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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대읍상(大邑商)": 은허(殷墟)도성역사의 비밀을 푼다.

by 중은우시 2023. 4. 12.

글: 하육령(何毓靈)

(광명일보 2023년 4월 9일자게재)

고고학은 고대 유적지의 구조와 배치를 연구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한다. 적게는 우물, 집터부터 크게는 묘지, 작방(作坊)등등 모두 유적지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들이다. 모든 고고학자들은 모든 요소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을 꿈꾼다. 그러나 왕왕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실현하기 어렵다. 만일 시간과 공간적인 요소까지 고려한다면, 유적지의 발굴과 연구는 더욱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많은 대형 도성유적지는 거의 몇대의 고고학자들이 바통을 이어받아 연구하여, 비로소 풍성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도 연이어 나타난다. 갑골문(甲骨文)의 고향, 상나라말기의 도성(都城)인 은허(殷墟)는 더욱 그러하다. 

 

은허의 갑골문에는 "대읍상(大邑商)", "천읍상(天邑商)", "중상(中商)"등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가장 먼저 '중국(中國)'이라는 두 글자를 남긴 서주(西周)의 청동기 하존(何尊)의 명문(銘文)에도 명확하게 "대읍상"이 언급되어 있다. 그 확실한 의미에 관하여, 갑골문이 발견된 이래, 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의견일치를 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저 "대읍상", "천읍상"이 상왕조를 광범위하게 가리킬 수도 있고, 은허도성과 왕기(王畿, 도성주위지역)지역을 확실하게 가리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다만 문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점' 혹은 '면'이어서, 여러 학과, 여러 차원, 여러 시각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은허도성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연구할 수는 없었다. 

 

1928년 발굴을 시작한 이래, 은허의 구조, 배치, 연대와 성격을 밝히는 것이 역대 은허고고학자들의 주요임무였다. 1920,30년대에는 궁전과 왕릉을 발굴하는 외에, 이제(李濟), 양사영(梁思永)등이 '겸급사린(兼及四鄰)'의 사상을 내놓고, 왕궁, 왕릉 이외의 탐색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1950년이후, 성향건설이 진행하는 것에 협조하여, 고고발굴은 전체 은허범위내에서 전면적으로 전개되고, 거주지, 작방, 묘지등이 계속하여 발견된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도읍내의 사회구조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학자들은 은허의 서로 다른 단계의 고고학적 신발견, 신인식을 기초로 하여, 약간의 연구성과를 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79년, 양보성(楊寶成), 양석장(楊錫璋)은 은허 서구(西區)의 근 천개의 묘장을 연구하면서, 특히 청동기 명문연구를 통하여, 은나라 사람들은 "취족이거(聚族而居), 합족이장(合族而葬)"(일족이 모여서 거주하고, 함께 묻었다)했다고 쓴다; 1995년 정약규(鄭若葵)는 처음으로 은어 대읍상의 족읍(族邑)배치를 검토하여, "무릇 은나라때 묘장군이 출현하는 곳이, 모두 아마도 동시에 어느 일족의 소재지였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최근 들어, 전통적으로 인식되던 원북상성(洹北商城), 은허구역이외에서도 계속하여 새로운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진다. 특히 원북상성과 동시기의 도가영환호취락(陶家營環壕聚落), 은허와 대체로 동시기인 신점(辛店)의 초대형 주동작방(鑄銅作坊)유적지의 발견은 사람들에게 소위 '대읍상'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던지게 된다. 이 세기의 난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고고학적으로 연구해야할 필요가 있다.

 

초대형 도읍은 왕왕 더 많은 주목을 받는다. 그러나 나무 하나로 숲을 이룰 수는 없다. 도읍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상응한 구역내에 별처럼 흩어져 있는 소형취락과의 관계도 분리할 수는 없다. 취락고고학의 이념과 방법을 채용하여 '대읍상'이 무엇인지를 해결하려는 것은 여전히 효과적이고 중요한 수단이자 경로이다. 거시적인 각도에서 말하자면, 도읍으로서의 은허와 왕기내외의 여러 족읍(族邑), 방국(方國)의 관계문제는 정치, 경제, 군사등 국가통치모델의 문제이고, 또한 초대형취락과 차급(次級) 취락의 관계문제이다. 만일 범위를 하나의 유역으로 축소시킨다면, 유적지간의 상호관계는 더욱 분명해지고 직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원북상성과 은허의 소재지인 원하(洹河)유역에 대하여 여러번 고고학적 조사를 진행했다. 그중 1990년대후반 미중공동조사팀이 진행한 조사성과는 풍성했다. 원북상성은 이번 조사에서 최대의 수확이었다. 이에 기하여, 당제근(唐際根)등은 원화유역의 "일대대중소(一大帶衆小, 하나의 큰 도시가 여러 작은 도시들을 거느리다)"의 배치모델을 제시한다.

