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회역사(情懷歷史)
어렸을 때 친구들간의 우의는 어떤 때는 친형제자매간의 감정에 못지 않다. 고대에, 죽마고우는 일반적으로 부친들도 서로 알고 지내고, 어려서부터 함께 놀면서 자랐으며, 어른이 되어서도 친구가 되었다. 그중 필자가 오늘 얘기하려는 사람은 조조이다. 그에게는 4명의 죽마고우가 있었는데, 모두 동한말기의 역사인물들이고, 출신, 능력이 비범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 이들 4명의 운명은 각각 어떠했을까?
1. 채모(蔡瑁)
채모는 형주(荊州) 남군(南郡) 양양(襄陽)의 호족인 채씨집안 출신이다. 고모(姑母)가 동한의 태위(太尉)인 장온(張溫)의 처였다. 큰누나와 둘째누나는 각각 황승언(黃承彦, 제갈량의 장인)과 유표(劉表, 형주목)에게 시집을 간다.
<양양기구기(襄陽耆舊記)>: "어려서 위무(魏武, 조조를 가리킴)와 친했다"(少爲魏武所親)
채모는 어렸을 때 조조와 친하게 지냈다. 초평원년(190년), 유표는 조정에 의해 형주자사(荊州刺史)에 임명된다. 당시 강남에 도적이 흥성하여, 유표는 강남을 평정하기 위하여 양양의 채모, 남군의 괴월(蒯越), 괴량(蒯良)과 강남을 평정하는 계책을 논의한다. 유표는 바로 채모, 괴월, 괴량같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형주목(荊州牧)의 자리에 온전히 앉을 수 있었다.
유표를 모시는 동안, 채모는 강하(江夏), 남군, 장릉(章陵)등 여러 군의 태수(太守)를 지낸다. 208년, 유표가 병사한 후, 채모는 유종(劉琮)의 승계를 옹호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가 형주를 공격하고, 채모와 괴월은 유종이 조조에 투항하도록 한다. 그후 조조의 휘하에서 일하면서, 중랑, 사마, 장수교위등의 관직을 맡았고, 작위는 한양정후(漢陽亭侯)에 이른다. 조조와의 우의에 형주를 바친 공로로 정사에서 채모는 선종한다.
2. 원소(袁紹)
<세설신어(世說新語)>: 위무가 어렸을 때, 자주 원소와 협객을 따라하곤 했다.(魏武少時, 嘗爲袁紹好爲遊俠)
이들은 어른이 된 후에도 함께 일한 경력이 있다. 중평5년(188년), 동한조정에서 서원신군(西園新軍)을 조직하며, 팔교위(八校尉)를 두는데, 원소는 중군교위(中軍校尉)가 되고, 조조는 전군교위(典軍校尉)가 된다. 나중에, 동탁이 조정대권을 찬탈한 후, 원소, 조조등은 연합군을 결성한다. 당연히 두 사람은 나중에 친구에서 적으로 바뀐다.
건안5년(200년), 조조와 원소간에 관도지전(官渡之戰)이 발발한다. 어렸을 때 친구간의 싸움에서 원소는 조조에게 격패당한다. 건안7년(202년), 원소는 기주(冀州)의 반란을 평정한 후 병사한다.
3. 장막(張邈)
<삼국지. 권7, 위서7, 여포장막장홍전제7>: 장막은 자가 맹탁(孟卓)이고, 동평(東平) 수장(壽張) 사람이다. 어려서 협행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가난한 사람을 돕고, 급한 사람을 구해주면서 집안의 재산이 바닥나는데도 아까워하지 않아서, 많은 선비들이 그를 따랐다. 태조, 원소는 모두 장막의 친구이다(太祖, 袁紹皆與邈友)
장막은 연주(兖州)의 사족(士族)이다. 동한말기, 장막은 조정에 소집되어 기도위(騎都尉)가 된다. 나중에는 진류태수(陳留太守)를 맡는다. 190년, 장막은 원소, 조조등과 함께 동탁을 토벌하는데 참가한다. 변수지전(汴水之戰)이후 장막은 조조에 귀부한다.
이전에 원소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또한 일찌기 여포와 교류가 있었으므로, 원소는 여러번 조조에게 장막을 죽이라고 권했지만, 조조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장막과 더욱 가깝게 지낸다. 그러나, 장막은 결국 조조를 배신하고, 그와 싸움을 벌이게 된다.
흥평원년(194년) 조조가 병력을 이끌고 도겸(陶謙)을 토벌할 때, 장막은 진궁(陳宮)과 조조를 배신하고, 여포(呂布)를 연주목(兖州牧)으로 맞이한다. 이런 배경하에서 조조와 여포, 장막, 진궁등은 격렬한 싸움을 벌이게 된다. 195년, 여포가 조조에게 격패당하고, 장막은 여포를 따라 유비에게 귀순한다. 그의 가족은 모조리 조조에게 옹구(雍丘)에서 몰살당한다. 장막은 원술(袁術)에게 병력을 빌리러 가는 길에 부하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4. 허유(許攸)
<위략(魏略)>: 허유는 자가 자원(子遠)이며, 어려서 원소와 태조와 잘 지냈다(攸字子遠, 少與袁紹及太祖善)
동한말기, 허유는 일찌기 조조, 원소와 친분이 있었다. 189년, 원소가 기주로 오고, 허유는 그를 따른다. 그 이후 허유는 원소의 모사(謀士)가 된다. 200년, 조조와 원소의 사이에 관도지전이 발발한다. 이에 대하여 허유는 허도(許都)를 기습할 것을 건의하나, 원소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해, 허유의 집안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고, 업성(鄴城)에 유수(留守)하던 심배(審配)가 그들을 체포한다. 허유는 그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조조에게로 간다. 허유가 자신에게 온다는 말을 듣고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원소를 격패시킬 기회가 마침내 왔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허유는 오소(烏巢)를 기습하는 계책을 내놓는다. 이는 관도지전의 역사흐름을 바꾼 계기가 된다. 오소를 잃은 후, 조조군의 영채를 공격하던 장합(張郃), 고람(高覽)이 조조에 투항하고, 원소군은 궤멸하게 된다. 원소는 겨우 8백의 기병을 이끌고 하북으로 달아난다. 조조가 대승을 거둔 것이다.
건안9년(204년), 조조는 업성을 함락시키고, 기주를 점령한다. 이때도 허유가 공을 세운다. 다만, 허유는 스스로 공이 높다는 것을 내세워 여러번 조조를 무시한다. 그는 장소와 상황을 구분하지 않고 직접 조조의 아명을 불렀다: "아만(阿瞞), 내가 없었더라면, 네가 기주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조조는 마음 속으로 점점 불만이 쌓여간다. 한번은 허유가 업성의 동문을 나서면서 주변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자는 내가 없었더라면 이 문을 들어올 수 없었다" 누군가 조조에게 이를 고발했고, 허유는 수감되며 결국 피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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