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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대학

원위시(袁偉時): 진실된 말을 하고, 자기의 말을 하라.

by 중은우시 2023. 5. 4.

원위시, 중산대학 철학과 은퇴교수, 중국근대사 전문가.

 

2010년 12월 15일, 중산대학 철학과 은퇴교수 원위시의 80세 생일이었다. 자칭 "80후"라는 이 노소년은 자신의 생일에 이런 말을 남겼다: "소간진효(笑看塵囂), 해설취설(該說就說)!"(소란스런 속세는 웃어넘기고, 해야할 말은 하도록 하자). 원위시는 같은 세대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후반부에 이르러 정신과 사상의 각성을 하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 경제학을 공부했고, 그후 철학을 공부했다. 그후에는 근대사상, 근대사를 연구했다. 한걸음 한걸음 분야를 개척하면서, 목소리를 냈고, 최종적으로 학계내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원위시의 진정한 학술생애는 '문혁'이후부터 시작된다. <중국현대철학사고(中國現代哲學史稿)>는전체 사상문화사분야를 개척한다. <만청대변국중의 사조와 인물(晩淸大變局中思潮與人物)>은 전통학계의 근현대사인물연구를 뒤집어놓았다. 최근 들어, <현대화와 역사교과서(現代化與歷史敎科書)>라는 글은 '빙점사건(氷點事件)'을 불러일으키고, 원위시는 여론의 촛점이 되어 예상하지 못한 큰 파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나는 그저 내가 본 역사의 본래면목을 사실대로 종이 위에 썼다." 원위시의 말이다. 맹목적인 추종, 맹목적인 신앙에서 조금씩 조금씩 상식을 회복하고, 자신감을 건립해나갔다. 이는 원위시의 경력만이 아니다. 그와 같은 세대 사람들의 경력이다. 더더구나 여러 세대가 공동으로 걸어오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반복하고 있는 과정이다. 전체민족의 정신성장과정이다.

 

"80후"의 명단에는 모우식(茅于軾), 강평(江平), 원륭평(袁隆平),  이택후(李澤厚), 오경련(吳敬璉)....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오관중(吳冠中), 주후택(朱厚澤)등이 있다. 이들 지식인들은 우환(憂患)의 시기에 태어나, 이란(離亂)의 시기에 성장하면서 시종 자신의 이상을 견지하며, 21세기로 접어들었다. 백발이 창창하면서도 여전히 사상, 문화와 학술의 선봉에 섰다. 그들의 풍부하고 굴곡많은 인생경력은 이미 다시는 복제될 수 없다. 그들의 정신은 고금에 걸쳐 있고, 중서의 전체 모습을 관통한다. 그 사상학술관점은 더더욱 쉽게 얻은 것이 아니다. 마땅히 민족과 국가의 가장 고귀한 재산이라고 할 것이다.

 

곤혹(困惑)

 

내가 복단대학(復丹大學)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1956년초, 나는 중국학생대표로 영국을 방문한 바 있다. 그때 전국학련(全國學聯)은 공청단중앙(共靑團中央) 산하의 일개 기관이었다. 일찌기 영국 런던정치경제학원의 두 학생대표를 중국으로 방문하도록 초청한 바 있다. 상대방도 관례에 따라 중국에서 경제를 공부하는 두 학생의 답방을 초청했다. 전국에서 두 명을 선발하는데, 한명은 인민대학 학생인 완초(宛樵)였고, 다른 한명이 나였다. 방문과정에 인상이 아주 깊었던 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가 아주 곤란했다는 것이다. 한번은 모스크바공항의 가장 맛있기로 공인된 식당에서 우리는 빵을 먹었다. 그런데, 버터를 다 발라서, 종업원에게 버터를 더 달라고 했더니,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돌아올 때,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가장 큰 백화점의 문앞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뭐하는 건가 싶어서 알아봤더니 구두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이었다. 2층부터 건물바깥까지. 우리는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어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 봤더니 매장에 물건이 얼마 없었다. 길거리의 행인들은 옷을 아주 잘 입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니트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겨울이라 영하날씨이지만 곳곳에는 손에 아이스케키를 든 사람들이 보였다. 광주(廣州)사람들이 설조(雪條)라고 부르는 그것을 먹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모스크바에 대한 인상이었다.

