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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태평천국)

홍인간(洪仁玕): 태평천국의 사상가, 변론가

by 중은우시 2022. 8. 6.

글: 북강동심(北疆同心)

 

홍인간은 사상가이며, 변론가이다. 그러나 실천가는 아니었다. 그는 초기에 혁명성이 부족했으나, 후기에는 아주 굳건해져서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았으며, 혁명풍골과 사내대장부의 기개가 있었다.

 

왜 이렇게 평가하는가?

 

태평천국은 기실 하나의 군사집단이다. 완전한 정치체계는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엄격한 의미에서 독립정권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태평천국운동의 정의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태평천국이 반포한 토지개혁방안인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와 시정장침인 <자정신편(資政新編)>을 힘껏 칭송한다.

 

그중 <자정신편>은 바로 홍인간이 쓴 것이다.

 

이 책은 정치, 법률, 경제, 문화사상과 사회풍속등 여러 방면에서의 개혁을 언급하고 있어 자본주의발전을 주장하는 정치강령으로 인식되고, 당시 중국에서는 상당히 선진적인 사상이었다.

 

증국번(曾國藩)의 막료인 조열문(趙烈文)은 <자정신편>을 읽은 후 비록 그 자리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일기에는 솔직하게 적었다: "이 책을 보니 적(賊)들 중에도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구나!"

 

외국에 유학을 하고 돌아온 용굉(容閎)도 <자정신편>을 이렇게 평가했다: "간왕(干王, 홍인간)은 해외에 오래 머물러, 견식이 조금 넓다, 그래서 다른 왕들보다 외국사정을 좀 더 잘 알았고, 홍수전보다 견식이 조금 높았다. 유럽의 각 강대국들이 부강했는데, 역시 그 열쇠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

 

홍인간은 이로 인하여, "아편전쟁후 최초로 변법유신을 제안한" 사람으로 불린다.

 

<자정신편>을 제외하고, 홍인간의 저술로는 <반신정훤유(頒新政喧諭)>, <극적유혹론(克敵誘惑論)>과 <병요사칙(兵要四則)>등의 작품이 있다.

 

이 점을 보면 홍인간은 사상가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혁명가, 정치인으로서 사상만 있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실천정신을 가져야 한다.

아쉽게도, 홍인간에게 그 점은 결핍되어 있다. 

 

여기에서, 홍인간의 혁명경력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홍인간은 홍수전(洪秀全)보다 9살이 어리다. 홍수전의 족제(族弟)라고는 하지만 혈연관계는 아주 멀다. 이들 두 사람의 공동조상은 위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5대를 올라가야 한다. 즉, 이들 둘의 친척관계는 '오복(五服)'을 벗어나 있다.

 

홍인간도 글읽기를 좋아했지만,홍수전과 마찬가지로 과거에 계속 낙방한다.

홍수전이 기독교의 교의를 선전하는 <권세양언(勸世良言)>에 빠져, 배상제회(拜上帝會)를 만들때, 홍인간은 풍운산(馮雲山)과 함께 가장 먼저 배상제회의 신도가 된다. 

 

홍수전과 풍운산은 외지를 돌아다니면서 교리를 선전하고, 신도를 받아들였다. 홍인간은 고생하는 것이 싫어서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저 집안에서 고향사람들에게 "숭배독립진신황상제(崇拜獨立眞神皇上帝)" "배상제불배사신(拜上帝不拜邪神)"의 교의를 전했을 뿐이다.

 

홍수전, 풍운산은 공자의 위패를 철거하여, 고향에서 쫓겨나 멀리 광서로 간다.

홍인간은 광서는 토지가 척박하고 민풍이 표한하다는 것을 알아, '가족이 반대한다'는 이유를 들어 동행하지 않는다.

 

도광25년(1845년) 겨울, 홍수전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광주, 홍콩등지로 가서 외국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예정이라고 말한다. 홍인간은 그곳으로 가는 것은 자신의 안목을 넓힐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 기꺼이 따라간다. 광주의 미국침례교 선교사 나효전(羅孝全, Issachar Jacox Roberts, 1802 - 1871)을 찾아가 성경을 공부하고 세례를 받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효전은 홍수전이 교의를 곡해하고, 입교하는 것은 다른 말할 수 없는 목적이 있다고 여겨 세례주는 것을 거부한다.

두 형제는 분해 하면서 돌아오고, 풍운산과 함께 화현(花縣)에서 의거를 일으킬 계획을 세운다.

 

도광29년 오월(1849년 6월), 홍수전과 풍운산은 함께 광서 계평현 자형산으로 가서, 거사를 준비한다. 그동안 홍수전이 광동과 광서를 두번 오가는 동안 홍인간은 따라가지 않는다.

