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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순치제)

순치제(順治帝)의 등극과 양황기(兩黃旗) 대신의 역할

by 중은우시 2010. 1. 3.

글: 양진(楊珍)

 

숭덕8년(1643년) 팔월 초아흐레. 청태종 홍타이시(皇太極)가 돌연 병사한다. 청태종의 병사후, 동생인 예친왕 도르곤(多爾袞)과 황장자 숙친왕 하오거(豪格)는 후임 황제위를 놓고 격렬하게 충돌했고, 서로 대치하며 양보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나라의 대통계승에 위기가 발생한다. 효장(孝庄)을 핵심으로 한 숭덕제 청태종의 후궁은 황권의 대표자로서 양황기의 중신들인 투라이(圖賴), 소니(索尼), 아오바이(鰲拜)등과 연합하여 도르곤, 하오거에게 양보를 받아낸다. 팔월 십사일, 여러 왕공, 대신들은 숭정전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나이 겨우 8세의 황구자(皇九子) 푸린(福臨)을 황제위에 앉힌다. 그리고 45세의 정친왕 지얼하랑, 32세의 도르곤이 공동으로 국정을 보좌한다.

 

대통계승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연약한 여인에 불과한 효장이 어떻게 아들이 황제에 오르도록 할 수 있었을까? 이 역사에서 효장과 도르곤의 '감정'이외에 양황기 대신들이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태종이 사망한 후, 양황기의 주요대신인 투르거(圖爾格), 소니, 투라이, 시한(錫翰), 공아다이(鞏阿岱), 아오바이, 탄타이(譚泰), 타잔(塔瞻)의 여덟 명은 숙친왕의 집으로 가서 숙친왕을 황제로 올리고, 푸린을 태자로 하는 방안을 꺼내고 서로 의논했다"(청세조실록 권37). 이 내용을 보면, 양황기 내부에는 이미 청태종의 아들을 황제로 옹립하자는 역량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팔월 십사일 회의 전날, 즉, "태종이 붕어한 후 오일째, 예친왕 도르곤은 삼관묘에 가서 소니를 불러 책립문제를 논의한다. 소니는 '선제에게는 황자가 있으니, 반드시 그 중의 하나를 세워야 합니다. 다른 것은 알지 못하겠습니다."(청사고 권249등). 이를 보면 소니는 명백하게 아들 중에서 황제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도르곤은 친왕의 신분으로 몸을 낮추어 그의 의사를 물어본 것은 다른 한편으로 양황기 대신의 태도가 아주 중요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팔월 십사일 "여명, 양황기 대신은 대청문에서 모여서 맹세를 하고, 양황기의 바야라(巴牙喇)들로 하여금 활과 화살을 들고 궁전을 둘러싸게 하고, 숭정전에 들어했다."  이는 세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압하려는 행동이었다. 회의가 시작된 후, 소니와 아오바이는 "먼저 황자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고, 예친왕은 잠시 물러가라고 명령을 내렸다."(청사고 권249). 이어서 하오거, 도르곤, 도도(多鐸), 다이샨(代善)을 황제로 세우는 방안을 내놓고 토의했으나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 교착상태에 빠진 관건적인 순간에, 양황기 대신은 "검을 차고 앞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우리는 황제의 밥을 먹었고, 황제의 옷을 입었다. 양육의 은혜는 하늘만큼 크다. 만일 황제의 아들을 세우지 않으면, 죽어서 황제를 지하에서 따를 뿐이다" 이전에, 하오거는 이미 '나는 복이 적고 덕이 박해서, 감당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사양한 바 있다. 이때 다이샨은 '나이들고 병이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회의장에서 떠난다'. 아지거(阿濟格)도 '따라서 떠나갔다.' 도도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도르곤은 자신이 황제에 오르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하고, 양황기대신의 압력을 받아, '황제의 셋째아들(셋째아들은 아홉째아들의 오기임)을 세우자. 그러나 나이가 어리니 팔기의 군병은 나와 진왕(지얼하랑)이 반씩 나누고, 좌우에서 보정하다가, 나이가 들면, 친정을 하게 하자"(조선. 심양장계. 인조21년 팔월이십육일). 이 제안은 참석자들의 동의를 얻어낸다. 이리하여 청태종사후에 황권승계가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여기서 보아야 할 점은 이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푸린을 황위후계자로 논의하여 정할 때, 여섯 명의 실력이 가장 강하고, 가장 발언권이 있는 친왕, 군왕 중에서 3사람(하오거, 다이샨, 아지거)이 중도에 회의장을 퇴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홍타이시가 칸의 지위를 승계할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이는 황위계승을 둘러싼 투쟁의 강도나 복잡성이 이전보다 훨씬 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회의가 끝난 후, 소니와 탄타이등 6명의 양황기 대신은 '삼관묘에서 여섯명이 한몸이 되어 유주(幼主)를 보필하겠다고 맹세한다"(청사고 권249). 얼마 지나지 않아, 슈오토(碩托), 아다리(阿達禮)등이 도르곤을 옹립하려는 음모가 드러난다. 숭덕8년 팔월 정축 즉 팔월 이십이일, 양황기 대신, 시위등 모두 210명은 '하늘과 땅에 맹서한다" 유주에 충성을 다하기를 선제가 살아있을 때와 같이 하고, 절대 여러 친왕이 역모를 꾸미지 못하게 하겠다고.