 

2021년에 발견된 도가영유적지는 원북상성의 북쪽 약 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면적이 근 20만평방미터에 달한다. 유적지의 동부는 방형(方形)의 환호(環壕)로 둘러싸여 있는데, 면적이 근 10만평방미터에 달한다. 탐사와 발굴로 보면, 도가영유적지는 규모가 중등(中等)이며, 유적지내부의 업무분장이 비교적 명확하다. 거주지, 작방, 묘지등이 질서정연하게 분포되어 있다. 묘장내에 함께 묻은 대량의 청동예기는 이 유적지의 등급이 낮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 중요한 발견은 우리들로 하여금 원북상성 서쪽 약 1.4킬로미터에 위치한 은허왕릉의 건설시작연대를 다시 한번 살펴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원하남안의 1930년대에 발굴한 "소둔오좌묘(小屯五座墓)" 및 "갑조기지(甲組基址)"의 연대와 성격문제도 새로 검토하게 만들었다. 양자는 모두 장기간 학술계를 괴롭혀 온 '오래된 난제'였다.

 

도가영유적지의 발견은 우리들로 하여금 사고를 전환하게 만들었다: 원북상성의 470여만평방미터라는 방대한 규모와 비교하면, 상나라중기의 도가영유적지와 소둔유적지는 원북상성 주변의 2급취락이다. 왕릉구의 78M1묘장의 연대를 보면, 왕릉이 건조되기 시작한 연대는 원북상성단계에 대응한다; 안양현(安陽縣) 서장촌(西蔣村)유적지등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발굴도 규모가 더욱 작은 상나라중기유적지들이 마찬가지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하여 대체로 원하유역 상나라중기 3급취락의 사회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후 고고학적 조사와 발굴자료가 더욱 풍부해지면 취락의 단계는 아마도 더욱 풍부하고 더욱 입체적이 될 것이다.

 

2016년, 은허궁전구역에서 직선거리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새롭게 면적이 100만평방미터에 달하는 신점유적지가 발견된다. 탐사와 발굴에 따르면, 이곳은 은허에서 현재 알려진 최대의 청동기작방유적지이다. 면적은 50만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청동기명문을 보면, 청동기주조에 종사하는 가족은 주로 "과(戈)"족이었다. 작방내부에서는 생산, 생활과 묘장이 복잡하게 하나로 뭉쳐진 배치형식을 보인다. 신점유적지외에 심지어 전통적으로 은허분포구의 서남, 동남등 아주 먼 곳이라고 여겨지던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규모가 비교적 크고, 등급이 낮지 않은 만상(晩商)시대의 유적지가 발견된다. 이들 새로운 발견은 비록 모두 원하유역에 속하지만, 기본적으로 역대 원하유역조사시기에 강조되었던 원하남북양안을 접한 구역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 이는 이 시기의 인류가 생산, 생활능력을 어느 정도 증강시키면서, 족읍과 취락을 선택할 때, 수원(水源)의 중요성이 이미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는 고고학자들에게 취락고고조사와 탐사를 진행할 때, 원래의 관성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도가영, 신점등 유적지가 은허와 다른 등급의 '위성도시'같다. 그들의 발견은 전통적으로 인식되던 은허범위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꾸어준다. 또한, 현재 3급 심지어 더 많은 등급의 취락구조형식을 드러낸다. 이것이 아마도 갑골문, 금문에서 말하는 "대읍상"일 것이다.

 

다만, 현재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신점 유적지같은 규모의 2급취락은 전통적인 은허의 외곽에 얼마나 많이 존재했을까? 게다가 3급취락의 중소형유적지의 분포수량과 밀도는 어떠했을까? 이들 서로 다른 규모의 취락내의 구조는 어떠했을까? 단일족읍취락이었을까, 아니면 엄지빈(嚴志斌)이 말한 것처럼 "공(工), 거(居), 장(葬)합일"의 모델이었을까?

도가영유적지에서 발굴된 청동기

이미 어떤 학자는 은허도읍의 내부구조 및 발전모델에 대하여 연구를 시작했다. 단지 자료에서 아직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여, 관련연구가 크게 성취를 얻기는 아주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면서, 은허의 일부 신발견이 특히 주목받고 있다.

