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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순치제)

탕약망(湯若望)사건 - 소위 순치제독살사건

by 중은우시 2005. 8. 31.

탕약망의 본명은 Johann Adam Schall von Bell(중간 이름으로 아담 샬이라고 보통 불림)이며, 1592년 5월 1일 독일의 쾰른의 귀족가정에서 태어났다. 중국에 파견나온 예수회 전도사로는 마테오 리치(利瑪竇, 1552-1610)의 뒤를 이어 중국의 역사에 많은 공헌을 했다. 1666년 8월 15일 북경에서 사망하였으며, 북경시 서성구 등공산란묘지(현재의 차공장, 중국공산당 북경시위윈회당교 내)에 묻혔다.

 

1603년 그는 로마의 영채연구원(Accademiadei Lincei)의 원사가 되고, 1611년 예수회에 가입한다. 1622년 Nocolas Trigault의 부름을 받아 다른 원사인 스위스국적의 등옥함(鄧玉函, Joannes Terentius)등 22명의 예수회 전도사들과 1618년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1619년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불행히도 22명중 8명만이 중국에 도착한다. 일정기간동안 중국문화를 익힌 후, 1622년 북경에 와서 한어를 공부하면서 3번에 걸친 월식을 정확하게 계산하여 명성을 떨친다. 이후 서안으로 전도를 떠난다. 1929년 서안에서 전도하고 있던 탕약망은 등옥함이 죽은 후 숭정제의 명을 받아 북경으로 와서 등옥함이 수행하던 직을 물려받아 서광계(徐光啓)를 도와 역법을 수정, 편찬하고, 천문기기를 제조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1644년 청나라 군대가 북경에 입성한 후, 탕약망은 외국인으로 최초로 흠천감(欽天監, 천문관측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의 감정(監正, 최고책임자)를 맡는다. 또한, 순치제로부터 인정받아 1651년 통의대부(通議大夫), 태복시경(太僕寺卿), 태상시경(太常寺卿)의 관직을 세개나 연속으로 받아 정5품에서 정3품으로 오른다, 이후 1653년에는 "통미교사(通微敎師)"라는 칭호를 내리는데, 국사(國師)의 대우를 한 것이다. 1658년에는 광록대부(光祿大夫)를 내려 정1품의 대우를 받는다. 또한, 순치제의 특별허가하에 궁중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다. 또한, 그의 나이가 이미 예순이 넘은 것을 감안하여 황제를 배알할 때의 삼궤구고의 예도 면해주고, 그를 위해 특별히 부드러운 의자도 마련해준다. 순치와 탕약망의 관계는 마치 부자간과 같이 가까웠다고 한다. 순치제는 탕약망이 거주하던 남당(南堂)에 24번이나 방문하여, 나무에 올라 과일을 따기도 하고, 서양의 포도주를 맛보기도 한다. 순치제는 20세 생일을 남당에서 지냈으며, 이 때 탕약망은 특별히 13개의 연회탁자를 준비하여 생일파티를 열기도 하였다.

 

1662년 순치제가 사망하면서, 8살된 강희제가 등극한다. 당시에 강희는 아직 친정을 하지 아니한 상태이며, 아오바이(鰲拜)를 위시한 4대 보정대신(輔政大臣)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흠천감에서 쫓겨난 바 있는 중국 천문학자 양광선(楊光先)은 순치제 재위시에 예부에 글을 올려 기독교를 비판하고, 탕약망의 신역법이 중국전통에 어긋난다는 점을 간하는 글을 올린다. 그러나, 순치제 재위기간동안에는 처리가 되지 않고 있다가, 순치제가 사망하자, 아오바이등이 이를 활용하여 탕약망에게 타격을 가한다.

 

저녁에 탕약망의 수하에 있는 1명의 신부와 4명의 중국인 기독교도를 체포하고, 탕약망의 과학기술학교를 폐지시키며, 탕약망이 7년의 시간을 들여 완성한 150권의 과학기술번역서도 인쇄가 중단된다. 1665년 가을부터 다음해 봄까지 계속되는 이 사건에서 양광선이 지적한 탕약망의 죄상은 세가지이다. 반역을 음모하고, 사교를 전도하고, 잘못된 천문학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통은 "견혈봉후안(見血封喉案)" 또는 "순치독살안(順治毒殺案)"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탕약망은 형부에서 극형을 선고받는다.

 

견혈봉후라는 것은 열대나무로서 속칭 독수(毒樹), 살인수(殺人樹)라고 부르는 것인데, 그 가지에 있는 가시가 사람의 피부를 찌르면, 독소가 혈액에 들어가서, 혈관을 타고 심장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독은 신경을 마비시키고, 전신의 근육(특히 심장)이 위축되며, 최종적으로 심장이 피를 공급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여 목구멍이 막혀 죽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탕약망이 순치제에게 해준 것은 소독한 대나무침으로 순치제의 고름이 잡힌 천연두를 찔러준 것에 불과하였다. 견혈봉후는 열대식물로 북방에서는 절대 자랄 수도 없는 것이었고, 궁내에서도 이 나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날조된 죄를 탕약망은 뒤집어 쓴 것이었다.

 

탕약망은 쇠사슬을 몸에 감고 검은 뇌옥에 갇혀서 독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관되게 자신의 죄를 부인했고, 신역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665년, 강희제는 일단 탕약망에 대한 형의 집행을 정지시킨다. 13일에, 혜성이 북경상공을 지나고, 16일에는 북경에 지진이 발생한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사대보정대신은 탕약망을 '교살형"으로 감해주고, 그의 교우들을 풀어준다. 그러나 29일 궁중에 원인모를 불이 일어나고, 강희제와 효장태후의 적극 지원으로 탕약망은 결국 풀려난다. 다만 원래의 직위로 복직되지는 못한다.

 

1666년 8월 15일 몸이 쇠약해진 탕약망은 결국 북경에서 사망하는데, 그의 나이 74세였다. 그가 죽은 후 강희제는 3년후에 아오바이를 몰아내고 신역법을 시행하며, 탕약망과 중국학자들이 협력하여 번역한 150권의 과학서적도 정식으로 출판된다. 그해 8월 15일 탕약망의 억울한 누명은 모두 벗겨준다.

 

탕약망이 쫓겨난 후 흠천감의 감정은 양광선이 맡는다. 그는 대통력과 회회력을 되살리는데, 착오가 계속 발견된다. 강희제가 나이가 들면서, 흠천감에 대하여 조사를 한 후 1669년 탕약망의 조수였던 남회인(南懷仁)과 양광선에게 실제 측정을 통하여 우열을 가리게 된다. 몇번에 걸친 시험끝에 양광선은 일패도지하여 직위를 박탈당하고 안휘의 고향에서 병으로 죽는다.

 

1996년 8월, 탕약망의 고향인 쾰른에서는 독일-중국우호협회가 그의 서거33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건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