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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군사

고대 중국의 "군기(軍旗)"

by 중은우시 2023. 6. 27.

글: 역사학당군(歷史學堂君)

 

기원전204년, 측익(側翼)을 강화하기 위하여, 한신(韓信)은 수만의 한군(漢軍)을 이끌고 배수의 진을 치고, 20만의 조군(趙軍)과 정형(井陘)에서 대치했다. 한군은 2천의 복병으로 조군이 한군의 수가 적음을 보고 경적(輕敵)하여 출격한 틈을 타서, 조군의 본영을 공격하여 점령한다. 그리고 "조치(趙幟)를 뽑고, 한의 적치(漢赤幟)를 세운다." 조군은 본영을 적에게 빼앗긴 것을 보자, 사기가 떨어져서, 전군이 궤멸한다. "배수일전(背水一戰)"이라는 성어는 여기에서 유래했다. 이 전투를 보면, 군기의 중요성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고인들은 곰(熊), 호랑이(虎)등 맹수를 숭배하는 심리가 있었다. 그래서 천(布)에 곰이나 호랑이를 그려서 자신의 군대를 보우해주기를 바랐다. 이것이 "기(旗)"이다. 이뿐 아니라, 고인들은 특수한 부호를 가늘고 긴 천(布條)에 그렸다. 이것을 "치(幟)"라고 불렀다. <묵자>는 이 둘을 합하여 처음으로 "기치(旗幟)"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SNS가 없던 고대에 장대의 기치는 등급을 드러내고, 위치를 표시하며 통신연락을 하는 도구로 쓰였다. 그리하여 봉건통치자들에게 중시되었고, 군대내에서 널리 사용하게 된다.

 

독(纛)

 

군기중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것이 "독(纛)"이다. 이는 최고통치자를 상징하고, "기두(旗頭)"로 불린다. 자주 보이는 기치들과는 달리 독을 세우는 장대에는 모구(毛球)가 있는데, 들소(야크)의 꼬리로 만들며, "소(旓)"라고 부른다. '소'로 장식한 '독'은 황제(黃帝)에게서 기원한다. 그는 치우(蚩尤)에게 승리를 거둔 후, 치우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독'을 만들었고, 이때부터 '독'은 신성한 지위를 갖게 된다.

징기스칸 군대가 사용한 "독"

시간이 흐르면서, '독'의 형태에는 약간의 변화가 발생하지만, 시종 전승되었다. 징기스칸의 대독(大纛)은 '소륵덕(蘇勒德, 혹은 소로정(蘇魯錠))'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창모양(矛狀)의 고대병기인데, 창의 공부(銎部, 창을 창자루에 박는 부분)에 원반을 두고 원반에는 81개의 작은 구멍을 내며, 그 구멍을 말갈기로 장식하여 '소(旓)'로 만든다. 송백을 장대로 써서 돌로 조각한 귀좌(龜座)에 꽂는다. 이는 몽골족을 수호하는 성물(聖物)이다. 또한 백전백승의 토템이기도 하여, 지고무상의 지위를 가진다. 북방민족의 '대독'문화의 영향을 받아,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술탄의 영기(令旗)도 '대독'의 양식을 따랐다.

 

아기(牙旗)

 

영화드라마를 보면, 군대가 출정할 때 제기의식(祭旗儀式)을 거행한다. 제사의 깃발이 바로 아기이다. 삼국시대에 설종(薛宗)은 이렇게 말했다: "병서에 이르기를 아기라는 것은 장군의 정(旌, 깃발)이다. 옛날에 천자가 나가면 대아기(大牙旗)를 세운다고 했다. 장대의 위는 상아(象牙)로 장식한다. 그래서 아기라고 불렀다." 그 뜻은 이러하다. 고대에 천자 혹은 장군이 출정할 때면 군영의 앞에 기치를 세우는데, 기의 장대는 상아로 장식한다. 그리하여 '아기'라는 명칭을 얻었다는 것이다.

홍독자황아기(紅纛赭黃牙旗)

아기를 세운 영문(營門)을 '아문(牙門)'이라고 부르고, '군문(軍門)'이라고도 부른다. 이 전통은 유래가 오래 되었다. <주례>에는 '아문'을 '정문(旌門)'이라고 불렀다. "유궁(帷宮)을 위해 정문(旌門)을 설치한다." 북송에 이르러, "최근 들어 풍속이 무를 숭상하면서, 공부(公府), 공문(公門)을 아문(牙門)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글자가 와전되어 '아문(衙門)'이 된다." 아문이 전승되면서 글자가 와전되어 '아문'으로 되었다. '군문(軍門)'은 명나라때 고위장수 예를 들어, 총독, 순무같은 사람의 대명사가 된다. 청나라때는 제독 혹은 총병에 대한 존칭으로 쓰였다.

 

호기(號旗)

 

'배수일전'에서 2천의 한군이 조영을 기습할 때 사용한 것이 바로 홍색의 호기이다. 하급병사들이 대량의 호기를 가지고 출전하여 적을 맞이하는데, 이는 전쟁터에서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기 위함이고, 사기를 고무시키기 위함이다. 장수가 현장에서 지휘할 때, 호기의 수량을 가지고, 병사의 사상현황을 파악한다. 그 외에 호기의 추진속도를 관찰하여, 전장국면의 변화를 판단한다.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이 전쟁승리의 필수요건이라 할 수 있다.

