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의사리(衣賜履)
조조는 영웅이다. 자식을 낳는 것도 남달랐다. 앞뒤로 25명의 아들을 낳았다. 딸도 적지 않게 낳았을 것이다. 최소한 3명은 한헌제 유협에게 시집보냈고, 그중 한명은 한나라의 마지막 황후가 된다. 여기에서는 그의 아들들중 몇몇을 골라서 소개해 보기로 한다.
조앙(曹昻): 조조가 가장 미안해 한 아들
조앙의 자는 자수(子修)이고, 조조의 장남이다. 만일 일찌감치 죽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황제가 된 것은 조비가 아니라 조앙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조앙은 조비보다도 근정묘홍(根正苗紅)하기 때문이다. 바로 적장자(嫡長子)이다.
조조의 첫부인은 정(丁)씨이다. 그러나 정부인은 아들을 낳지 못한다. 조조의 작은 부인 유부인(劉夫人)은 아들 조앙과 딸 청하장공주(淸河長公主)를 낳는다. 유부인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조조는 정부인으로 하여금 조앙을 기르게 한다. 조앙은 정부인의 양자인 셈이다. 즉, 조앙은 조조의 적장자가 된 것이다.
조앙이 약관때(스무살 전후) 효렴(孝廉)이 된다. 197년, 정월 조조는 장수(張繡)를 정벌한다. 대군이 완현(宛縣)에 도착했을 때, 장수가 투항한다. 조조는 득의양양하여, 잠시 정신을 놓는다. 장수의 숙모가 예쁜 것을 보고 그녀를 간음한다. 그리하여 장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조조에 반기를 든다. 조조가 타던 말은 절영(絶影)이었는데, 화살에 머리와 말굽을 맞아 타고 달아날 수가 없었다. 조조 본인도 오른팔에 화살을 맞는다. 조앙은 자신의 말을 조조에게 넘겨주어, 조조는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앙은 이로 인하여 목숨을 잃는다.
조앙이 죽은 후, 정부인은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는다. 하루종일 눈물로 보낸다. 조조를 만나면, 너는 살인범이다. 너는 내 아들을 죽였다고 말했다. 조조는 원래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정부인이 그를 계속 추궁하자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하여 정부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낸다. 조조의 원래 의도는 정부인의 기를 조금 꺽어놓은 다음에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데려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정부인은 죽을 때까지 조조를 용서하지 않았다. 조조가 임종때, 정부인과 조앙을 떠올리고, 탄식하며 말했다. 내 일생동안 마음대로 행동했지만 누구에게 미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일 죽은 후에도 영혼이 있어, 자수(조앙)이 나에게 어머니는 어디계시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한단 말인가.
조앙은 나중에 풍민왕(豊愍王)에 봉해진다.
조충(曹沖): 가장 총명한 아들
조조의 여러 아들들 중에서 조식, 조비를 제외하고 지명도가 가장 높은 것은 아마도 조충일 것이다.
조충이 코끼리의 무게를 잰 일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일은 정말 있었던 일이다.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조충의 자는 창서(倉舒)이고,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했다. 5,6살때, 말을 할 때도 여러 문제를 고려하여 마치 어른이 말하는 것같았다. 당시 손권은 조조에게 큰 코끼리 한 마리를 바쳤다. 북방인이 코끼리를 본 적이 있을 리 없다. 모두 이 큰 동물의 무게가 얼마나 나갈지 궁굼해 했다. 조조는 신하들에게 코끼리의 무게를 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명한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저울대를 크게 만들어서 코끼리를 재는 저울을 만들자고 했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저울대를 든단 말인가?
또 누군가 말했다. 코끼리를 죽인 다음에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서 재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조조는 그를 끌고 나가 곤장을 쳤다.
그리하여 아무도 감히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때 겨우 5,6살된 조충이 말한다. 코끼리를 큰 배로 데려간 다음에 선박의 물이 닿는 곳에 표시를 한 다음, 코끼리를 배에서 내리게 하고, 다시 배에 돌맹이를 담아서 코끼리를 실었을 때의 흘수선(물이 닿는 선)까지 담은 후, 그 돌멩이의 무게를 재면 코끼리의 무게를 알 수 있다고.
조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그리고 조충을 더욱 아낀다.
[이 사건은 <삼국지.조충전>에 실려 있다. 아마도 실제 발생한 일일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실제 무게를 잴 수 있을지 없을지는 별론으로 하고, 조충의 사고방식은 정말 놀랍다고 할 수 있다. 조충은 196년에 태어났으니, 그가 5,6세때 코끼리의 무게를 쟀다는 것인데, 그때는 관도지전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로 조조가 원소를 물리치고, 천하에 위세를 떨칠 때였다. 손권이 고개를 숙이고 조조에게 우호적인 제스추어를 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당시 천하에는 사건이 많았다. 형벌은 중하게 과했다. 조조의 안장을 창고안에 놓아 두었는데, 쥐가 갉아먹어서 망가졌다. 창고보관관리는 "큰일났다. 이제 죽었다"고 생각한다. 조충이 그 사실을 알고 그 관리에게 말한다. 3일후, 나이 부친에게 찾아가서 죄를 받겠다고 말해라. 그리고 조충은 칼로 자신이 입는 옷을 찢어서 마치 쥐가 갉아먹은 것처럼 한다. 부친 조조를 만났을 때,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조조: 충아. 너 어떻게 된 거냐.
