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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문화

연월일(年月日)표기법: 국제표준은 중국식?

by 중은우시 2023. 3. 23.

글: 이조량(李兆良)

우리는 매일 날짜를 적는다. 

날짜를 적는 방식은 주로 3가지이다:

 

연월일: 중국과 주변의 중화문화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 예를 들어, 일본, 한국, 몽골등이 사용한다. 

일월년: 유럽국가 및 유럽의 영향을 받은 국가 .예를 들어 인도등.

월일년: 미국

 

중국에서 사용하는 '연월일'방식은 국제표준으로 인정되었는데, 그것은 가장 논리적인 표기법이기 때문이다.

연월일과 일월년을 겸용하는 국가는 유럽, 러시아, 전소련의 동아시아, 중앙아시아부분이다. 즉 유럽의 원래의 일월년과 국제표준인 년월일을 겸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찌기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대부분지역은 일월년의 표기법을 쓰고 있다.

 

유일하게 '월일년'의 방식을 쓰는 나라는 미국이다. 캐나다는 미국과 이웃하고 있으며, 비지니스교류가 많아서, 미국의 월일년 표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왜 미국이 혼자서 월일년의 표기법을 쓰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영국에서 독립할 때 아마도 다르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모국과 다른 방식을 쓴 것이 아닐까 싶다.

 

중국은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하고난 이후 모든 역사기록에서 '연월일'의 표기법을 사용했다. 중문은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수학에 응용할 때 개십백천만의 숫자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다. 주판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법의 숫자가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간다. 전국산표(戰國算表)가 바로 가장 좋은 사례이다.

 

세계의 모든 산수는 가금승제이다. 거의 하나의 예외도 없이 중국의 십진법을 사용한다. 계산기의 이진법도 가장 큰 숫자를 왼쪽에 둔다. 주판의 설계와 마찬가지이다.

 

옛유럽방식의 '일월년' 표기법은 그에 반대된다. 가장 큰 숫자를 오른쪽에 둔다. 이는 산수의 방식과 거꾸로이고, 합리적이지 못하다. 미국의 '월일년' 표기법은 가장 작은 일의 숫자를 연과 월의 중간에 두었으니 더더욱 논리적이지 못하다. 국제표준이 나오기 전에, 미국과 유럽의 숫자표에서 월과 일은 12이하일 경우 왕왕 혼동되었다. 그래서 반드시 알파벳으로 월을 표시해야 했다. 예를 들면, 3 February, 2023(유럽식) 혹은 October 1, 2020(미국식).

 

중국의 연월일의 표기법은 먼저 장기간의 역사를 통하여 자리잡았다. 먼저 연도가 있고, 그후에 월과 일이 있다. 앞에서 전체를 표시하고 뒤에서 부분을 표시한다. 앞에서 장기간을 표시하고 뒤에서 단기를 표시한다. 산수의 계산단위, 주판이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가는 것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간다. 중국의 숫자단위와 날짜표기에서 중국인이 수량을 표시하는데 논리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국제표준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유럽의 표기법은  일과 월을 중시하고, 다시 연도를 생각한다. 먼저 단기를 보고, 다시 장기를 본다.

 

중국은 일찌감치 농경사회로 접어들었고, 작물의 규칙은 연,월로 계산된다.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유럽은 초기에 수렵사회였다. 수확기가 일정하지 않다. 하루 하루를 그냥 살아가는 것이니 일이 가장 중요했다. 이는 농경문명과 수렵채집문명이 서로 다르게 발전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중국은 수천년간 운용해온 규칙은 숫자를 큰 것부터 작은 것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것이다. 역법도 마찬가지이다. 연이 월보다 크고, 월이 일보다 크다. 연월일을 큰 것부터 작은 것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썼다. 서양의 '일월년' 표기법은 유럽식이건 미국식이건 모두 숫자운용논리에 맞지 않는다. 오직 중국식의 날짜표기법만이 논리에 부합한다. 

 

도량형에서, 미국만이 영국도 이미 포기한 원래의 영국식을 고집하고 있다(마일, 피트, 인치, 파운드, 갤런등), 날짜에서도 독자적이다. 유럽은 천천히 중국식의 표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하고, 계산기가 발전하면서 중국의 기준이 전세계로 보급되었다.

 

필자는 2022년 동방외교사세미나에서 <문예부흥유럽 '과학의 서학동점설'에 대한 의문>을 발표한 바 있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서 28년간 살았다. 1616년 라틴어본 <중국여행기(De christiana expeditione apud Sinas)>를 발표한다. 전체 640페이지에서 mensis(월분)가 5번, luna(월)이 11번, annus(연)이 6번, Apilis(4월)이 1번(또 다른 2번은 후인의 기술이다) 나타난다. 1616년 프랑스어판에서는 Juillet(7월)이 2번, Aout(팔월)이 1번, Septembre(9월)이 4번, Decembre(12월)이 3번 나타난다. 1621년 이탈리아어판에서는 Agosto(8월)이 4번 나타난다. 몇개의 판본에서 나타난 차이를 해석할 방법은 없다. 다른 날짜에 대한 기재는 "어느 날" "다음 날" "며칠 후"등이다. 절대적인 날짜는 표기하지 않았다. 마테오 리치의 <중국여행기>에는 정확한 연월일의 순서가 없다. 그래서 '일기'라고 할 수가 없다. 이탈리아어판에는 <곤여만국지도>가 남경에서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판본에서는 이지조(李之藻)가 경성/궁정/북경에서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확한 일자가 없어서 확정할 수가 없다. 마테오 리치가 죽은 후, 니콜라스 트리고가 마침내 중국에 도착한다.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 니콜라스 트리고의 이해에 따라 편집되면서 순서가 혼란하게 되었고, 대조할 수가 없게 되었다. 역사의 오해는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만일 16-17세기에 유럽의 주요종교단체에서 중국에 파견한 선교사들중에서 비교적 지식수준이 높았던 마테오 리치마저도 자신의 저작에 명확한 날짜를 적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중에 온 아담 샬(湯若望)이 음력을 가져올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