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사로(思蘆)
중국에서 나타난 하나의 역사현상은 "낙후한 외래문화가 중원에 들어오면, 황권독재의 최대화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진나라통일이전에, 진나라는 서융(西戎)이라는 낙후한 지역에서 왔다. 나중에 몽골족과 여진족등 유목문화가 전후로 중원에 들어오게 된다. 군주정체는 원, 후금유목노에제와 결합된 후, 그 독재정도, 그 오만한 정도는 원명청시기에 모두 최고조에 달한다. 20세기,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중국에 들어온 후 독재체제는 등봉조극(登峰造極)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
<예기(禮記)>를 보면, 주(周)의 국군(國君)은 대부(大夫)이상의 신료들에게는 모두 답배(答拜)했다. 중장통(仲長統)은 <창언(昌言)>에서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군주는 신하에게 모두 답배를 했다." 주희(朱熹)는 이런 말을 했다: "삼대때의 군주는 대신을 만날 때 많은 경우 서 있었고, 수레를 탔을 때도 역시 일어섰다." 진(晋)에서 당(唐)에 이르기까지, 군주는 대신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았고, 평등한 신분의 "자(字)"로 불러 존중해주었다. 고염무(顧炎武)는 이런 말을 했다: 수당때 "군신간에는 붕우(朋友)의 의리가 있었다. 이는 후세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세설신어(細說新語)>에서 진원제(晋元帝)가 사공(司空) 하순(賀循)을 그의 부친 하초(賀劭)로 잘못 부르는 일이 발생했다. 진원제는 자신이 실례한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하면서 삼일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당나라때 황제와 재상은 같이 앉아서 업무를 논의하고, 차를 내려주었다. 최초로 무릎을 꿇고 아뢰는 것에 대한 기록은 여진의 금(金)나라때이다. 재상 고여려(高汝礪)가 금선종(金宣宗)에게 무릎을 굻고 아뢰었다. 거란과 여진족에서는 자주 본족의 대신에게 태형(笞刑)을 내렸다.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시기에는 보편적으로 신하들을 채찍으로 때리거나 곤장을 치는 경우가 있었으며, 금희종(金熙宗)과 해릉왕(海陵王)시기에 한족사대부에게도 채찍과 곤장을 치기 시작했다. 명나라때는 정장(廷杖)이 나타나고, 재상이라는 명칭도 없애면서 황권이 확대된다. 그리하여 "오배삼고(五拜三叩)"로 발전한다. 청나라때는 더더구나 "삼궤구고(三跪九叩)"로까지 발전하다. 명나라대신들은 시좌(侍座)했는데, 청나라때는 아뢸 때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했다. 명나라때 육조(六曹)는 모두 "경(卿)"이라고 호칭했는데, 청나라때는 "너(爾)"로 격하되어 불린다. 마르크스레닌주의시대에는 "우귀사신(牛鬼蛇神)"으로 더욱 격하된다.
사학의 대가 맹삼(孟森)은 이렇게 말했다: "명나라때의 정장이 비록 가혹했지만, 올바른 사람이 정장을 맞으므로, 천하는 이를 영광으로 여겼고, 평생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청나라때는 군주가 신하를 처벌면, 반드시 천하에 군주를 지성(至聖)으로 칭송하게 하고, 반드시 천하에 처벌받은 신하는 지욕(至辱)으로 여기게 했다. 그리하여 기개는 날이갈수록 비굴해진다.' 명나라때는 대신을 처벌할 때 오직 신체만 처벌했다. 청나라때는 대신을 처벌할 때 신체뿐아니라 영혼까지 미쳤다. 이때부터 중국인은 존엄과 기개가 날로 쇠퇴한다.
당나라때 황제의 조서는 반드시 재상이 부서(副署)해야 했다. 만일 재상이 조서에 동의하지 않으면, 부서를 거부할 수 있었다. 재상의 부서를 거치지 않은 조서는 법제에 위반하는 것으로 각급기관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당중종(唐中宗)은 일찌기 재상을 건너뛰고 직접 관리를 임명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중종은 당당하지 못하다고 여겼는지 조서를 담은 봉투를 봉할 때 평상시에 쓰던 양식으로 하지 못하고, 기울여서 봉한다(斜封). 그리고 "칙(勅)"이라는 글자도 주필(朱筆)로 쓰지 못하고, 묵필(墨筆)로 썼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사봉묵칙(斜封墨勅)'이라고 불렀다. 이런 방식으로 받은 관직은 '사봉관(斜封官)'이라고 불렀는데, 당시 사람들은 멸시했다.