 

나중에 프라하에 갔는데, 공산당이 이끄는 국제학련(國際學聯)에서 우리를 초대했다. 프라하에서 가장 좋은 호텔에 투숙했고,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청단중앙이 우리의 숙식을 책임졌다. 한번은 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어와서, 나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닭고기를 먹고싶다고 했다. 그러나, 없었다. 프라하에서 가장 좋은 호텔에 닭고기가 없었다. 다음 날, 그들은 아주 기뻐하면서 우리에게 닭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접시가 올라왔는데, 깨물어 먹자 어찌된 건지 뜯기지가 않았다. 그들은 우리를 데리고 길거리를 구경시켜 주었는데, 공급이 아주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에 도착하니, 그때는 2차세계대전이후였지만, 사회는 이미 정상으로 회복되어 있었다. 공급도 전혀 달랐다. 그때 둘을 비교하고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은 전체 제도문제에 대하여 의심을 품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굳건하게 자신의 조국을 위해 변호했다. 스코틀란드의 글래스고대학에 갔는데 마침 2명의 미국학생도 거기에 와 있었다. 학생회는 우리와 그들간의 변론을 조직했고, 서로 격렬하게 논쟁을 벌였다. 곁에서 듣고 있던 영국학생이 동방학생은 머리가 좋다라는 말을 해서 아주 득의양양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대학원을 마치고 광주로 돌아갔다. 기차에 오르자마자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소식이 들렸다. 현재 광주에서는 한 사람이 하루에 2마오(毛, 마오는 元의 1/10)어치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2마오짜리 고기가 무슨 의미인가, 1위안으로 1근(500그램)을 살 수 있다. 2마오로 살 수 있는 건 2냥(100그램)이다. 아주 적다. 상해와 북경은 전국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공급을 보장해주는 곳이어서 아무리 곤란할 때라고 하더라도 물자공급은 충분했었다.

 

졸업후에 정치경제학을 가르치게 된다. 그러나, "대약진"이후 경제는 전혀 연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수업때는 그저 <인민일보>와 <홍기>잡지의 기본관점을 가르쳐야 했다. 자신의 관점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경제자료는 기밀이고 봉쇄되어 있어서, 아예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리를 굴리는 것을 좋아해서, 무슨 일이든 근본까지 파고 들어가는 편이다. 그래서 거기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역사는 아마도 비교적 천지가 넓지 않을까? 그리하여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곤혹에 대답을 찾아내기 위해서. 내가 연구하게된 이유는 남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먼저 스스로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 마음 속으로 느끼는 곤혹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나는 중국역사를 연구하는 것으로 방향을 튼다. 시간만 있으면 도서관에 처박혔다. '문혁'후에는 철학과로 가서, 중국근현대철학사를 가르쳤다.

 

나중에 하향(下鄕, 시골로 내려가는 것)하였다. 내가 간 곳은 아주 부유한 곳으로 고명(高明)이라는 곳이었다. 토지가 아주 많았고, 1인당 토지면적도 넓었다. 먹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나중에 '대약진'운동을 하게 되는데, '대약진'의 방식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무슨 새로운 생산력을 도입하지도 않으면서 모조리 체력에 의지하고, 추가노동을 했다. 이건 아주 불합리한 것이다. 비료도 없어서, 허물어져 가는 진흙벽돌집을 부숴서 비료로 썼다. 기실 효과도 크지 않았다. 그리고 목표치는 계속 높아졌다. 처음에는 20%에서 50%까지 증산하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100% 증산하라고 했다.

 

한번은 현(縣)에서 3급간부회의를 개최한다. 나는 하향간부의 조장이었으므로, 가서 배석했다. 회의 끝자락에 현의 최고책임자가 말한다: 이제 줄을 서라. 쌀을 무(畝, 100평)당 800근을 생산할 수 있으면 저쪽으로 가고, 못하겠으면 남아라. 가을에 생산량을 배로 늘리라는 것이다. 이건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현위원회의 결정이었다. 공산당원으로서 들어야할 것인가, 듣지 말아야 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그저 분위기를 따라서 걸어나갔다.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내가 소재하고 있던 고명현(高明縣) 대남합작사(大楠合作社)의 지부서기 두붕비(杜鵬飛)가 나에게 눈짓을 하면서 말했다: "네 생각에 가능할 것같으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발은 움직이지 못했다. 이건 나에게 평생 큰 영향을 끼친다. 관건문제에서, 반드시 견지해야 한다. 맞는 것은 맞는 것이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그저 흐리멍텅해서는 안된다.