 

팔왕공치제(八王共治制)가 규정한 칸의 선임원칙에 따르면, 새로운 황제를 정하는 일은 종실의 여러 왕들이 해야하는 권한범위내이다. 그러므로, 홍타이시를 칸으로 옹립할 때, 팔기대신은 발언권이 없었다. 팔월십사일의 회의에서 여러 왕과 종실, 특히 작위가 가장 높은 4명의 친왕, 두 명의 군왕이 원래는 주인공이다. 회의에 참가한 양황기대신은 그저 조연역할일 뿐이고, 여러 왕공의 뜻에 따라 처리하면 되고, 그들이 정하는 것을 구경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실제는 정반대로, 양황기대신은 회의전에 무력시위를 했을 뿐아니라, 회의시작시에도 먼저 발언을 하였고, 사람들의 논의에서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자, 양황기대신이 다시 일어나서 말을 한다. 황제의 아들로 후임황제를 ㅎ삼아야 한다고 이리하여 도르곤이 절충방안을 내놓게 만든다. 대통계승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양황기대신은 특수한 정치집단으로, 시종 주동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핵심순간에 결정적인 역할도 한다. 양황기대신이 이처럼 감히 여러 왕들과 공개적으로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신분과 맞지 않는다. 후금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

 

양황기는 황제가 직접 이끄는 기(旗)이다. 양황기대신의 개인적인 이익은 숭덕황권과 관계가 있다. 대통위기에서 양황기대신이 숭덕후궁과 같은 의견을 낼 수있었던 점. 하오거를 버리고 푸린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함에 있었다. 만일 하오거가 황제가 된다면, 정남기(正藍旗)의 지위가 크게 오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양황기에 불리했다. 푸린이 승계해야만 이런 결과를 막을 수 있었다.

 

아래의 상황은 또 다른 각도에서 양황기대신의 중요한 역할을 보여준다.

 

도르곤이 아지거와 도도의 권유를 거절한 후, 아지거와 도도는 바로 도르곤이 우려하는 바를 눈치챈다: "네가 즉위하지 않으려는 것은 양황기대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냐?"(청세조실록 권63)

 

대통승계위기가 해결된 후, 하오거는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고산액진 탄타이, 호군통령 투라이, 계심랑 소니가 모두 나에게 의탁하려 했다. 지금 너희들이 두 기를 이끌고 화석예친왕에 의탁했다." "화석예친왕은 복있는 사람이 아니라, 병이 있는 사람이다. 그 목숨이 얼마나 가겠는가? 제대로 천수를 누리겠는가? 만일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으면, 성이 다른 사람들이 국정을 주도할(主國政) 것인데 그래도 괜찮겠는가?" 확실히 하오거는 황제위를 승계받지 못하고 난 후에 불평불만이 많았다. 도르곤이 양황기의 지지를 받아서 섭정왕의 지위에 올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일 도르곤이 요절한다면, 양황기대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오거의 위 말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는 홍타이시의 여러차례에 걸친 숙청끝에, 팔기기주, 제왕패륵은 일반적으로 지위가 격하되고 억제받았다. 홍타이시 혼자만 다른 여러 왕들의 위에서 군림했다. 그리고 제왕패륵의 권세는 황권에 대항할 수 있는 정도가 못되었다. 다른 하나는, 숭덕황권을 발전과 발맞추어, 양황기는 황제가 친히 거느리는 기라는 신분을 가지고, 실력에 계속 성장했다. 대통계승위기에서 누구든지 양황기대신가 연합하여야 했다. 이는 실제로 황권의 힘을 빌린다는 것이고, 그래야 비로소 정치각축에서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하오거는 양황기대신의 지지를 잃었기 때문에, 각축에서 실패자가 된 것이다. 그는 실패를 곰씹어본 후에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도르곤도 주로 양황기대신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황위경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양황기대신이 대통위기해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숭덕황권이 이미 집중되어 있었고, 황권의 기초가 공고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시에 더욱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팔기제도에 따르면, 팔기대신은 각기 기주의 가복속인(家僕屬人)이다. 기주와의 관계는 예속관계이고, 상하존비가 분명하다. 이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양황기대신도 예외는 아니다. 양황기기주인 홍타이시가 죽은 후에도, 양황기대신의 가복속인의 신분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양황기대신의 권세는 황권에서 나온다. 반드시 황권에 의지해야 한다. 홍타이시가 후계를 정하지 않고 죽은 역사적 조건하에서, 황권관계가 가장 밀접하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황권을 대표할 수 있는 자는 홍타이시의 처 즉, 숭덕후궁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