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역사의 교훈: 나치독일과 일본제국의 '플라스틱동맹'

중은우시 2022. 9. 15. 12:15

글: 자유적해보(自由的海報)

 

역사는 현대에 교훈을 준다. 다만 그런 교훈은 천박한 의미가 아니다. 책만 뒤져보면 과거의 기록 속에서 현재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문제점에서 현재의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몸젠

 

1940년 6월, 독일은 서유럽 전체를 점령하고, 눈길을 잉글랜드섬으로 돌린다. 1940년8월, 브리튼섬의 상공에서 독일공군은 참혹한 손실을 입고, 독일-영국간의 전쟁은 대치상태로 접어든다.

 

독일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전략을 구사한다. 특사 슈타머를 일본에 보내어 일본과 동맹건을 논의하고, 9월 27일,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베를린에서 <삼국동맹조약>을 체결한다. 제3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삼국은 체약국 일방이 현재 유럽전쟁 혹은 중일'충돌'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한 나라의 공격을 받을 때, 모든 정치, 경제와 군사수단을 동원하여 원조한다."

일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독일은 일본에 이렇게 약속한다: 일단 일본-영국간에 전쟁이 발생하면, 독일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일본을 원조하겠다; 독일은 태평양지구의 이전식민지를 일본이 관할하는데 동의한다; 그리고 일본이 '대동아'에서 새로운 질서의 주도권을 건립하는 것을 승인하고 존중한다.

 

다만, 동시에 독일은 여지도 남겼다. 조약 제3조에 이렇게 제한규정을 둔다: "조약에서 가리키는 공격이 발생했는지 여부에 관하여는 반드시 세 체약국이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동맹군사행동을 촉발시키기 위하여 문턱을 하나 더 만들어 둔 것이다.

 

독일의 생각은 아주 단순했다. "'한 나라의 공격'의 가상적은 오직 미국이다. 미국은 상대하기 어렵고, 독일은 일본때문에 미국과 개전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일본의 역할을 영국에 대한 보조공격으로 삼고, 전략적으로 미국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공개적으로 조약을 체결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추축국의 기세를 드높이고, 미국을 위협하여 고립주의를 유지하게 만들어, 영국을 상대하는데 전심전력을 기울이려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독일특사는 일본측에 특별히 당부한다: "일본이 독일-영국전쟁에 군사원조해줄 것을 요청하지 않겠다. 단지 일본은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미국을 견제하여 참전하지 못하게 막으면 된다." 

 

그러나, 사실은 증명한다. 미국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겁을 먹지도 않았고, 오히려 영국에 대한 지원강도를 강화한다. 9월 3일, 미국정부는 선언한다. 영국에 50척의 구축함을 보내주고, 영국의 서반구의 해공군기지를 받기로 하면서, 공개적으로 영국편에 섰다. 12월 29일,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변담화때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반드시 민주제도의 위대한 무기공장이 될 것이고, 미국은 이미 영국에 거대한 물자원조를 제공했고, 장래 더 많은 원조를 제공할 것이다."

 

그뿐아니라, 미국은 대일본 폐철수출을 금지한다. 11월에는 다시 충칭의 국민정부에 1억달러의 차관을 제공한다. 그 뜻은 분명했다: "그런 장난으로 나를 겁주려 하다니, 너무 애들 장난같지 않은가?" 미국이 강경하게 나오자 일본이 물러선다. 1940년 11월, 일본은 친미경향의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를 주미대사로 파견하여 미일관계를 완화시키고자 한다. 히틀러는 그 소식을 듣고 대노한다. 일본이 너무 무르고, <조약>의 정치목표를 심각하게 벗어났다고 질책한다.

 

한 가지 방법이 통하지 않자, 히틀러는 다시 다른 방법을 강구한다. 아예 일본으로 하여금 영국의 극동식민지를 공격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미국의 유럽에 대한 주의력을 분산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하여 미일간에 전쟁이 개시되면, 히틀러는 영국을 집어삼킬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1941년 히틀러는 정식으로 "일본과의 협력에 관한 제24호지령"을 내려보낸다. 이 지령에서는 이렇게 강조한다:

 

"삼국동맹조약을 기초로 하는 협력은 반드시 하루빨리 일본으로 하여금 극동에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영국군대는 이로 인하여 속박받을 것이고, 미국의 이익중심도 태평양지역으로 옮겨갈 것이다...싱가포르라는 극동진지를 탈취하는 것은 삼개국이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싱가포르는 영국의 극동에서의 핵심이었다. 태평양의 물자는 반드시 싱가포르를 거쳐 영국으로 운송되었다.