 

각성(覺醒)

 

다행히 그 시대에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노신(魯迅)과 호적(胡適)은 나의 공부에서 스승이고, 나를 몽매에서 벗어나게 해준 길안내자들이다. 중학교때 노신은 나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1949년이전에 나는 노신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 호적은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후 읽었다. 그때 중산대학의 도서관은 장서가 정리되어 있지 않았는데, 도서관 관원인 하영종(何永鍾) 선생은 힘들여서 <호적문존(胡適文存)> 전체를 나에게 찾아주었다. 나는 호적의 모든 저작을 읽었다. 그리고 그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선생은 다시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합집(飮氷室合集)>의 원판을 세트전부 찾아서 나에게 읽도록 해주었다. 나는 그제서야 양계초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읽은 후, 그들의 말이 모두 옳다고 느꼈다. 내가 중학교때 읽은 <관찰>에서 느꼈던 것과 아주 부합했다. 즉 공민자유를 보호하고, 민주를 보호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1980년, 그때 나는 비록 아직 철저히 각성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자신의 공부방법을 찾아냈다. 나는 <호적20년대의 세계관>을 써서, <철학연구>에 기고했다. 몇달 지나서, 돌연 편집부의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성의있게 말했다. 너의 글을 중국철학사조에서 모두 좋다고 해서 주편(主編)에게 추천했는데, 그는 신중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5명의 전국에서 저명한 전문가들에게 검토를 받자고 했다. 그런데 관점이 적절하지 않으니 발표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아주 미안하다. 그때 온 사람은 나중에 친구가 되는 몽등진(蒙登進) 형과 장(張)씨성의 여자편집자였다(정말 미안하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기실 그건 무슨 놀라운 글도 아니었다. 다만 호적이 제출한 자연주의 인생관을 유심주의의 쓰레기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을 뿐이다. 여기서 설명을 해야겠다. 이건 정상적인 익명의 원고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라는 틀을 척도로 삼아, 다른 학술견해를 억눌렀다. 5명 중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2명이 있다. 한 사람은 인민대학의 석준(石峻) 교수이다. 그는 나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발표해야 한다고 했다. 죽어라 반대한 사람은 중화서국(中華書局)의 총편집 이간(李侃)이었다. 그는 주류역사학의 대표인물이다. 이렇게 하여 글은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다. 3년후 이 글은 <근대중국인물> 제1집에 원문 그대로 실리게 된다.

 

노신은 반독재이다. 그러나 그는 현대사회가 어떤지를 몰랐다. 그래서 그는 소련을 모범과 이상으로 삼았다. 기실 진정 인류의 이상과 현대사회를 이해한 사람은 호적이었다. 이것은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다른 방면으로, 나는 진독수, 이대쇠같은 초기 공산주의자들을 연구한다. 나는 두 방면으로 보았다: 한편으로 그들도 자유, 민주를 찬성했고, 나도 동의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나도 그것은 옳았다고 생각했다.

 

당시 그들은 자유민주의 각도에서 사회주의를 논증했다. 이대쇠는 사회주의를 얘기할 때, 민주의 각도에서 얘기했다. 그는 사회주의야말로 민주의 현단계에서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이는 나의 첫번째 책인 <중국현대철학사고>에 반영되어 있다. 내가 철학과에서 가르치는 것은 중국철학사이다. 특히 후반부는 근현대철학사이다. 중국에는 기실 순수한 철학이 없다. 실제로는 모두 사상사나 문화사이다. 그래서 많은 현실문제를 접촉하게 된다. 나는 원시자료부터 시작하여, 얻어낸 결론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당시 이 책은 전체 학과영역에 걸쳐 있었고, 여러가지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으며, 마르크스주의에 대하여는 그래도 긍정적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철저하게 각성하게 된 것은 1990년대초이다. 그래서 나는 후지후각자(後知後覺者)이다. 90년대초에 <만청대변국중의 사조와 인물>을 썼는데, 그것은 나의 학술생애가 성숙단계로 접어드는 것을 나타냈다. 이 책은 전통적인 역사에 대하여, 근현대인물의 연구를 뒤집어버리는 내용이었다. 여러해동안 유행하던 만청연구의 역사관점에 대하여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임칙서, 곽숭도, 이홍장, 증국번과 외국주중선교사에 대한 것들.

