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당)

주온(朱溫)은 왜 황소(黃巢)를 배신했을까?

by 중은우시 2022. 6. 2.

글: 흑미애여행(黑米愛旅行)

 

당나라말기, 황제는 혼용무능했고, 통치계급은 썩어있었다. 게다가 천재지변이 속속 일어났다. 이 모든 것은 사회의 붕괴를 가져오고, 백성들은 유리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의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황소의 난”이다.

 

875년, 염상(鹽商)가정에서 태어난 황소는 당시 사회에 극도의 불만을 품고, 농민반란군의 우두머리인 왕선지(王仙芝)에 호응하여 조주(曹州) 원구(怨句, 지금의 산동성 하택 서남)에서 거병한다. 3년후, 왕선지는 관군의 포위공격과정에서 전사하고, 황소는 무리의 추대를 받아 “황왕(黃王)”에 오르고, “충천대장군(沖天大將軍)”이라 칭한다.

880년, 황소는 반란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점령한다. 그리고 대명궁(大明宮) 함원전(含元殿)에서 황제로 등극한다. 황소의 난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황소가 황제의 보좌에 앉은지 얼마 되지 않아, 반란군내에서 큰 사건이 벌어진다. 동주방어사(同州防禦使) 주온(朱溫)이 황소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주온은 황소의 수하들중에 아주 중요한 장수였다. 그리고 많은 병사를 장악하고 있었다. 주온의 배반은 황소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된다. 그러나,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당시 황소의 군대는 이미 장안을 함락시키고, 당희종(唐僖宗)은 이미 사천으로 도망쳤으며, 천하대세가 분명히 황소에게 기울고 있었는데, 주온은 더 일찍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고, 더 늦게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고 왜 꼭 이런 시기에 황소를 배반했어야 했던 것일까라는 점이다.

주온은 역사상 유명한 인간쓰레기이다. 그러나 황소를 배반한 일은 그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황소의 잘못이라고 보아야 한다.

 

황소가 장안에서 황제로 등극한 후, 천하국면은 확실히 그에게 유리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황소가 건립한 대제(大齊) 정권이 대당왕조를 대체하여 천하를 통치할 것이라 여겼다. 많은 당나라의 관리들도 속속 그에게 귀순하여 황소의 진영에 가담했다. 그러나, 역사는 증명한다. “덕불배위(德不配位), 필유재앙(必有災殃)”(그 자리에 맞는 덕을 갖추지 못하면, 반드시 재앙을 당하게 된다). 그의 국면은 기껏해야 농민반란군을 이끌고 도처에서 살인방화를 일으키는 것이지, 천하를 통치하는 제왕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나라황제를 쫓아낸 후, 황소는 주요 정력을 어떻게 하면 천하를 통일시키고, 나라를 다스릴 것인가에 두지 않았다. 그는 매일 후궁에서 궁녀들과 어울렸다. 동시에 그는 예전에 함께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부하들에 대하여 극도의 불신임감을 갖게 된다. 신뢰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는 다시 당나라조정의 정치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환관을 기용한다. 그리고 음모궤계에 능하고 ‘기밀보고’에 능한 이들은 각 군대에 보내어 감군(監軍)을 맡게 한다.

 

많은 환관을 감군으로 보낸 후, 황소는 스스로 자신이 전군의 통태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상, 감군태감들이 그에게 보내오는 각종 정보는 진실성이 많이 떨어졌다. 각군 장수들에 대한 좋은 평가나 나쁜 평가는 그들의 자신들(감군태감)들의 말을 얼마나 잘 들어주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다보니, 주온같은 최전선에서 전투하던 장수들은 괴롭게 되었다. 군사행동에서 환관들의 제약을 받게 되었을 뿐아니라, 자주 원래 무시하던 환관들에게 압박당하고 괴롭힘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주온은 억울하다고 여겼고, 여러번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그의 큰형인 황소에게 서면으로 보고했다. 그러나 그가 올린 보고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원래 그가 보낸 서신은 모조리 환관들이 가로채서 보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882년, 주온은 부하를 이끌고 하중(河中)에서 당군과 전투를 하다가 대패한다. 주온은 연이어 열건의 보고서를 올려 황소에게 증원군을 파견해줄 것을 요청한다. 주온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좌군사(左軍使) 맹해(孟楷)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조정에서 군사보고서를 장악하고 있던 환관과 내외로 결탁하여, 이 일을 묻어버린다. 주온은 겨우겨우 버티면서 기다렸지만, 증원군을 보내준다는 소식은 오지 않았다. 그의 곁에 있던 심복 호진(胡眞), 사동(謝瞳)은 그에게 아예 당군에 투항하자고 건의한다. 주온은 당나라가 아직 완전히 망하지 않았고, 황소는 황제를 칭한 후에 한 일들이 모조리 진명천자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결심을 굳히고 감군태감을 죽여버리고, 당나라에 투항하겠다고 선포한다.

 

당희종은 촉군에서 주온이 명에 투항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너무나 기뻤다. 그는 즉시 조서를 내려 주온은 좌금오위대장군(左金吾衛大將軍), 하중행영부초토사(河中行營副招討使)로 임명하며, “전충(全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한다. 

 

주온이 당에 투항한 것은 황소의 난의 전환점이 된다. 그후 황소와 그의 군대는 전투에서 계속 패퇴했고, 884년 육월, 황소는 낭호곡(狼虎谷, 지금의 산동성 내무 서남쪽)에서 패배한 후 자결한다. 당나라말기의 황소의 난은 이렇게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