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의 20살가량의 청(程)씨성의 여자가 13일간 방창(方艙, 임시가설병원)에 13일간 격리당한 후, 그 경험을 장문의 글로 써서 위챗에 올렸다. 그러나 글을 올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삭제되었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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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팬데믹사태는 너무 복잡하다. 상하이의 상황도 너무나 이해되지 않는다. 여러가지 요소로 인하여 조성된 것이다. 어떤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떤 것은 완전히 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겪어야 했다.
나는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분석할 생각은 없다. 나는 그저 Covid-19의 확진자로서 임시로 만들어진 격리센터에서 겪었던 경험을 나누고자 할 분이다.
나는 이번 경험에서 가장 가치있고 가장 진귀한 것을 배웠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체험하는 것ㅇ느 전혀 다르다는 것을.
1. 왜 방창의원인가?
나의 요 며칠간의 경력ㅇ르 이해하려면,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방창의원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방창의 중국어에서의 의미는 장방형의 저장구역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국어의 방주(方舟)와 같다. 방주의 뜻은 노아의 방주이고, 세계종말에 사람을 구해주는 것이다.
이곳까지 왔으니, 나는 마음 속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다행히 이곳을 방주라고 부르지 않는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상심이 컸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발생하는 것은 인류최후의 날이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사람으로서의 생활을 포기하고, 동물 혹은 가축이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도 너의 시간과 너의 감정을 신경쓰지 않는다.
내가 처음 확진을 통보받았을 때는 저녁 11시였다. 그들은 나에게 말했다. 내가 병원에서 한 PCR검사결과 양성의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다시 검사해야 한다고, 나는 하룻밤을 기다렸고, 1초도 잠들지 못했다.
여전히 같은 밤 11시. 그들은 다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확진이라고 말해주었고, 그들은 즉시 나를 병원으로 보냈다. 처음에 병원에서는 나에게 '즉시' 검사를 하고 다음 날 저녁에 통보하겠다고 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그들이 하는 말의 뜻을 이해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잠을 자기로 결정했다. 나중에 다음 날 저녁 10시경 그들은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기다리는 것은 괜찮았다. 다만 한 사람에게 '즉시'에 무엇을 해야한다고 하면서, 아무런 추가적인 정보를 주지 않으면, 다가오는 것은 최악의 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다시 반나절이 지나 나는 마침내 방창의원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전히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우리는 단지 백색방호복을 입은 의료인원을 따라갈 뿐이었다.
당시 임시로 가설된 방창에 들어갔을 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에 내가 깨어났을 때는 전체 센터에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방창의원에 들어온 후 발견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나는 한장의 표의 빈칸을 채워넣고, 팔목에는 띠를 찼다. 그 위에는 나의 이름, 나이, 성별과 번호 하나가 적혀 있었다. 이것이 이곳에서 나의 신분증명이다.
이곳의 의사와 간호사는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나의 번호를 불렀다. 만일 내가 휴지나 약물등이 필요하면 그들은 나의 번호를 확인했다. 그들은 나의 감정이나 내가 왜 그것이 필요한지는 신경쓰지 않았다. 병원은 몇 개의 작은 구역으로 나뉘어졌고, 서로 다른 의료팀이 관리했다. 만일 나의 번호가 그 구역이 아니라면, 그들은 나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심지어 종이컵 하나라도.
초반 4일간 우리는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이곳에서는 아예 소독조치도 없다. 가장 미치겠는 것은 이곳이 마치 바이러스전파지같이 바뀐다는 점이다.
아마도 건강한 사람이라면 위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독감처럼. 다만 치료를 하지 않으면 우리를 이곳에 보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만일 우리가 집안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더 잘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해석은 중부가 우리같이 이미 확진된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감염시키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알았다. 이 특수한 시기에 우리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단지 확진자의 수치를 최대한 적게 유지하려는 생각뿐이다.
나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나는 병원안에서는 하나의 번호이다. 내가 잠드는 침대에 갇힌. 나는 모든 확진사례중의 통계수치에 불과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는 심지어 숨겨진 숫자였다는 것이다.
