고, 결국 대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쩡칭홍은 이런 걸출한 공헌으로 장쩌민계에서 정치국상위, 국가부주석의 고위직에 앉는다. 당금 정계에서는 상하이방과 태자당의 이중신분을 가진 정치적 중요인물이다. 당내지위는 장쩌민핵심의 바로 다음가는 정계거물인 것이다.

쩡칭홍은 당시 중앙조직부 부장을 맡았었다. 그는 장쩌민을 위하여 사람을 인재를 기용하고 많은 간부를 발탁했다. 이들 간부들이 바로 현재 당정고위간부대오의 주류이다. 당과 국가지도자급의 우관정(吳官正), 허궈창(賀國强), 저우용캉(周永康), 멍젠주(孟建柱), 자오러지(趙樂際), 왕용(王勇), 궈셩쿤(郭聲琨)등이 모두 그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현재 핫이슈로 떠오른 장쩌민의 금군우두머리로 8341부대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여우시꾸이(由喜貴) 상장도 쩡칭홍의 막역지우이다. 다른 성장, 부장급 간부중에서도 직접 혹은 간접으로 그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 그의 세력은 조야에 걸쳐 있어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이다. 상하이방내에서도 최대의 방중방이며, 파중파이다.

장쩌민이 자신의 권력을 계속하여 확장하면서, 당정군의 모든 고위직은 점차 장쩌민계의 심복들이 장악하게 되고, 완전히 절대적인 지도자지위를 차지한 후에는 토사구팽하게 된다. 쩡칭홍의 모사로서의 역할은 점차 약화되게 된다. 불가피하게 거리가 멀어진다. 동시에 그의 방대한 세력이 점차 드러나게 되면서, 공고진주(功高震主)로 꼬리가 너무 커지게 되면서, 장쩌민의 경계와 의심을 받게 된다. 중공17대때 쩡칭홍은 장쩌민이 정한 "칠상팔하"의 잠규칙에 따라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저 물러날 수밖에. 그렇게 정계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쩡칭홍은 은퇴전에 교묘한 한 수를 둔다. 쩡칭홍은 장쩌민을 설득하여 다른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시진핑을 제5대지도자로 정한다. 이 조치는 독보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을 보여준다. 이는 이후 중공정국의 방향을 결정한다. 쩡칭홍의 계산은 은퇴하기 전에 판을 깔아놓고, 자신이 옹립한 공을 내세우고, 또한 자신의 방대한 개인세력을 가지고 이후 새로운 주군의 아래에서 반드시 큰 역할을 하고, 새로운 주군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불가결한 인물이 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추대된 시진핑은 당연히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쩡칭홍은 태자당의 큰형님이면서 홍얼다이중에서 영향력이 가장 크다. 이때는 이렇게 예상할 수 있었다. 시진핑이 미래 정권을 잡으면 반드시 쩡칭홍을 우대할 것이고, 그의 말이면 무조건 따를 것이다. 설사 은퇴한다고 하더라도, 쩡칭홍은 여전히 시진핑을 장악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고, 여전히 호풍환우하는 실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쩡칭홍의 이런 계산은 당연히 장쩌민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장쩌민은 이것을 심각한 문제거리로 보았다. 장쩌민의 생각대로라면, 쩡칭홍은 나중에 시진핑과 손을 잡을 것이고, 쩡칭홍의 모략과 방대한 정치세력을 기반으로 시진핑을 보좌하게 된다면 그것은 장쩌민에게 악몽이 될 것이다. 향후 아주 큰 골치거리가 생길 수 있다. 그 위협정도는 보시라이같은 홍얼다이 태자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후환이 클 것이니, 막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장쩌민에 있어서, 쩡칭홍은 어쨌든 자기 사람이다. 쩡칭홍의 일당은 정법, 공업, 지방 및 석유국유기업등 반벽강산을 책임지고 있다. 공은 있고 죄는 없다. 그러니 그를 처분하는데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잘못하면 자신의 내부에서 혼란이 일어나 아군은 고통받고 적군은 좋아하는 결과가 생기고, 다른 파벌에 약점을 잡히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쩡칭홍은 어쨌든 자신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 했으며 큰 공을 세웠다. 그를 저우용캉, 쉬차이허우처럼 큰호랑이로 처리하는 것은 악영향이 있을 것이므로 손을 쓰기 힘들었다. 그래서 18대이후, 장쩌민은 나중에 은퇴한 고관들이 "귀자육(鬼子六)"이라고 욕하는 중앙기율검사위 서기 왕치산에게 뜻을 전해서, 저우용캉의 잔당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쩡칭홍의 정치세력과 심복, 일당을 전면적으로 소탕하게 함으로써, 쩡칭홍의 정치적 기반을 제거하고, 정치적 기세를 억누르며, 방화벽을 설치하여, 쩡칭홍과 시진핑간의 연결을 차단함으로써 그를 고립시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게 만들려 했다.

