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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송철종맹황후(宋哲宗孟皇后): 송황실에서 버려졌으나, 송황실을 153년간 잇게 만들어주다.

by 중은우시 2021. 12. 14.

글: 진순천(秦順天)

 

현숙(賢淑)함으로 황후로 뽑히다.

 

맹씨는 하북성 한단(邯鄲) 영년(永年) 사람이다. 1073년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16살때, 그녀는 백여명의 관료 여식들과 함께 선발되어 궁으로 들어간다. 그녀는 자태가 아름답고, 단정하여 고태후(高太后)의 사랑을 받는다. 그녀는 모든 일에 예를 다하며, 대국을 고려하여, 고태후는 그녀가 후궁으로서의 기준에 가장 부합한다고 여긴다.

 

고태후가 적극 힘을 써서, 20살의 맹씨는 당시 16살의 송철종과 혼례를 올리고, 정식으로 황후에 책봉된다. "원우황후(元祐皇后)"로 불린다.

 

고태후는 송철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황제로서 현모양처를 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잘 아껴주어라!"

 

당시 고태후는 혼잣말로 이렇게 덧붙였다고 한다: "그녀는 현숙한 여자이다. 아쉽게도 복이 박하구나. 그러나 장래 국가에 변고가 생기면 그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 예언같은 말은 나중에 그대로 적중된다.

 

국모(國母)에서 도고(道姑)로  

 

1년후, 맹황후는 딸 복경공주(福慶公州)를 낳는다. 그러나 송철종은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고, 유청청(劉淸菁)을 총애했다. 미모에 재능이 많은 유청청은 총애를 믿고 교만했다. 그녀는 궁중의 예법을 지키지 않고, 맹황후에 태만하고 무례했다. 그리하여 궁안의 사람들이 모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온화한 맹황후는 그녀와 싸우지 않고, 계속 인내한다.

 

1096년, 복경공주가 중병에 걸리고, 백약이 무효였다. 맹황후의 언니는 도교의 부적으로 그녀를 구해보려고 한다. 공주가 병사한 후, 맹황후를 질투한 유청청은 이 일을 빌미로 송철종에게 그녀가 주술을 써서 불궤한 일을 도모했다고 무고한다. 

 

송철종은 사람을 보내어 철저히 조사한다. 황성사(皇城司)는 황후 주변의 궁녀, 태감들을 고문했고, 수십명이 고문으로 몸이 엉망진창이 된다. 심지어 혀가 잘리고 다리가 잘린 자들까지 나왔다. 그들은 맹황후에게 억울한 죄를 뒤집어 씌우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황성사는 진술서를 위조하여 원안을 만든다. 

 

송철종은 "방혹사언(旁惑邪言), 음협미도(陰挾媚道)"를 이유로 황후를 폐위시키고, 맹씨를 요화궁(瑤華宮)으로 보내 출가시킨다. 그녀는 "화양교주(華陽敎主)", "옥청묘정선사(玉淸妙靜仙師)"로 불리며 법명은 '충진(冲眞)'이었다. 영화부귀를 누리던 국모가 순식간에 도고로 변신한 것이다. 그녀의 나이 당시 겨우 23살이었다.

 

대기대락(大起大落), 다시 폐위되다.

 

소위 "요화궁"은 기실 변경의 길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주택이었다. 단지 몇 칸의 낡은 방이 있을 뿐이다. 맹씨는 이런 '냉궁'에서 하루하루 청등고독(淸燈孤獨)의 세월을 보낸다.

 

궁안의 소식이 계속 전해져 왔다. 유청청은 현비(賢妃)로 승급되고 얼마 후 아들을 하나 낳는다. 그후 그녀는 신임 황후에 오른다. 그후 그 신임황후의 아들은 사망한다.

 

이렇게 다시 4년이 흘렀다. 그리고 다시 놀라운 소식이 전해진다. 송철종이 붕어했다!

