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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순치제)

순치제(順治帝)의 8명 아들 중에서 총애받지 못한 서자 현엽(玄燁, 강희제)이 황위를 계승하게 된 경위는...?

by 중은우시 2022. 7. 18.

글: 소열충신(昭烈忠臣)

 

순치제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중 황위를 승계한 아들은 셋째아들 현엽이다. 즉 나중에 그 이름도 유명한 강희제이다. 왜 순치제는 셋째아들인 서자 현엽으로 하여금 황위를 계승하게 했을까?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왜 아무도 현엽과 후계자의 자리를 다투지 않았던 것일까?

 

예법상으로 보면, 순치제의 아들은 모두 계승권을 지니고 있었다.

 

순치제는 일생동안 4명의 황후가 있었지만, 적자(嫡子)는 낳지 못한다. 이 4명의 황후 중에서 2명은 추봉된 것이다. 즉, 강희제의 생모인 퉁자씨(佟佳氏), 그리고 또 한명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는 순치제일생의 유일한 사랑인 동악비(董鄂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사후에 추증되었다.

 

순치제의 최초의 황후는 순치제와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아, 순치10년 폐위당한다. 자식은 없었다. 두번째 황후는 자리를 공고히 지키고 오래 살았지만, 아쉽게도 자식을 낳지 못한다. 자녀를 전혀 두지 못했다.

 

그래서 순치제는 생전에 적자가 없었고, 그의 8명의 아들은 모두 서자였다. "유적입적(有嫡立嫡), 무적입장(無嫡立長)"의 황위계승원칙에 따르면, 마땅히 황위를 계승해야할 사람은 황장자(皇長子) 뉴뉴(牛鈕)이다. 아쉽게도 황장자는 요절했다. 태어나서 겨우 83일을 살다가.

 

서장자가 요절하고나니 나머지 서자들은 기본적으로 평등하게 되었다. 지위에 차별이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생모의 지위고하에 따른 구별이고 그 차이가 크지 않았다.

 

순치때 청군은 막 산해관을 넘어 북경에 들어와, 아직 한화(漢化)가 심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중원왕조의 황위계승제도는 그다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황제가 누구를 좋아하면, 그가 황위를 계승하는 단계라 할 수 있었다. 제도가 비교적 조악했다. 그래서 순치제의 여러 아들들은 모두 같은 출발점에 서 있다고 해도 좋았다. 모두에게 기회는 있었다.

 

현엽은 총애도 받지 못했는데, 왜 결국 그에게 황위가 넘어왔을까?

 

기실 순치제가 가장 좋아했던 아들은 요절한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아들들은 지위에 큰 차이가 없었다.

 

모두 알다시피 순치제가 가장 좋아한 여인은 동악비이고, 거의 그녀에게 미쳐있을 정도였다. 순치제본인도 중국역사상 가장 치정(痴情)적인 황제라고 칭해진다. 애옥급오(愛屋及烏)라고 순치제는 동악비가 낳은 황사자(皇四子)를 특히 좋아했다. 예법상으로도 다른 모든 아들을 넘어섰다.

 

황사자가 출생한 후, 순치제는 바로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조서에는 자신이 재위한지 이미 14년이 되었고, 지금 마침내 조상들의 복을 받아 첫아들을 낳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를 보면, 순치제는 다른 아들들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은 것같다. 그의 눈에 동악비가 낳은 이 아들이야말로 그의 첫아들이라고 여긴 것이다. 만일 의외의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황사자는 당연히 황태자가 되어 황위를 승계할 터였다.

 

다만 아쉽게도, 황사자는 출생후 3개월만에 요절한다. 심지어 이름조차 짓지 못했다. 순치제는 아주 비통해하며 조상대대로 내려온 법도를 초과하여, 그를 화석영친왕(和碩榮親王)에 봉하고 후하게 장례를 리른다. 묘비에는 이렇게 적었다: "화석영친왕, 짐의 첫째아들이다....."

 

황사자가 죽은지 3년이 되기도 전에 동악비도 세상을 떠난다. 순치제는 사랑을 잃고 비통해 마지 않는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3살이고 한창 나이였으므로, 황자들은 대부분 나이가 어렸다. 그래서 순치제는 황태자를 세우는 일은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어쨌든 그의 눈에 모든 아들들은 요절한 황사자만 못했던 것이다. 강희제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부모슬하에서 하루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父母膝下, 未得一日承歡)"

 

그러나, 순치제는 천화(天花, 천연두)에 걸리고, 동악비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 지나쳐 동악비가 죽은 후 반년도 되지 않아 죽고만다. 죽기 전에 유조(遺詔)를 남긴다: "8살의 황삼자 애신각라 현엽을 황태자로 하여, 황제위를 계승하게 한다. 소니(索尼), 쑤커사하(蘇克薩哈), 어비룽(遏必隆), 아오바이(鰲拜)를 보정대신으로 삼는다"

 

나머지 아들들은 순치제의 눈에 다 고만고만했는데, 왜 마지막에 현엽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여기에 원인은 아주 많다. 열거하자면 4가지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현엽은 나이가 비교적 많았다.