 

신번(信幡)

 

황제를 대표하는 군기로는 독을 제외하고 신번이 있다. 이는 장수의 신분을 표시하는 기치이다. 사마염(司馬炎)이 서진을 건립한 후에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당시, 백호를 그린 번(幡)은 전투를 의미하는 군기였다. 이와 반대로 추우번(騶虞幡)은 평화협상과 전쟁종결의 의미였다. 청나라때 문인 조익(趙翼)은 <이십사사찰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제도에서 추우번이 가장 중요하다" 이는 추우번은 황권의 상징이고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추우'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지금까지도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주로 설표(雪豹), 백화왕렵표(白化王獵豹)와 대웅묘(大熊猫)의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어미설표는 사냥물을 숨겨두는 습관이 있다.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난 후에 오인하여 설표는 인자한 맹수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설표는 <산해경>에서 묘사한 것과 아주 닮았다. 그리하여, 추우는 아마도 설표일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맨앞에 '독', 다음이 '번'

'팔왕지란'때, 황후 가남풍(賈南風)은 추우번의 권위를 빌어, 초왕 사마위(司馬瑋)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그를 주살할 수 있었다. 가남풍이 쫓겨난 후, 진혜제(晋惠帝) 사마충(司馬衷)은 능력이 부족하여 서진의 난국을 장악할 수 없었다. 영녕2년(302년),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이 마음대로 태자를 세우자 여러 왕들이 불만을 갖게 되고, 장사왕(長沙王) 사마예(司馬乂)가 거병을 한다. 사마옹은 다시 한번 추우번의 위세를 빌리려 했으나, 오히려 반격을 당해서 패배한다. 황권을 상징하는 추우번은 황권이 약화되면서 함께 쇠락한다.

 

오방기(五方旗)

 

기치는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위치를 표시할 수도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황제(黃帝)시기에 청, 적, 백, 흑, 황의 다섯 가지 색깔을 이용하여 동, 남, 서, 북, 중의 다섯 방향을 표시했다. 그리하여, '오방기'라고 불렀다. 고대군대가 전투할 때, 오방기는 장수들이 군대를 지휘하는데 편의를 제공하고, 수시로 전장상태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삼국시대 위나라는 기치에서 각각 청룡, 주작, 현무, 백호, 황룡등의 도안을 사용하며 서로 다른 색깔을 써서 서로 다른 부대를 표시했다. 깃발은 서로 소통하고, 연락하는 작용을 한다. 송나라에 이르러, 장수는 "오방기를 가지고 진퇴를 조종했다." 심지어 <수호전>에서도 오방기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제109회에는 "징(金邊)을 치고, 오방기를 내걸고, 대포를 쏘며, 호각을 불어 행군을 모아 각각 진을 갖추고 출전했다" 이는 송군의 작전형태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오방기

이들 군기를 살펴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등급이 분명하고, 상하협조하며 실시간으로 효과적인 작전체계였다. 먼저, 위로부터 아래까지의 국가기기를 나타낸다. "대독"은 황제를 대표한다. 최고통치자로서 전쟁을 시작하는 명령을 내린다. 장군이 명을 받고 출정할 때는 "아기"가 있는 곳이 장수가 있는 곳이다. 손에 호기를 든 병사들은 적극적으로 전투를 벌이면서 용맹하게 돌진한다. 다음으로, 실시간으로 전장의 상태를 반영할 수 있었다. 오방기는 군대를 5부분으로 나누어, 장군은 기치의 변화를 보고 전장의 형세를 파악한다. 그후 작전배치를 조정한다. 이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중요요소이다.

 

전장에서 군기는 이처럼 중요하다. 깃발을 빼앗는 것은 중요한 전공이다. 정형전투초기에 조군은 인원수와 지형의 우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신은 군영을 습격하여 깃발을 빼앗는 방식으로 조군의 사기를 꺽어버린다. 그렇게 하여 상대방을 궤멸시키고, 조왕헐(趙王歇), 대장 진여(陳餘)가 피살된다. 고대전쟁사에서 소수로 다수를 이긴 신화를 이룩한다.

 

개인에게도 깃발을 빼앗는 것은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다. 기원전119년, 서한의 명장 이광(李廣)의 막내아들 이감(李敢)은 대장 곽거병(霍去病)을 따라 막북전투에 참가한다. 대군이 이천여리를 진군하여 이후산(離侯山)을 넘고, 궁려하(弓閭河)를 건너 흉노의 좌현왕부대와 부닥쳐 양군은 격전을 벌인다. 이감은 여럿을 참수했을 뿐아니라, 좌현왕의 전기(戰旗)를 탈취한다. 전후, 한무제는 공로가 있는 장병을 표창하는데, 이감은 깃발을 빼앗은 공로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지고, 식읍 이백호를 받는다. 이감은 '이광난봉(李廣難封)'의 아쉬움을 달랜 셈이고, 이광에 대한 위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병기나 갑옷과 비교하면 고대의 군기는 인기가 적다. 군기는 병기처럼 날카롭지도 않고, 갑옷처럼 몸을 보호해주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의지를 나타낸다. 민족존엄을 대표하고, 군대영혼을 나타낸다. 군대에서 병기와 갑옷은 공견극난(攻堅克難)의 하드웨어이지만, 군기는 사명필달(使命必達)의 소프트웨어이다. 장비와 의지가 만나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조합되면, 비로소 잘 싸울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 지금 군대의 무기는 일찌감치 업그레이드되었지만, 군기의 정신적인 의미는 바뀌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