 

도로는 도성배치의 틀이다. 한편으로 연결과 교통의 작용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서로 다른 공능간의 경계선이 된다. 도시고고학에서 도로는 시종 중요한 유적지이면서 단서이다. 이리두(二里頭) 유적지의 "구궁격(九宮格)"식구조형태는 바로 도로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은허에서는 일찌감치 도로가 발견되었다. 다만 2008년 궁전구역 남쪽 약 1킬로미터지점에서 두 개의 남북방향 도로, 1개의 동서방향도로가 발견되면서 비로소 은허도로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방향이 시작되었다. 그후, 원하남북양안에는 모두 도로를 찾기 위한 탐사와 발굴이 시작된다. 대사공촌(大司空村), 소사공촌(小司空村)등지에서 새로 여러 개의 도로가 발견된다. 거기에서 발견된 두 개의 동서방향도로와 1개의 남북방향도로에는 교차로가 있다. 두 개의 동서방향도로간에는 남북으로 약 500미터가 떨어져 있으며, 도로의 양측에는 항토거주지, 회갱(灰坑), 우물, 제사갱(祭祀坑), 심지어 묘장까지 발견된다. 은허도성에 많은 서로 다른 족읍과 공방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들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족읍과 공방이 서로 대응하여 생활하지 않았을까? 현재로서는 분명하게 대답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아주 좋은 연구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후 은허탐사와 발굴에 방향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최근 새로 발견된 소가붕(邵家棚) 유적지는 은허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다. 아마도 "책(冊)"족의 족읍이었을 것이며, 다배다진(多排多進)의 사합원식 항토건축, 묘장, 차마갱등이 발견되어, 족읍취락의 내부구조를 드러냈다. 이후 탐사와 발굴에서, 반드시 그 주변구역에 대형도로가 있는지를 알아봐야 할 것이다.

 

갑골문을 찾는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은허의 궁전구역에 대해 고고학적 발굴을 진행했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이 남았다. 지원(池苑)의 발견은 이전의 궁전배치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꾸었다. '지원'에 대한 이해는 1930년대에 발굴된 '대황토갱(大黃土坑)'에서 시작한다. 2004-2005년 궁전구역을 다시 조사, 탐사할 때, 갑조와 을조기지의 서쪽, 병조기지의 서북쪽에서 '지원'이 발견된다. 지벽(池壁)은 비탈지고 가운데는 깊이가 12미터이상이며, 안에 쌓인 흙은 황사토(黃沙土)와 어토(淤土, 진흙)였다. 평면은 "도화형(倒靴形)"을 보인다. 북으로는 원하와 연결되어 있고, 남으로는 궁전구역까지 이어진다. 면적은 4.5만평방미터이상이다. 2018-2020년에 다시 지원의 범위와 규모를 확인했는데, 면적은 6만평방미터이상, 최대깊이는 16미터에 달한다는 것이 밝혀진다. 동쪽의 궁전건축에 있는 수구(水溝, 도랑)와 연결된다. 지원과 원하로 둘러싸인 '핵심도(核心島)' 및 그 위의 항토건축은 가장 중요한 발견이다. 현재 지원에 대하여 아는 것은 아직 한계가 있다. 그 형제, 연대, 성격등에 대하여 모두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실제로, 궁전구역 혹은 다른 구역과 비교하여, 은허의 왕릉구역의 탐사와 발굴은 가장 철저했다. 비록 200여년에 걸쳐 있지만, 왕릉과 제사갱의 배치는 정교하고, 상호간에 서로 침범하거나 겹치는 관계는 극히 적었다. 설사 그러했지만, 여전히 하나의 큰 의문이 남았다: 왕릉구역의 경계선은 어디까지였을까. 시설, 설비로 범위를 나타냈을까? 마찬가지로 연대(連帶)의 문제도 있다. 원하남안의 궁전과 어떻게 교통왕래했을까? 이상의 양대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2021년부터, 왕릉 및 주변에 대한 탐사와 발굴을 진행하고, 왕릉의 동서 양구역에 대응하는 두 개의 위구(圍溝)를 발견한다. 동위구는 대묘와 대량의 제사갱 주위를 둘러싸고 있고, 동서간으로는 대체로 246미터, 남북으로는 236미터이다. 구의 너비는 10미터를 넘으며 가장 깊은 곳은 3.5미터이다. 서위구는 왕릉서구의 대묘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두 개의 위구의 위에는 두개의 결구(缺口)가 발견되었다. 여러 요소를 보면, 두개의 위구는 왕릉과 명확하게 관련이 있다. 왕릉위구의 발견은 능원배치에 대한 원래의 인식을 깰 수 있게 해주었고, 상나라때 능원제도에 대한 연구를 크게 촉진시킨다.

 

최초의 '겸급사린'에서 은허배치를 찾는 것까지 많은 성취를 거두어 왔다. 근 백년간 몇 대의 고고학자들이 시종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근 '무엇이 대읍상인가?'라는 '종극'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노력해왔다. 시공의 각도에서 동태적인 은허는 날이갈수록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만 우리는 아직 이를 가지고 은허배치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대로 여러 핵심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래된 문제를 해결하면서 새로운 문제가 계속하여 나타나고 있다. 향후 장기간동안, 고고학자들은 여전히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거시에서 미시로, 다각도로, 다층차로, 전방위적으로 '대읍상'을 연구해야 한다. 과제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대규모탐사, 소규모발굴, 여러학과간의 공동작업은 고고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무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