18대이래, 왕치산의 중앙기율검사위의 조사는 두 가지 줄기가 있었다. 링지화(令計劃) 공청단파 세력의 산시, 장쑤, 윈난등의 주요줄기외에, 또 다른 줄기는 바로 석유계통, 공업계통, 그리고 쓰촨, 허베이, 후난등 쩡칭홍, 저우용캉의 근거지와 세력밀집분야였다. 깊이 파내서 연루자를 모조리 추적해 천명의 무고한 사람을 잡을지언정 한명의 범인은 놓치지 않겠다는 식으로 조사했다. 사람들은 장쩌민이 링지화에 원한을 가지고 있고, 시진핑이 저우용캉에 원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사람들은 그 안에 깊이 숨어 있는 줄기는 알지 못했다. 쩡칭홍의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경친왕(慶親王, 쩡칭홍을 가리킴)을 털을 뽑은 백숙닭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석유계통만 보더라도, 몇년간 중앙기율검사위에서 수십명의 부부장급이상의 고위직을 붙잡았다. 소수의 저우용캉의 심복외에 대부분은 쩡칭홍의 심복들이었다. 혹은 쌍방 공통의 심복이었다. 꼽아보면, 장제민(蔣潔敏), 천통하이(陳同海), 왕텐푸(王天普), 왕용춘(王永春), 야오용위안(廖永遠), 리화린(李華林), 란신췐(冉新權), 왕다오푸(王道富), 타오위춘(陶玉春), 리충시(李崇禧), 궈용샹(郭永祥), 원칭산(溫靑山), 왕리신(王立新), 보치량(薄啓亮), 션딩청(沈定成), 왕원창(王文滄), 다이원린(戴文林)등 지방의 성장급의 쑤룽(蘇榮), 쑤슈린(蘇樹林), 저우번슌(周本順)등. 쩡칭홍의 비서실장 스즈홍(施芝鴻), 그리고 전 베이징시 시장 왕안슌(王安順), 모조리 실권없는 부서로 밀려났다. 나머지 예를 들어 국안부 부부장 마젠(馬建), 공안부 부부장 리동셩(李東升), 허베이 정법위서기 장웨(張越)등의 주요간부도 마찬가지로 블랙리스트에 들어가 뿌리를 뽑아 후환을 없앴다. 몇년동안, 쩡칭홍의 정치실력은 모두 사라지고, 호락평양(虎落平陽)의 상태가 된다. 전 비서 스즈홍이 매체 앞에서 몇 마디를 겨우 한 것을 제외하고 모두가 쩡칭홍을 떠났고, 이제는 더 이상 쩡칭홍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현재의 상황을 보면, 쩡칭홍은 비록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형국이지만, 그의 세력은 뿌리가 매우 깊다. 예를 들어 군대의 여우시꾸이, 정법의 멍젠주, 궈셩쿤등등. 모두 중요대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고, 쩡칭홍과 관계가 매우 깊다. 그들은 현재 장쩌민의 확실한 심복들이기도 하다. 쩡칭홍을 완전히 뿌리뽑는데에는 중앙기율검사위도 꺼리는 바가 있고 힘이 미치지 못한다. 장쩌민이 살아있는 한, 이건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쩡칭홍은 심모원려의 인물이어서 몇년전에 이미 준비를 해두었고, 결사대를 준비해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상황에서도 해외에서 폭로전을 펼치고 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사람들은 점차 쩡칭홍의 수법이 고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인터넷에서의 장점을 발휘하여 의사결정층을 견제하고 19대전후의 정치방향을 좌우하고자 한다. 그리고 관련인원의 운명에 대하여 "보명(保命), 복수"를 할 수 있다. 폭로자는 국가기밀을 모조리 장악하고 있으며, 모든 고관의 상세한 자료 및 관련증거가 있다. 이는 모두 사전에 준비해둔 것이다. 재산이 한 나라를 상대할 만큼 많고, 죽기살기로 싸우게 되면 시진핑-왕치산체제 심지어 장쩌민의 수렴청정체제에게 크게 위협이 될 것이다. 만일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면 의사결정권자는 아마도 졸을 버리고 왕을 보호할 것이다. "귀자육"은 결국 속죄양이 되어, 쩡칭홍의 저주를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고, 쩡칭홍의 묘 앞의 배장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