 

1994년, 나는 은퇴한 이후 일련의 책을 출간했다. 학술성과는 더 많아 보였다. 은퇴전에는 2권의 책을 출간했는데, 은퇴후에는 10여권을 출간한 것이다. 당연히, 이전에 대량으로 읽은 책들이 나에게 큰 역할을 했다. 이대쇠, 양계초, 호적, 왕성공(王星拱), 두아천(杜亞泉)등의 서적이다.   나의 그 <중국현대철학사고>에는 따로 장, 절을 만들어둔 사람이 30여명이다. 대체로 다른 사람들은 잘 연구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나중에 이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찾아왔다.

 

뒤에 계속하여 새로운 관점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공부방법과 큰 관계가 있다. 나는 한 인물을 연구하면서 나는 전면적으로 그의 저작을 읽으려 했다. 노신의 한 마디는 나에게 큰 계시를 주었다. 사람을 알고 일을 논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연도순서대로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이전 사람의 글이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두리뭉실하게 그의 사상을 얘기한다. 나는 몇 단계로 나누어 한 사람을 얘기한다. 맥락을 비교적 분명하게 나누는 것이다. 그의 사상변화를 연구하는데 아주 정확하게 된다. 그외에 나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은 믿지 않고, 의심하는 태도를 취한다.

 

나는 갈수록 느끼고 있다. 역사가 어느 곳에서 왜곡되어 있으면 그곳을 돌파구로 삼아야 한다고. 진실된 말을 해야 하고, 자기의 말을 해야 한다고. 나의 진실된 말과 자기의 말은 어디에서 왔는가? 나의 학술성취는 어디에 있는가? 나의 학술중점은 많은 경우 역사의 본래면목을 회복시키는데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맡은 중임이 바로 거짓된 역사현상을 무너뜨리고, 중국인의 사상을 속박하는 족쇄를 부숴버리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관(史觀)

 

나는 계속하여 생각해왔다. 신문화운동은 "54"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고. 진독수가 <청년잡지>를 창간한 때로부터 시작된 것도 아니라고. 일찌기 아편전쟁을 전후하여, 신문화운동의 맹아가 있었다. 설사 나중에 "54"신문화운동이라고 불리게 되지만, 신해혁명이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현재 다시 신문화운동을 제출하는 것은 역사경험을 종합하고, 인류현대문명의 각종 우수한 것을 학습하고, 다시는 중국사회전환의 과정이 시간낭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계속하여 굳건하게 신문화운동의 성과를 옹호해왔다. 1988년, 임육생(林毓生) 선생의 <중국의식의 위기>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중 하나의 아주 중요한 논점은 신문화운동이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기본관점에 동의할 수가 없다. 중국문화서원이 '54' 70주년기념글을 요청해와서, 단숨에 <오사원곡시석(五四怨曲試析)>을 써서 중국문화서원으로 보냈다. 다만 3년후에야 비로소 <철학잡지>에 실린다.

 

1990년, 뉴욕 성요한대학 이우녕(李又寧) 교수가 그녀가 주편인 <호적과 그의 친구> 혹은 <호적과 그의 논적>에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나에게 김악림과 호적을 쓰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바로 말이 나왔다: 나는 임육생이 호적에 대하여 비판한 것을 쓰겠다! 오랫동안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던 것이니 일사천리로 <호적과 소위 "중국의식의 위기">를 서서 미국으로 보냈다. 이 글은 직접적으로 임육생 선생의 관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편찬한 <친구>는 하나하나 세상에 나오는데, <논적>은 오리무중이었다. 나중에 심천대학 경해봉(景海峰) 교수가 편찬한 <문화와 전파>에 실려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1993년의 일이다.