 

돌연 어느 하루, 화려한 독거(犢車)가 요화궁의 앞에 도착한다. 그리고 맹씨를 모시고 궁으로 돌아간다. 원래 등극한지 얼마 되지 않은 송휘종 조길(趙佶)이 맹씨의 황후지위를 회복시켜준 것이었다.

 

당시 유청청은 이미 황후가 되었고, 원부황후(元符皇后)로 불리웠다. 맹황후는 원우황후로 모셔진다. 1년 후 유황후는 채경(蔡京)등과 결탁하여 맹씨를 다시 폐위시킨다. 그녀는 다시 요화궁으로 되돌아가야했다. "희미원통지화묘정선사(希微元通知和妙靜仙師)"로 칭호가 더 길어졌다.

 

두번에 걸쳐 황후에 오르고 두번에 걸쳐 폐위되면서 맹씨는 다시 도포를 입었다. 낡고 유폐된 요화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번에 그녀는 요화궁에서 20여년을 머무르게 된다.

 

기나긴 유폐생활에서 매일이 하루같이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홍진세계에서는 사람들도 세상도 모두 달라졌다. 원부황후는 이미 자살했고, 산하는 크게 변했다. 여진이 굴기하여 대송은 위기에 처한다.

 

화가 복이 되고, 수렴청정하다.

 

1126년, 요화궁에 불이 난다. 맹황후는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냉궁인 연녕궁(延寧宮)으로 옮겨야 했다. 그런데 연녕궁에서도 다시 불이 난다. 당시 금나라군대가 이미 개봉성 아래까지 몰려와 있었다. 황실은 스스로를 지킬 수도 없다보니, 맹황후는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래서 상국사(相國寺) 앞에 있는 친정집으로 옮겨간다.

 

1127년 정월, 금나라군대가 변경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송휘종, 송흠종의 두 황제 및 황족 470여명, 문무백관 2000여명을 끌고 간다. 금나라는 이들을 모두 북으로 압송하여 철저히 대송을 멸망시키려 한 것이다.

 

맹씨는 이미 민간의 서인으로 전락했고, 황실의 명부에 이름이 남아 있지 않아서, '정강지난'때 화가 복이 되어 북으로 끌려가 노비로 살아가야할 액운을 피할 수 있었다. 세상 일은 아이러니하다. 금나라는 아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 빠트린 도고 한명으로 송왕조는 철저한 멸망을 피할 수 있게 될 줄을.

 

금군이 철수한 후, 개봉성에는 괴뢰정부가 들어선다. 금나라사람들이 초제(楚帝)로 세운 장방창(張邦昌)이 우두머리였다. 당시 민심은 아직 송나라조정을 향해 있었으나, 송나라황실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은 맹씨뿐이었다. 그리하여 장방창은 맹씨를 모셔서 연복궁(延福宮)에 거처하게 하고 백관의 조배(朝拜)를 받게 하며 그녀를 '송태후(宋太后)에 봉하고, 맹씨의 '원우황후' 존호를 회복시키며 그녀에게 수령청청으로 조정을 주재해줄 것을 청한다.

 

처변불경(處變不驚), 대송강산을 구하다.

 

반생동안 상처입고 억울한 일을 당한 것도 모두 조송조정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적막하게 삼십년을 살아온 맹씨는 자신을 폐위시킨 송철종이나 송휘종을 미워하지 않았고, 한마음으로 송왕조를 생각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국가가 망국의 위기에 처했는데, 나는 대송왕조의 며느리로서, 수수방관할 수가 없다. 그녀는 친히 조서를 써서, 국가의 난을 가슴아파하고, 다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자고 격려했다.

 

대송강산을 지켜내기 위해, 조씨황실을 유지하기 위해, 맹씨는 한편으로 장방창을 다독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송씨황실의 후손을 찾았다. 그가 바로 송휘종의 아홉째 아들 조구(趙構)였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 조구에게 황위에 올라 송황실을 광복시키자고 권한다.

 

맹태후의 조서로 21살의 조구는 응천부(應天府, 지금의 남경)에서 등극하니 그가 송고종이다. 즉 남송의 개국황제이다. 이때부터 송황실은 다시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다.