먼저, 그들은 나에게 양성검사결과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전화로 나에게 통지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에게 나에 관한 보도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병원에 갔을 때도 나의 건강코드는 녹색이었다(녹색은 비감염자라는 의미임)
다음으로, 내가 이곳에 보내어진 후, 매일 공식발표하는 확진사례뉴스를 보았는데, 나는 한번도 나의 이름이 거기에 나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무엇을 숨기는가? 그들은 얼마나 숨기는가? 그들은 왜 감추는가? 중국인으로서, 나는 자주 스스로에게 이런 문제를 물어본다. 말로는 항상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정부를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이곳에서 생활할 때는 사람으로 대우받는 것이 아니라, 소말처럼 가두어 길러진다.
첫째, 이 전람관을 개조한 방창은 개략 5천명을 수용한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프라이버시는 없다. 이곳에 1인용방도 없고, 판매대도 없고, 가림막도 없다.
둘째, 기본적인 위생시설이 없다. 목욕시설도 없고, 욕조도 없다. 심지어 수돗물도 없다. "입주수속처리"때 모든 사람들은 작은 플라스틱 그릇 하나와 칫솔 하나를 받는다. 화장실에도 충분한 물이 없다. 전체적으로 배설물의 악취가 넘친다. 화장실문을 열었을 때 분변냄새가 날지 말지는 운에 맡겨야 한다. 나는 최대한 물을 적게 마셨다 그래야 화장실을 가지 않아도 되니까.
셋째, 낮과 밤이 없다. 작열하는 등은 꺼지지 않는다. 간호사는 항상 아침 5시에 우리들의 체온을 잰다. 아무도 이곳에서 푹 잠들 수가 없다.
넷째, 음식물을 얘기하자면, 현재 바깥의 대다수 사람들은 충분한 음식물공급을 받지 못한다고 하니, 내가 그것을 원망할 수는 없다. 설사 그것이 이렇게 짜고 기름지지만. 최소한 우리는 먹을 수는 있었으니까. 그들은 매일 세 끼를 준다. 아침은 만두, 계란과 우유이고, 점심과 저녁은 도시락이다.
다섯째, 우리가 '건강'을 회복하기 전에, 우리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이전에 사용하던 앱을 통하여 PCR결과를 받아볼 수가 없다. 우리는 간호사에게 가서 검사결과를 보아야 한다. 나는 왜 그들이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었다.
3. 슬픈 가운데 즐거움을 찾다.
나는 사람에게 가장 가치있는 일은 우리가 우리의 사고방식, 우리의 반응방식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환경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이곳의 상황은 엉망진창이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은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부모님이 걱정하시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에게 감염되어 방창의원에 와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엄마와 통화를 할 때면 나는 그저 얼버무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내 뒤편에 있는 한 여자가 나와 비슷하게 얼버무리면서 그녀의 딸의 전화에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그녀의 남편은 다른 방창의원에 보내어졌다. 그녀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지금 자고 있어서 너와 얘기할 수가 없다고. 통화가 끝난 후, 나는 그 여성에게 딸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그렇다고 했다. 나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나도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다고.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웃었다.
4. 곤혹스러운 중국인
메르켈은 2021년 신년사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알지 못하는 바이러스가 우리의 신체와 생활에 침투했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인간적인 것들을 타격한다: 친밀한 접촉, 포옹, 담화 그리고 축하."
나는 아주 감동적이면서 약간 놀랐다. 왜냐하면 그녀의 2021년 신년사에서 중국인민들이 집단으로 바이러스를 이기고, 경제발전을 이루고 전국에서 여러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같은 한사람 한사람은 언급하지 않았다. 개체로서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무서워했는지를.
사람들은 계몽운동과 문예부흥이후 깨닫게 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개인의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지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개인의 행복을 느끼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에서 우리는 항상 집단을 강조한다. 우리는 항상 개인을 무시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놀라운 속도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고, 효과적으로 빈곤을 퇴치했다. 확실히 물질문명은 정신문명의 기초이다. 다만 우리는 진정으로 경제발전후의 심리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제로코로나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하여, 우리는 친구와 가족이 함께 지내는 사랑을 희생했고, 우리는 자유에 대한 갈망도 무시했다.
나는 중국의 정책이 대다수 사람들로 하여금 빈곤, 기아와 바이러스를 벗어나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정부가 우리를 보호하는 방식은 마치 짐승을 대하는 것같다고 느낀다. 정부는 우리에게 충분한 먹거리와 아름다운 생활장소를 주었다. 다만 정부는 우리의 감정이나 우리의 생각은 무시해버린다. 당연히 정부는 우리가 왜 소리치는지도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계속 생각한다. 짐승처럼 즐겁게 혹은 고통스럽게 생활할 것인가, 아니면 깨어있는 자각한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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