1941년 2월, 독일 외무장관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는 일본대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일본은 하루빨리 싱가포르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일으켜야 한다." 3월, 일본 외상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가 베를린을 방문한다. 히틀러는 마쓰오카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록 리스크는 있지만, 이것(싱가포르공격)은 일본에게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그리고 독일측에 이를 약속해달라고 독촉한다.

 

독일인들의 계속되는 독촉에 마쓰오카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도 싱가포르를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신은 결정권이 없으니, 귀국하여 천황에게 보고하겠다. 히틀러는 마쓰오카의 우려사항을 알아채고 그에게 약속해준다: "만일 일본과 미국간에 충돌이 발생하면, 독일은 즉시 행동을 취하겠다."

 

마쓰오카는 한편으로 히틀러에게 일본이 반드시 싱가포르를 공격할 것이라고 안심시키켠서, 다른 한편으로 독일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후 바로 영국주소대사 크리스퍼스경과 회담한다. 마쓰오카는 크리스퍼스경을 만나서 그에게 보증한다: "일본은 남방(싱가포르등지)에서 여하한 군사행동도 취하지 않겠다."

 

이 기간동안 일본의 고위층에서는 의견일치를 이룬다. "남방작전은 바로 대미작전이다. 일본의 국력을 감안할 때, 이건 우려스러운 일이다." 마쓰오카는 귀국후, 즉시 미국과의 담판을 개시하여, 대미관계를 완화시킨다. 5월, 미일비밀담판소식이 독일에 전해진다. 히틀러는 크게 실망했고, 계책은 다시 한번 실패한다.

 

1941년 6월, 독일이 영국을 오랫동안 공격했지만 승리를 거두지 못하자 방향을 돌려 소련을 기습한다. 이런 배경하에서, 독일의 일본에 대한 정책도 조정된다. 더 이상 일본에 남진하여 싱가포르를 공격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 북진하여 소련을 공격하도록 요구한다.

 

일찌기 1940년 7월, 히틀러는 영국이 계속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소련에 희망을 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이 소련만 무너뜨리면, 영국은 절망하여 굴복할 것이라고 보았으며, 미국도 감히 참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12월에 이르러, 히틀러는 소련으로 진격하라는 제21호지령을 내리고, 독일의 무장역량이 대영작전이 끝나기 전에 신속히 소련을 무너뜨리도록 요구하며, 작전명은 '바르바로사'였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개시되기 전날, 히틀러는 일본대사를 불러 이렇게 말한다. 독일은 소련과 전쟁을 개시할 것이다. 그리고 독일과 일본이 협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했다. 7월 1일, 리벤트로프는 마쓰오카에게 전보를 보내어 소련군의 주력중 상당히 큰 부분이 이미 훼멸되었고, 일본에게 역사적인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7월 14일, 히틀러는 다시 한번 일본대사를 불러, 소련군이 이미 붕괴되었고, 6주내에 소련은 끝날 것이라고 말한다. 독일은 일본이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여 하루빨리 대소작전에 가담하도록 요구한다.

 

히틀러의 생각은 기실 아주 단순했다. 소련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취약하지 않았다. 독소전쟁은 아마도 지구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독일은 일본이 극동에서 공격해주는 것이 필요했다. 이를 통해 독일군이 정면전장에서 받는 압력을 줄이려는 것이다.

 

히틀러의 일방적인 생각에 일본도 자신의 계산이 있었다. 일본은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소련의 극동군은 서쪽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보았다. 일본은 이제 등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 대담하게 프랑스령인도차이나남부로 진격하여, 원료공급을 확보하고자 한다.

 

다만 히틀러를 만족시켜주기 위하여, 일본군은 만주국에 16개 사단을 배치하고, '관동군특별대연습'을 거행한다. 그리고 독일에 이렇게 약속한다: "일본군이 일련의 곤란한 사항을 해결한 후, 독일과 함께 소련을 공격하겠다."