 

도광30년(1850년), 홍수전은 의거를 일으키기 전에 강융창(江隆昌)등을 화현으로 보내 가족, 친척 및 고향사람들을 자형산으로 데려온다. 홍인간은 공모자이지만 역시 가지 않는다.

심지어 이 해에 홍인간은 과거에 응시한다.

당연히 과거에 낙방했지만.

 

다음 해, 금전기의(金田起義)가 발발한다. 홍수전, 풍운산의 가족 약 50명은 자신들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두려워 모두 광서로 옮겨간다.

이번에는 홍인간도 그 속에 포함된다.

다만, 그들이 심주(潯州, 지금의 계평현)에 도착했을 때, 태평군은 이미 군영을 북으로 옮겨갔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불안해하며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852년초, 홍수전은 광서 영안(永安)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는다. 부하 강융창을 보내 홍수전과 풍운산의 가족을 이주시킨다.

강융창은 광동에 도착하여, 홍수전, 풍운산의 가족을 모아 곡령(谷嶺)에서 거사를 일으킨다. 참가자는 200여명이었다. 그러나, 현지의 단련(團練)에 금방 소탕당한다.

 

홍인간은 거사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고향에 남아있을 수가 없게 된다. 그는 기독교도들의 도움을 받아 홍콩으로 도망친다. 거기서 스웨덴 선교사 한산문(韓山文, Theodor Hamberg, 1819-1854)에게 간다.

홍인간이 홍콩에 도착했을 때, 태평천국의 난은 이미 대청왕조의 거의 절반을 뒤흔든다.

홍인간은 한산문에게 홍수전이 배상제회를 만들어 의거를 일으킨 경위를 설명한다. 한산문은 이를 영문으로 적어 <태평천국기의기>를 썼고, 홍인간은 <홍수전내력(洪秀全內歷)>이라는 글을 쓴다.

 

이 일을 우습게 보면 안된다. 이것때문에, 태평천국의 진귀한 초기자료가 적지 않게 보존될 수 있었다. 동시에 기독교때문에, 태평천국운동은 한때 서방의 광범위한 지지와 동정을 받을 수 있었다.

당연히, 홍인간은 적지 않은 원고료도 받는다.

그리고 한산문의 보살핌하에, 홍인간은 세례를 받아, 런던포교회의 목사가 되어, 서방선교사들에게 한문을 가르친다.

 

1854년 봄, 홍인간은 홍수전이 남경을 도성으로 정하고 남경을 천경(天京)으로 개명했다는 말을 듣고, 돌연 혁명의 열정이 불타오른다. 그는 원고료를 경비로 해서 배를 타고 상해로 가고 다시 천경으로 간다.

그러나, 소주, 상숙일대의 수륙양로는 모두 청나라 관군이 엄격히 검사하여, 통과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홍인간은 여러번 외국선교사와 소도회(小刀會)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1858년 6월, 홍인간은 다시 홍콩을 떠나 천경으로 출발한다.

이번에는 경비를 영국인 제임스 레게(James Legge, 詹馬士)에게 받았다.

홍인간은 제임스 레게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천경으로 가서, "홍수전의 교의에서 잘못된 점을 시정하도록 해서" "정통"으로 돌아오게 만들겠다고.

그의 이런 말을 다른 선교사들은 전혀 믿지 않았지만, 제임스 레게는 홍인간의 화려한 언변에 넘어가서 경비를 제공했을 뿐아니라, 그가 홍콩에 남긴 처자식까지 돌봐준다.

 

홍인간은 이번에 육로로 간다. 광동, 강서, 호북, 안휘를 걸어서 마침내 1859년 4월 22일 천경에 도착한다.

홍인간을 만나자 홍수전은 아주 기뻐하며 그를 총애하고, 그의 관직과 작위를 계속 올려준다. 20일만에 그는 3번이나 승진하여 5월 11일 마침내 "정충군사정천부조강간왕(精忠軍師頂天扶朝綱干王)"에 봉해지고 조정의 총리(總理)로 삼는다.

이를 홍인간도 전혀 사양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인다.

 

홍인간은 자신의 시집 <군차실록(軍次實錄)>에 시를 남겨, 장량, 강태공으로 자축하며, 자신이 강태공보다 어린 30여세에 재상이 되어 세상을 내려다보게 되었다고 자부했다.

그후 홍인간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든 <자정신편>을 써낸다.

그러나, 다 쓴 후에는 그저 서가에 꽂혀 있을 뿐, 시행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홍인간도 홍수전과 마찬가지로 양존처우(養尊處優)의 취생몽사(醉生夢死)의 생활을 즐기게 된다.

 

영국인 포리스트(富禮賜. Robert J. Forrest)가 홍인간을 방문하고, 나중에 짧은 글을 남긴다. 이 글은 1861년 6월 29일자 <北華捷報(North China Daily News)>에 실린다.