 

<현대화와 역사교과서>라는 글로 돌아가보자. 기실 2002년 <동방문화>에 실린 옛글이다. 다지 수천부만 인쇄되어서 영향력이 크지 않았었다. 2005년말, 하루는 이대동(李大同)이 전화를 걸어와 나를 찾았다. 그는 <중국청년보> '빙점주간'의 주편이다. 그는 인터넷에서 내 글을 보았는데, 아주 잘 쓴 것이니, <빙점>에 발표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 글은 이미 발표한 것인데, 네가 재발표를 원하면 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는 아주 기뻐하면서 글을 실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큰 파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내가 그 글을 쓸 때 아주 조심했다. 내 생각에 내가 제기한 두 가지 문제 - 화소원명원(火燒圓明園)과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 - 은 반박할 수가 없다. 사료가 아주 충분하다. 나머지는 내가 얘기하지 않았다. 단지 2개의 반박불가능한 사실을 골라서 얘기한 것이다. 그런데 큰 파란이 일어난 것은 예상밖이었다.

 

이 글이 나온 이후, 나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나는 이미 은퇴했고, 나는 나의 책임이 글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일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사건발생후, 아무도 나를 찾아와 얘기하자고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은 아주 조용히 지냈다. 조그만치의 압박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아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맞다. 그런데 내가 왜 압박을 느껴야 하는가?

 

금년에 나에게 특별히 즐거운 일은 9월에 인민일보사가 주최하는 강행물인 <문사참고>의 한 편집자가 나에게 글을 써달라고 요청해왔다는 것이다. 금년은 '화소원명원' 150주년이니, 내가 글을 써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나는 말했다. 나의 관점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도 발표할 수 있겠느냐? 그는 그들도 논의해 보았고, 발표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결과 나는 6천자의 글을 써서 그에게 보냈다: <원명원:고난은 봉쇄와 낙후에서 왔다>. 제목만 봐도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진상은 어쨌든 감출 수가 없다.

 

이 글은 기실 예전 <현대화와 역사교과서>의 관점의 연속이다. 핵심관점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많은 자료를 보충했다. 원명원의 고난은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이건 나의 문명사관과 아주 큰 관계가 있다. 문명사관은 국수주의와 완전히 대립되는 것이다. 왜 나는 중국인이 잘못한 일을 비판하는가? 그것은 문명사관때문이다. 편협한 국가민족의 범주에서 고려하지 않고, 전체 인류의 문명에서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체 인류의 문명에서 고려한다면,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왜 원명원에서 3일간 큰 화재가 나게 되었는지를 보자. 영국프랑스연합군이 병력을 파견하여 북경부근으로 다가왔다. 몽골의 승거린친(僧格林沁) 친왕(親王)은 병력을 이끌고 그들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패배한다. 북경은 당시에 담판을 요구했고, 영국프랑스연합군은 개략 40명을 보내어 담판했고, 평화롭게 해결하기로 합의했다. 이때, 승거린친친왕이 담판에 참여한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사람들을 억류한다. 이건 문명에 관련된 문제이다. 어찌 담판인원을 억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전투가 다시 일어나고, 승거린친친왕은 여전히 일격에 궤멸당한다. 그리하여 부득이 다시 협상하자고 애걸할 수밖에 없었다. 합의가 이루어진 후, 영국프랑스연합군은 억류된 인원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청나라정부는 시간만 끌고 1주일이 되도록 사람을 내놓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에 기실 절반만 돌려보냈는데, 나머지 절반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돌려보낸 절반도 혹형을 당했고, 한 프랑스인은 생식기가 잘렸다. 영국프랑스연합군은 극도로 분노했고, 그들은 어떻게 청나라정부를 징벌할지를 협의했다. 백성들에게는 화가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원명원과 부근의 황가원림을 불태워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전에 원명원을 약탈하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소규모였다. 당연히 약탈과 방화는 범죄이다. 다만 원인은 이런데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비판하는 출발점은 바로 인류문명을 보호하는 것이고,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는 것이다. 인류문명은 각양각색의 규칙으로 인류의 야만성을 속박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내가 금년에 명확하게 우리는 문명사관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문명사관은 바로 민족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 역사현상을 해석하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하여 일관되었고 비교적 명확했다. 이는 인류의 공동가치이다. 인류가 처음부터 자유를 얘기하고, 법치를 얘기하고, 문명을 애기하고, 민주를 얘기한 것이 아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해석하고 고대의 역사에 대하여 판단함에 있어서, 나는 문명사관이 가장 정확하다고 본다. 점진적이어도 좋고, 혁명적이어도 좋다. 문명이 진보하면, 공동의 기준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인류가 공동으로 인정하는 가치관이다. 이것이 바로 문명사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