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명지(金明枝)
태평공주의 2번에 걸친 혼인생활은 많이 얘기되었지만, 여기에서는 그녀의 자녀문제만 얘기하기로 하자.
먼저 태평공주는 첫번째 남편 설소(薛紹)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었다.
장남 설숭윤(薛崇胤)은 영순2년 구월에 태어났다. 당고종은 그 소식을 듣고 기쁜 나머지 동도 낙양에 특별사면령을 내렸다. 나중에 그는 수양군왕(壽陽郡王)에 봉해지고 관직은 태상경(太常卿)에 이른다.
차남 설숭간(薛崇簡)은 어려서 영국공(郢國公)에 봉해지고 나중에 당현종을 옹립한 공으로 입절군왕(入節郡王)에 봉해지며, 이씨(李氏)성을 하사받는다.
두 딸중 장녀의 이름, 생졸년은 미상이다. 차녀 설씨는 무측천이 만천현주(萬泉縣主)에 봉한다. 식읍으로 300호를 내린다. 만세등봉원년의 중춘(仲春)떄 두로광조(豆盧光祚)에게 시집간다. 그리고 아들 두로건(豆盧建)은 중산군공(中山郡公)의 작위를 세습하고, 당현종의 딸 건평공주(建平公主)와 결혼한다.
<신당서.공주전>에는 태평공주가 죽은 후, "여러 아들과 일당중 죽은 자가 수십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뜻은 태평공주의 아들은 모조리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사학자들의 과장된 말로 보인다. 왜냐하면, <서씨법서기(徐氏法書記)>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태평공주가 실패한 후, 그의 장남 설숭윤은 왕희지의 <악의(樂毅)>등 7권의 서예작품을 숙부인 설경(薛儆)을 통해(설경은 당예종의 달 식국공주의 부마였다), 기왕(岐王) 이범(李范)에게 바치면서, 자신을 도와달라고 한다. 화를 면할 수 있도록.
설숭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이융기(당현종)에게 충성했고, 그로 인해 모친에게 책망을 받은 바 있다. 비록 당현종의 즉위후에 설숭간은 '조진궁장(鳥盡弓藏)'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고, 경성에서 쫓겨났지만, 그래도 별일없이 늙어죽었다. 이를 보면, 태평공주와 설소 사이에 태어난 설숭윤, 설숭간의 두 아들은 모두 평안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평공주는 둘째남편 무유기(武攸曁)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낳는다. 두 아들의 이름, 생졸년은 모두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딸은 더더욱 수수께끼이다. 무유기에게는 현재 알려진 두 딸이 있는데, 모두 태평공주의 딸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영화현주(永和縣州) 무씨는 묘지명에 스스로 "고주정왕부마도위유기태평공주제2녀(故周定王駙馬都尉攸曁太平公主第二女)"라고 써놓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무씨는 늦어도 사성원년에 태어났는데, 그때는 태평공주의 남편 설소가 아직 살아있을 대였다. 그녀가 어찌 다시 무유기와의 사이에 소위 '둘째딸'까지 낳을 수 있단 말인가?
무유기의 또 다른 딸 무령각(武靈覺)도 같은 상황이다. <대당도경복사위의화상명(大唐都景福寺威儀和上銘)>에는 "즉이기월0일000개원이십육00일전(即以其月0日000開元廿六000日鎸)> 이 핵심정보에 따르면 무령각은 늦어도 수공3년에 태어났다. 이때 태평공주는 여전히 설소와 서로 사랑하는 부부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무유기와의 사이에 무령각을 낳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태평공주와 무유기 사이에 낳은 자녀들이 어떤 운명이었는지 그리고 이 강제로 맺어진 부부가 정말 자녀를 낳아 길렀는지, 이런 문제는 더욱 많은 자료가 발굴되어야 답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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