포리스트는 이렇게 홍인간을 묘사했다: 나는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그는 내가 만나본 중국인들 중 가장 개명한 사람이다. 그는 지리를 잘 알았고, 기계공정도 알았으며, 서양문명의 우월성도 인정했다. 그리고 각종 분야의 그림이 있는 참고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시원스럽게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그는 나태하다. 자신의 이론을 실천하기 위하여 고생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군인이 아니고, 자주 전투에 나서는 각 광들은 그가 일년내내 천경에 머물러 있는 것에 대하여 질투했다. 그는 할 수 없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 바 있으나,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양귀자(洋鬼子)'가 남경에서 과분하게 무례한 요구를 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바로 전선에서 되돌아왔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포리스트가 태평천국의 적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평가는 비교적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홍인간에 대한 평가에서도 포폄이 모두 있다.

그가 폄하한 부분은 너무나 명확하다: 나태하다. 자신의 이론을 실천하기 위하여 고생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포리스트는 간왕부를 떠나면서 다시 한번 말한다: "그의 뜻은 그의 나태함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홍인간은 사상가이지 실천가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천경이 함락된 후, 홍인간은 먼저 광덕(廣德)으로 도망치고, 다시 호주(湖州)로 간다; 그리고 다시 강서(江西)로 들어가고, 서행하여 호북(湖北)으로 간다. 마지막에 광창(廣昌), 석성(石城)의 경계지점에 있는 고령(古嶺)에서 청군과 마지막 전투를 벌였으나, 궤멸한다.

 

홍인간이 체포된 후 보여준 모습은 이수성(李秀成), 석달개(石達開)보다도 강경했다. 그의 진술서(즉 <홍인간자술>)에는 문천상(文天祥)을 본받아 순국할 결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절명시>도 지었는데, 서양인이 <북화첩보>에 실었다:

 

And now in parting gone word more,

One Pleasurable thought our pour,

Though our kingdom's passed away,

It will live again another day.

 

1920년대 간우립(簡又立) 선생은 중문으로 이렇게 번역한다:

 

임종유일어(臨終有一語)

언지심흔위(言之心欣慰)

아국수소서(我國雖消逝)

타일필부생(他日必復生)

 

홍인간의 처음 모습과 마지막 최후를 보면, 그는 초기에는 혁명성이 부족했지만, 후기에는 굳건해지고, 죽을 때까지 후회하지 않았다. 혁명의 풍골과 남아의 기개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충할 점은 어디에서 그의 변론가로서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이다.

 

그가 한산문, 제임스 레게, 포리스트, 나효전등 서양인들을 설득하고 속여넘긴 사적을 봐서?

아니다. 이런 것들은 그저 소아과 수준이다.

그가 체포된 후의 진술서만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교설여황(巧舌如篁), 웅변도도(雄辯滔滔)한 대변론가인지 알 수 있다.

 

만일 홍인간이 단순이 청나라의 사악함을 질책하고, 태평천국의 정의를 외친 것이라든지, 혹은 석보전(席寶田), 심보정(沈葆楨)등의 사람들과 "화이지변(華夷之辨)"을 논한 것이라면 별 문제될 것이 없다.

가소로운 점이라면, 그는 감옥속에 갇혀서도 홍수전, 이수성, 진옥성(陳玉成), 담소흥(譚紹興), 임소장(林紹璋)등의 시비를 논한 것이다.

 

경위는 이러하다: 이수성이 1864년 7월 19일 천경성이 함락될 때 유천왕(幼天王) 홍천귀복(洪天貴福)을 데리고 포위망을 돌파한 후, 자신의 전마를 유천왕에게 주고, 부하들에게 유천왕을 데리고 빠져나가게 한 후, 자신은 간인의 배신으로 포로가 된다. 그는 옥중에서 수만자의 자술서를 쓴다. 증국번은 이수성을 살해한 후, "각처에서 그의 진술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이수성공>으로 엮어서 출판해 군기처와 각 지방관리들에게 배포한다.

심보정은 모종의 동기로 증국번이 그에게 보내준 <이수성공>을 홍인간에게 보여준다. 홍인간은 그것을 본 후 화를 참을 수 없어 펄쩍 뛰면서 반박의견을 써낸다.

홍인간의 말이 정확한지 아닌지에 대하여는 여기서 논하지 않겠다. 흥미가 있는 사람이면 찾아서 보길 권한다.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홍수전, 이수성, 진옥성등은 모두 이미 죽었다. 그리고 홍인간 자신도 이미 감옥에 갇힌 죄수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친 사람처럼 자신의 예전 상사, 동료를 물어뜯다니, 설마 청나라사람들과 후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무섭지 않았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