송인종(宋仁宗)은 공검인서(恭儉仁恕)했고, 42년간 재위했으며, 대외적으로 전공을 세우지 못했고, 대내적으로 크게 혁신을 하지는 못했지만, 국내는 평안했고, 현신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당시 시덕조(施德操)는 송인종을 이렇게 평가했다; "백사불회(百事不會), 각회주관가(却會做官家)"(아무 일도 제대로 할 줄 모르지만, 황제일만은 잘 했다. 관가는 송나라때 황제를 가리킴). 명나라때 학자 주국정(朱國楨)은 이렇게 말했다: "삼대이래 현명한 군주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진황한무(진시황, 한무제)도 아니고, 당종송조(당태종 이세민, 송태조 조광윤)도 아니며, 한문제(漢文帝), 송인종(宋仁宗), 명효종(明孝宗)이다."
송나라때의 대간관(臺諫官) 방정실(方廷實)은 상소를 올려 이렇게 말했다: "천하는 중국의 천하이고, 조종(祖宗)의 천하이다. 여러 신하, 만백성, 삼군의 천하이지, 폐하의 천하는 아니다." 이런 말을 청나라이후에는 아마 그 누구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것은 실제로 제2차 진멸육국(秦滅六國)이다. 이후의 통일은 대부분 이 전통을 이었다. 왕조의 합법성은 두 가지 모델이 있다; '대일통(大一統)"과 "이하지방(夷夏之防, 화이사상)". 중국의 역대왕조는 모두 이런 모델을 벗어나지 못했다. 설사 외래문화에서 발원한 진, 원, 청이나 중공도 모두 자신의 '이(夷)'의 본색을 잊지 않았고, 새로운 '이하지방'으로 통치를 보호해야 했다.
동한의 질운(郅惲)은 친구를 도와 원수를 죽인 후, 스스로 감옥으로 가서 법에 따른 처벌을 받는다. 그러나 현령은 자살하겠다고 협박해서 질운에게 도망치라고 한다. 이를 통해 혈친을 위해 복수한 것과 국가율령과의 모순을 회피한 것이다. 주천(酒泉)의 조아(趙娥)는 부친의 복수를 위해, 원수를 죽인 후 수위(守尉)에게 자수한다. 수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그녀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한다. 한장제(漢章帝)는 혈친의 복수를 위해 살인한 사람에 대하여는 사형을 면제하고, <경모법(輕侮法)>을 제정한다. 즉 부모를 모욕한 사람을 죽이면 사형을 면제받는다. 2016년 우환(于歡)이 모친을 모욕한 사람을 죽였는데, 1심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현대중국의 법률은 안정유지를 목적으로 하고, 정의원칙은 사라졌다.
포산(包山)에서 출토된 초간(楚簡)의 법률은 이렇게 되어 있다: "동사(同社), 동리(同里), 동관불가증(同官不可證), 닉지종부형제(匿至從父兄弟), 불가증(不可證)" 부모자녀간에 상호고발을 하지 못하게 했다. 즉 비교적 먼 당형제라 하더라도 심지어 같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간에서 서로 증인을 서지 못하게 했다. 이런 제도에서 보호하는 것은 친척간의 감정이다. 그리고 혈연가족공동체, 지역소공동체이다. 전통중국문화와 서방문화는 모두 대의멸친(大義滅親)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주나라때는 "친친득상용은(親親得相容隱)"(친척간에는 서로 감추어주어야 한다), 공자는 말했다: "자위부은(子爲父殷), 부위자은(父爲子隱), 직재기중(直在其中)"(아들이 아버지의 허물을 감추어주고, 아버지가 아들의 허물을 감추어주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당율은 친척간에 죄가 있으면 서로 감추어줄 수 있었다. 고대그리스의 종교와 윤리도 모두 아들이 아버지의 죄를 고발하는 것에 반대했다. 고대로마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법학총론>에는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친척간에는 서로 고발할 수 없다.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고 부친이나 보호자를 고발한 사람에 대하여 여하한 공민도 형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친척간에 상호고발하면 상속권을 잃는다; 그리고 친척간에는 증인을 설 수 없다. 미국의 사법규정에 따르면, 형사소송에서 피고인의 배우자는 배우자에 불리한 증언을 거부할 면제권이 있다. 중국현대법률은 중국전통이나 서방문화와 상반된다. 안정유지를 위하여, 대의멸친과 친척친구간의 상호고발을 장려하고 있다.