 

등극 당일, 맹황후는 수렴청정을 거둔다. 공성신퇴(功成身退). 조구는 그녀를 원우태후로 모시고 다시 융우태후(隆祐太后)로 존호를 바꾼다.

 

2년도 되지 않아 반장(叛將) 묘(苗), 유(劉) 두 사람이 병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송고종의 행궁을 포위하고, 송고종의 퇴위를 압박하며 3살된 태자에게 선위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맹태후에게 다시 수렴청정해줄 것을 요청한다. 처변불경의 맹태후는 겉으로는 반장의 요청을 받아주면서, 암암리에 사람을 보내어 조서를 성밖으로 내보내 비밀리에 각지의 근왕군에 연락한다. 얼마 후 한세충(韓世忠)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묘유지란'을 평정한다. 송고종은 복위하고, 그후 맹후는 즉시 수렴청정을 거둔다.

 

내란이 막 평정되었는데, 금군이 다시 대거 남하한다. 송고종과 맹태후를 생포하여 철저히 송나라를 멸망시키려는 것이었다. 맹태후는 강서로 도망가는데, 당시 따르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졌다. 결국 농민을 찾아서 가마를 매게 했다. 몇년간 이리저리 떠돈 후에 송고종이 다시 그녀를 항주로 모셔간다. 

 

만년에 수종정침(壽終正寢)하고 융중하게 장례를 치른다.

 

맹태후는 사람됨이 공근(恭謹)하여, 한번도 황제에게 자신의 친척을 위해 관직을 내려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생활도 아주 근검했다. 매월 아주 적은 생활비만 썼고, 그저 먹고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녀는 술을 마시길 즐겼는데, 송고종은 월주(越酒)가 너무 시고 써서 마시기 불편하다고 여겨 사람을 시켜 첨주(甛酒, 달콤한 술)를 보냈다. 그러면 맹태후는 반드시 사람을 보내어 술값을 치르게 했고, 한번도 술을 빼앗거나 돈을 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음이 인자하고 정의로운 맹태후는 조정에 그녀가 도망치던 길에 도움을 주었던 지방의 세금을 감면시켜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송철중의 후궁들을 황궁에서 거두어 생활을 보살펴달라고 요구한다; 심지어 유청청의 딸에게도 맹태후은 덕으로 대하며 잘 보살펴 준다.

 

송고종은 맹태후와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 그러나 맹태후가 없었더라면 조구는 황제에 오를 수가 없었을 것이고, 위기를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맹태후의 은덕에 감사함을 느낀 조구는 그녀를 생모처럼 존중하고 효성을 다했다. 그녀에 관련된 일이면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모두 직접 보살폈다. 가끔 신선한 과일을 얻으면 반드시 태후에게 보냈다. 그후에 자신이 맛을 본다. 맹태후의 병이 위중할 때, 조구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병상 앞에서 간병했다.

 

1131년, 맹태후가 수종정침한다. 향년 58세이다. 송고종은 비통에 빠져 며칠간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나중에 맹태후는 융중하게 소흥(紹興) 상황촌(上皇村)에 매장된다. 맹태후의 영패(靈牌)는 송철종의 사실(祀室)에 놓일 뿐아니라 유황후보다 윗자리에 놓인다. 시호는 소자헌열황후(昭慈獻烈皇后)이다. 2년후, 조구는 이 시호는 그녀의 공덕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다시 "소자성헌황후(昭慈聖獻皇后)"로 바꾼다.

 

한 여인으로서, 맹씨는 혼인의 인연은 좋지 못했다.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도 못했고, 유일하게 얻은 딸은 요절한다. 비록 황후의 존귀한 자리에 있었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오히려 아무런 잘못없이 폐출된다. 청등고영 속에서 근 삼십년의 처량한 세월을 보낸다.

 

굴곡이 있던 일생동안 맹씨는 물결에 흔들리는대로 갔다. 이는 개인을 초월한 애한정구이다. 그녀가 존재함으로 인하여 역사상 남송이 존재할 수 있었다. 대송왕조는 다시 153년을 지속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