 

8월 22일, 히틀러는 '늑대소굴(狼穴, Wolfsschanze, 2차대전 히틀러의 군사지휘부를 가리킴)'에서 일본에 관한 보고를 받고 극히 흥분한다. 일본이 소련을 공격할 것으로 확신한다. 현재의 고요함은 '일본이 간섭을 받지 않고 부대를 집결시키기 위함이며, 상대(소련)이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때, 기습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그날 밤, 베를린은 일본방면에서의 극비보고서를 받는다. 보고서의 내용은 일본이 남태평양지구에서 행동을 취하여 원료안전을 확보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보고서도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히틀러는 꿈에서 깬 것처럼, 일본에 대한 독촉을 멈춘다. 어쩔 수 없게 된 독일은 선전수단으로 외교수단을 대체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전적을 과장선전하고, 소련이 이미 붕괴되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일본의 소련공격을 유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은 흔들리지 않았고, 히틀러의 계책은 다시 한번 실패한다.

 

한번 잘못 방향을 잡으니, 계속하여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독소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은 독일이 서쪽에 신경쓸 틈이 없는 것을 기화로 대서양에서 영국에 대한 지원을 대거 강화한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선언한다: "미국의 국방과 중대한 관계가 있는 수역에서 추축국의 함정을 보면 즉시 발포하라!" 동시에 소련에 대량의 전쟁물자를 운송해준다.

 

미국의 강경한 행동에 일본은 두려움을 느낀다. 일본은 한편으로 미국의 소련에 대한 물자운송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적극적으로 미국과의 담판을 준비한다. 1941년 8월, 일본수상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磨)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비밀서신을 전달하고, 독일에는 관련내용을 알려주지 않는다.

 

히틀러는 이를 통해 판단한다. 일본이 미국과 계속하여 접촉하고 있으니, 일단 미국과 독일이 전쟁을 개시하면, 일본은 아마도 배신할지 모르겠다고.

 

이어서, 독일은 일본에 대한 정책을 조정한다. 더 이상 일본에 소련으로 진격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 미국을 공격하도록 요구한다. 1941년 9월, 리벤트로프는 일본정부에 이렇게 요청한다. 일본이 미국에 성명을 내어달라고 한다. 만일 루스벨트가 계속하여 추축국에 대하여 적대행위를 하면 <삼국동맹조약>이 발효될 것이고, 일본은 즉시 미국에 선전포고할 것이라고. 

 

독일의 이러한 요구에, 일본은 움직이지 않고, 미국과의 담판을 서두른다. 그리고 독일에 미일담판의 구체적인 사항을 공개하지 않는다.

 

다만, 국면의 발전은 미일담판을 결렬되도록 만든다. 1941년 9월, 루스벨트는 추축국에 대한 강격한 연설을 한 후, <중립법>의 일부조항을 폐지하여, 실제로 이미 추축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셈이 된다. 일본의 담판요구에 대하여, 미국은 일본에게 중국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일본의 거액의 해외재산을 동결시킨다. 일본은 호의를 보였지만, 돌아온 것은 냉대였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독일의 편에 서서 미국과 생사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한다.

 

10월 4일, 일본군부는 독일에 알린다. 연내에 일본은 남부(싱가포르)에 군사행동을 일으키겠다고. 10월 13일, 히로히토천황은 대신 기도 고이치(木戶幸一)에게 말한다: 만일 미국과의 전쟁개시가 필요하면, 반드시 독일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얼마 후, 고노에 내각이 물러나고, 도조(東條) 내각이 들어서면서 독일과의 관계를 강화한다.

 

1941년 11월, 리벤트로프는 일본에 약속한다: "원수(元首)는 이미 결심했다. 만일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다면, 독일은 즉시 참전하겠다." 1941년 12월 6일, 리벤트로프는 다시 일본에 약속한다: "어떤 전술행동을 취하든간에, 독일과 일본은 운명공동체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이미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다음 날, 일본군은 진주만의 미국해군기지를 기습한다.  히틀러는 그 소식을 들은 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같았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다는 소식이 히틀러의 대본영에 전달된 후, 처음 히틀러의 반응을 본 나치고위장교는 독일교육및선전 차관 오토 디트리히, 최고사령부 총장 빌헬름 카이텔과 그의 부관 예데르였다. 이 세 사람은 회고록과 뉴른베르크재판의 진술에서 히틀러의 당시 심정을 '격동' '흥분'과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같았다'고 묘사한다)

 

진주만기습 반년후, 일본은 미드웨이해전에서 4척의 항공모함을 잃고, 미군에 대항할 힘을 잃게 된다. 1943년, 독일은 스탈린크라드전투에서 84만의 주력을 잃고, 홍군에 패퇴한다. 1944년, 미국, 영국, 캐나다의 288만군대는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나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1945년, 두 '서로 다른 속셈을 가졌던' 사악한 국가는 차례대로 패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