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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어제

순친왕부(醇親王府): 2명의 황제, 1명의 섭정왕을 배출한 청나라 최고의 왕부

by 중은우시 2022. 11. 17.

글: 소태양(小太陽)

 

청나라의 순친왕부에서는 일찌기 2명의 황제, 1명의 섭정왕을 배출했으니, 청말 수십년의 역사에서 최고의 왕부라 할 수 있다. 그 기세와 씀씀이는 다른 왕부를 훨씬 넘어섰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순친왕부의 씀씀이를 통해서 우리는 개략 청말제일왕부가 도대체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1. 순친왕부의 출현

만청입관(滿淸入關, 청나라가 산해관을 넘어 베이징에 자리잡다)후, 더 이상 명나라의 제도와 같이 왕실을 전국각지에 분봉(分封)하지 않았지만, 황실내에 여러 왕야(王爺)를 분봉한다. 그들이 획정한 엄격한 등급제도를 보면, 여러 작위들 중에서 오직 친왕(親王)과 군왕(郡王)의 부저(府邸, 집)만을 "왕부"라 부를 수 있었다. 그보다 아래 등급인 패륵(貝勒), 패자(貝子)"의 부저는 그저 "부(府)"라고만 부를 수 있었다. 각급 부저의 규모의 크기와 화려함은 엄격한 등급제도에 따라야 했다. 왕의 작위중에서 세습할 수 있는 경우만 계속 왕부에 거처할 수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조정에 예속된 왕부는 회수되게 된다. 

 

1872년 동치연간, 도광제의 일곱째 아들이자 이때는 아직 순군왕(醇郡王)이었던 혁현(奕譞)이 순친왕(醇親王)으로 승격되면서 부저도 '순군왕부'에서 '순친왕부'로 승격된다. 이번 승격은 서태후가 당시 권세가 혁혁했던 공친왕(恭親王) 혁흔(奕訢)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혁현의 능력은 그의 형인 혁흔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그에게도 장점이 있다. 혁현은 말을 잘 들었다. 즉 서태후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으며, 또한 혁현의 처는 바로 서태후의 친여동생이었다. 그래서 혁현은 조정에서 가장 권세있는 사람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치제가 사망하고, 자식이 없었다. 혁현의 아들이 새로 황제에 오르니 그가 바로 광서제(光緖帝)이다. 순친왕은 다시 세습망체(世襲罔替)의 작위가 되어 철모자왕으로 지위가 최고봉에 이른다. 그후 수십년간, 혁현이 사망하고, 그의 손자 부의(溥儀)가 광서제의 사망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에 오른다. 그리고 그의 아들 재풍(載灃)은 부의의 부친으로서 청나라의 섭정왕(攝政王)이 된다. 하나의 왕부에서 2명의 황제와 1명의 섭정왕을 배출했으니, 아마도 공전절후의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재풍과 부의등 자녀들

2. 순친왕부의 일상지출

 

순친왕부는 이렇게 고귀한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방대한 운영체계가 갖추어져 있었다. 기실 순친왕부는 엄격하게 말하면 2채이다. 한 채는 1872년 혁현이 순친왕으로 승격된 후의 원 순군왕부이다. 이곳은 광서제가 황제에 올랐으므로 이 저택은 "잠룡저(潛龍邸)"가 되어 비록 여전히 왕부이지만 아무도 거주할 수 없었다. 새로운 순친왕부는 십찰해(什刹海) 후안(後岸)에 새로 지은 저택이다. 일반적으로 "북부(北府)"라고 불렀다. 이곳은 일찌기 강희제때의 대학사 명주(明珠)의 저택이었다.

북경 습찰해

순친왕부는 면적이 아주 컸다. 개략 3부분으로 나뉜다. 자금성의 건제와 아주 비슷했다. 안에는 궁전, 화원과 각종 주택이 있으며, 또한 전문적인 마방(馬房)이 있어, 소황궁같았다. 순친왕부에는 일하는 사람만 백명이 넘었고, 내외원(內外院)으로 나누었다. 내원은 왕실의 일상생활을 처리했다. 주로 일부 태감과 마마, 아환(丫鬟, 여종)이 일을 했다; 외원은 더욱 복잡했다. 전체 왕부의 음식기거외의 모든 운영을 맡았다. 그중의 "장사(長史)"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대관가(大管家, 대집사)"였다. 그러나 기실 장사는 정식관직으로 직접 왕부로 와서 근무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진정으로 모든 업무를 처리하는 "대관가"는 "관사관(管事官)"이었다. 왕부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그가 책임지고 처리했다.