<예기(禮記). 단궁하(檀弓下)>와 <회남자(淮南子).사론(汜論)>의 기재에 따르면, 초기의 봉건귀족들의 전쟁예의에는 적의 조묘(祖廟)를 공격하지 않고, 적의 환자를 해치지 않고, 적의 노인과 아동을 포로로 잡지 않는다는 것이 포함되었다. 서방에도 유사한 기사도정신이 정식의 행위준칙으로 전승되어 내려왔다. 그 핵심관념은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고, 승리자는 반드시 패배자를 잘 대우해주어야 한다는 등이다. 우리가 오늘날 보편적으로 따르는 일부 인도주의원칙, 예를 들어 제네바협약의 전쟁포로대우에 관한 엄격한 규정등은 모두 이 준칙에서 기원한다. 송양공(宋襄公)의 귀족예의는 모택동이 멍청한 돼지의 인의도덕이라고 조롱받았다. 현대중국사회에서 숭상하는 것은 전기새마(田忌賽馬)의 공리적 계산이고, 기사도정신은 이미 남아 있지 않다.
군사력은 하나의 국가의 문명여부를 판단하는 첫번째 기준이 아니다. 문화가 첫번째 기준이다. 국토면적은 국가의 강성여부를 결정하는 주요표지가 아니다. 경제가 주요표지이다. 황제의 위망은 한 국가의 규범이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형량기준이 아니다. 법치가 그것이다. 금메달은 한나라가 스포츠강국인지를 가르는 표지가 아니다. 인민의 체질이 그것이다.
"출죄(出罪)"는 유죄를 무죄로 판결하거나 중죄를 경죄로 판결하는 것이다. "입죄(入罪)"는 무죄를 유죄로 판결하거나 경죄를 중죄로 판결하는 것이다. 송나라때 관리들의 출죄나 입죄는 모두 형사처벌대상이었다. 그러나 입죄를 중하게 처벌하고, 출죄를 경하게 처벌했다. 즉 억울한 사건을 만든 사람을 범죄자를 풀어준 사람보다 더욱 중하게 처벌한 것이다. 죄인을 풀어줄 지언정 무고한 자를 잘못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의죄종경(疑罪從輕)", "의죄종무(疑罪從無)"의 재판원칙이다. 죄인이 도망가는 것이 정부가 불법을 저지르는 것을 비교하면 그 죄악의 정도가 훨씬 적다.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안정유지에서 출발하여, 추구하는 것은 삼천을 잘못 죽이더라도 한명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후거지러투(呼格吉勒圖)사건, 네슈빈(聶樹斌)사건, 러핑간살쇄시(樂平奸殺碎屍)사건, 장위환(張玉環)사건등 중대한 원안착안(寃案錯案, 억울한 사건, 잘못된 사건)의 제조자는 책임추궁을 당한 경우가 드물다. 이는 옛날부터의 법률에서 도퇴한 것이다.
'중국과 문화 > 중국의 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래문화와 황권팽창": 산화랑에 대한 대답 (3) | 2024.09.03 |
---|---|
"외래문화와 황권팽창" 비판: 사로의 신작을 읽고.... (2) | 2024.09.03 |
중국문제의 실질(3): 가국정회(家國情懷) 비판 (1) | 2024.08.28 |
"개혁"이 아니라 "변혁"이 필요하다 (0) | 2024.08.25 |
중국문제의 실질(2): "대통일사상"의 오류 (0) | 2024.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