 

순치제가 죽었을 때, 황장자는 요절했고, 황차자(皇次子) 복전(福全)은 9살, 황삼자 현엽은 8살, 황오자 상녕(常寧)은 5살, 황육자, 황칠자, 황팔자는 모두 1살이 되지 않았다. 당치 청군은 이미 산해관을 넘어들어와 북경에 자리잡은지 십여년이 되었다. 이때 남명은 아직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고, 반청복명의 전투도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순치제는 후계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당연히 나이가 약간 많은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그렇다면 9살의 복전, 8살의 현엽뿐이다. 5살의 상녕도 포함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2. 현엽은 천화를 앓았다.

 

고대에 천화는 아주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막 산해관을 들어온 만청귀족에 있어서, 천화에 전혀 저항력이 없었다. 걸리기만 하면 살아남을 확률이 아주 낮았다. 순치 본인도 천화로 죽는다. 다만 천화라는 병은 한번 걸린 후 치유되고나면 평생 다시는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순치제는 분명 천화를 앓은 황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래야 안전하다. 그렇지 않으면 막 황제에 오른 후 천화로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천하가 혼란에 빠지지 않겠는가? 그리고 일단 두 황제가 연이어 천화로 죽는다면, 아마도 백성들은 하늘이 만청에게 중원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이는 청나라조정에 아주 불리하다. 그러나, 순치제가 살아남은 6명의 아들들을 살펴보았지만, 천화를 앓고서도 죽지 않은 황자는 오직 황삼자 현엽뿐이었다.

 

3. 효장태후가 현엽을 좋아했다.

 

효장태후는 순치제의 생모이다. 순치제의 두번째 황후는 바로 그녀의 질손녀이다. 조정에서의 지위는 두 말할 필요없이 높았다. 그러나 효장태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현엽을 아주 좋아했다. 그리하여 자주 그를 불러다 가르치고 배양했다. 강희제가 천화를 피해 외부에 나가 있는 동안에 효장태후는 쑤마라구(蘇麻喇姑)를 보내어 현엽의 공부를 돕게 했다.

 

현엽은 황자들에게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짐은 어려서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조모의 가르침을 받았다. 먹는 것, 걷는 것, 말하는 것에 모두 법도를 지켜야 했다. 평소에 혼자 있을 때도 함부로 하지 않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질책을 받았다. 이러한 자제를 통해 이루어낼 수 있었다." 이를 보면 조손간의 감정이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장태후가 지지한다는 것은 당연히 현엽이 황제의 후계자가 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4. 현엽은 재능이 뛰어났다.

 

사적에 아주 재미있는 기록이 하나 남겨져 있다. 순치제가 한번은 복전과 현엽에게 이렇게 묻는다. 장래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복전은 이렇게 말한다: "현왕(賢王)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엽은 이렇게 대답한다: "부황을 본받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차이는 너무 크다. 복전의 지향은 그저 왕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엽은 순치제와 같은 좋은 황제가 되고 싶다고 한 것이다. 당연히 순치제가 기뻐할 일이다. 그래서 순치제는 현엽에 대한 인상이 복전에 대한 인상보다 좋았다. 사실상 사서기록에 따르면, 현엽은 어렸을 때 확실히 총명했다.

 

말이 나온 김에 인터넷에 떠도는 다른 헛소리들을 반박하고자 한다.

 

어떤 사람은 강희제의 모친 퉁자씨의 지위가 높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퉁자씨는 입궁때 단지 소복진(小福晋)으로 순치제의 후궁내에서 지위가 가장 낮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현엽을 낳기는 했지만, 단지 복진, 비의 등급이었고, 고귀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기껏해야 황차자 복전의 생모와 지위가 엇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또 어떤 사람은 퉁자씨가족의 세력이 컸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그때는 강희제때이고, 순치제이전에는 공신가족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몰라도 가족의 지위가 그다지 두드러지지는 못했다. 그저 보통이었다.

 

또 어떤 사람은 효장태후가 동악비가 순치제를 죽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고, 황차자 복전의 생모도 녕각비(寧慤妃) 동악씨(董鄂氏)여서 효장태후의 미움이 복전에게까지 미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순치는 원래 복전을 황태자로 세우고자 했었는데, 나중에 효장태후에 의해 현엽으로 바꿔치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성이 같을 뿐 전혀 혈연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황위계승자라는 중대한 문제에서 설마 같은 성이라는 이유로 순치제의 유조를 바꿔서 다른 사람으로 승계하게 한단 말인가? 아무리 이야기를 만들어내더라도 그렇게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이건 순치제는 현엽을 황위계승자로 삼았다. 현엽은 황위에 오른 후 강희라는 연호를 사용한다. 강희제는 청나라 내지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중 한명이다. 만일 순치제가 다른 황자를 황제로 삼았더라면, 아마 절대 강희제만큼 잘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순치제에게 모두 8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적자는 없었고, 모두 서자였다. 그중 2명은 요절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황사자를 포함해서. 나머지 6명의 황자들은 기실 순치제가 보기에 고만고만했다. 현엽은 총애를 받지는 못했지만, 다른 황자들은 더욱 총애를 받지 못했다. 결국 천화를 견뎌냈고, 나이도 약간 많고, 효장태후가 지지해주고, 재능도 갖추었기 때문에, 순치제는 종합적으로 고려한 후 현엽을 황태자에 앉힌 것일 것이다. 이것은 심사숙고한 결과이지 일시적인 기분으로 마음대로 결정한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