 

왕부의 사무는 아주 복잡했다. 기장제도(記賬制度)가 없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하여 왕부내에는 전문적인 기장핵산제도(記賬核算制度)가 갖추어져 있었고, 전문적으로 기장을 책임지는 인원을 고용했다. 장부는 고정된 양식이 있고, 매일의 수입지출을 모두 기록했다. 누가 얼마의 돈을 썼는지, 어떤 곳에 썼는지 모조리 기록으로 남겼고, 마지막으로 지출총액을 계산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장부계산이다. 그외에, 왕부에는 방대한 인원의 급여지급 및 왕부내에서 기르는 동물의 사료비도 지출되어야 했다. 또한 일꾼의 음식기거비용에 매월의 보수, 상여금도 있었다. 통계에 따르면, 복인(僕人, 종)과 고공(雇工, 고용된 일꾼)의 매월지급금액은 2,100적동전(吊銅錢)인데, 1적동전은 1냥은자(兩銀子)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매달 급여만으로 2,100냥은자가 소요된다는 것이다. 동물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900냥가량이니 합치면 3,000냥에 이른다. 당시 조정의 1품고위관료의 연봉이 180냥은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3천냥의 급여와 동물사육비용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물자구매비용이라든지 다른 소소한 비용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 보면 순친왕부가 매달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왕부의 각종 비용지출

 

위에서 언급한 비용지출과 비교하여, 순친왕부의 진정한 비용지출은 일상물자의 제작과 구매에 있다. 예를 들어 의복, 음식, 각종 귀한 물건 및 왕부의 장식과 수선등등. 모두 큰 돈이 들어간다. 연구에 따르면, 왕부의 한 측푸진(側福晋, 푸진은 부인, 측푸진은 첩을 의미함)의 1년 의복에만 180냥가량을 썼다. 이것만 해도 이미 1품고관의 1년연봉에 해당한다. 건물을 수선하는데 매년 근 천냥의 돈이 들었다. 물자를 구매하는 것은 너무 자잘해서 구체적인 숫자를 통계내지도 못했다. 다만 이렇게 거대한 왕부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생활하니 물자구매비용도 분명 적은 숫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연히 왕부의 지출은 이런 일상적인 지출 이외에 명절의 선물등의 지출도 있고, 제사지출도 있다. 이런 것들은 매년 고정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큰 돈이 들어가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순친왕부의 매년 비용지출은 수만냥 혹은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3. 방대한 지출의 배후

 

지출이 이 정도로 큰데, 그럼 수입은 어떠했을까?

 

수입으로 보면, 순친왕부는 매년 2만냥백은의 봉록과 1만석의 양식수입이 있다. 또한 왕부는 대량의 토지와 장원을 가지고 있어서 매년 근 만냥에 이르는 조금(租金)을 거둘 수 있었다. 여기에 황실에서 하사하는 것과 각지방에서 '바치는' 것 그리고 회색수입이 있었다. 매년의 수입도 역시 상당히 방대한 숫자였을 것이다.

 

순친왕부의 대우는 신해혁명이후에도 그다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민국정부가 반포한 <청실우대조건>에서 순친왕부에 아주 좋은 대우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재풍은 원래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외부는 이미 '공화'이지만, 왕부내는 여전히 가무승평(歌舞昇平)의 '대청세계(大淸世界)'였다. 1924년 풍옥상(馮玉祥)이 부의를 자금성에서 쫓아내고 황실에 대한 우대정책을 대거 삭감하고나서도 왕부는 원래의 고지출을 극력 유지했다. 설사 문화재와 가산을 매각하면서까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기 그지없는 왕부의 방대한 지출의 배후에는 일종의 '기형'적인 황권문화(皇權文化)가 있다. 황제시대에 모든 것은 황제의 것이다. 황권을 가지거나 황권에 가까우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이건 기형적이고 미친 제도이다. 설사 혁명이 일어났고, 민국이 성립되었지만, 순친왕부는 예전의 생활방식을 고집했다. 그들은 왜 이런 대우를 누리면서 살 수 있었을까?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기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그들이 쓴 것은 그저 무수한 민중의 피땀이 서린 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