조충: 아버지, 저는 우울합니다.
조조: 너처럼 어린애가 무슨 우울할 일이 있단 말이냐.
조충: 제가 듣기로 쥐가 의복을 갉아먹으면, 그 주인은 재수가 없다고 합니다. 오늘 제 옷을 쥐가 갉아먹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구멍이 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울합니다.
조조: (웃으면서) 그건 헛소리이다. 괜찮다. 내가 있는데 어찌 너에게 재수없는 일이 생긴단 말이냐.
그후, 창고관리가 조조에게 안장을 쥐가 갉아먹었다는 것을 보고하며 처벌을 받겠다고 한다. 조조는 말했다. 내 아들의 옷은 그의 곁에 놔두었는데도 쥐가 갉아먹었다. 하물며 창고안에 놓아둔 안장이야 더 말할게 있겠느냐. 그러면서 창고관리를 처벌하지 않았다.
[이 일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만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두 사람에게 같은 시기에 같은 일이 일어날 확률은 아주 적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조충은 인애(仁愛)하고 총명했다. 그리고 잘 생겼다. 사서에는 그의 '용모와 자태가 아름다웠다'고 적었다. 조조는 그를 특별히 총애한다. 조조는 여러번 신하들에게 조충을 언급했으며, 조충에게 자신의 지위를 넘겨줄 생각을 토로했다고 한다.
208년, 조충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조조는 크게 슬퍼한다. 조비가 조조를 위로하자, 조조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나의 불행이지만, 너에게는 행운이다."
나중에 조충은 등애왕(鄧哀王)에 추봉된다.
조간(曹幹): 가장 가련하게 생각한 아들
조간은 진(陳)씨성의 소첩이 낳은 아들이다. 그녀는 조간을 낳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조조는 왕부인(王夫人)에게 그를 기르게 한다. 조간이 5살때, 조조는 병이 위중해진다. 임종전에 조조는 조비에게 그를 부탁한다: "이 아이는 3살때 모친을 잃고, 5살때 부친을 잃으니 실로 가련하다. 너에게 맡기니 잘 보살펴 주어라."
조비는 그리하여 이 동생을 특별히 아낀다. 다른 동생들보다 훨씬 더 아꼈다. 조간은 나이가 어려서 자주 조비를 '아빠'라고 불렀다(조비는 조간보다 29살이 많았다). 조비는 매번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나는 네 아빠가 아니라 네 형이란다. 조비는 죽을 때까지 이 동생을 아껴주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 조비는 임종전에 특별히 조서를 내려 아들 위명제 조예(曹叡)에게 조간을 잘 돌봐주라고 당부한다.
나중에 조간은 조왕(趙王)에 봉해진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조비가 태자로 세워지는데, 조간의 모친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조림(曹林): 손녀사위가 가장 유명한 아들
패목왕(沛穆王) 조림은 뭐 쓸 내용이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손녀딸이 있었는데, 아주 유명한 남자에게 시집간다. 바로 혜강(嵇康)이다.
조창(曹彰): 가장 용맹한 아들
조조의 부인들 중에서 아마도 종합적으로 자질이 가장 뛰어난 여인은 변부인(卞夫人)일 것이다. 즉 이후의 변왕후이다. 변부인은 여러 방면에서 모두 뛰어났는데, 특히 두드러진 점은 아들을 잘 낳았다는 것이다. 변부인은 조조와의 사이에 네 명의 아들을 낳는다. 위문제(魏文帝) 조비(曹丕), 임성위왕(任城威王) 조창(曹彰), 진사왕(陳思王) 조식(曹植), 소회왕(蕭懷王) 조웅(曹熊).
조웅이 요절하여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 조비, 조창, 조식은 모두 유명한 인물이다.
조창은 자가 자문(子文)인데, 글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활쏘기, 말카기를 익히고, 자라서는 팔힘이 남달랐다.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수 있었따. 조창은 여러번 부친 조조를 따라 출정하여, 남다른 용맹함을 드러낸다. 조조는 일찌기 이렇게 그를 평한 적이 있다:
"아들아. 나는 글을 읽지 않고, 성인의 도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매일 활쏘고 말타고 칼싸움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는 일개 필부가 될 뿐이다. 너를 발탁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구나!" 그러면서, 조조는 그에게 <시경>, <상서>등을 읽으라고 한다.
조창은 책을 붙잡고 눈썹을 찡그리며 좌우에 말한다: "대장부라면 마땅히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과 같이 십만철기를 이끌고 대막을 종횡하며 견융을 몰아내어 공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부친이 나에게 이런 책이나 읽으라는 것은 설마 나보다 그냥 박사나 되라는 것인가."
조조는 아들들에게 장래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은 적이 있다.
조창: 저는 대장이 되고 싶습니다.
조조: 어떻게 되겠다는 거냐.
조창: 저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어려움이 닥쳐도 뒤돌아보지 않으며, 병사들에게 앞장서서 싸울 것입니다: 잘 싸우면 상을 내리고, 아니면 벌을 내리겠습니다.
조조가 크게 웃었다고 한다.
[조조가 크게 웃은 것은 아마도 너는 태자 자리와는 인연이 없나보구나라는 뜻일 것이다]
218년, 대군(代郡)의 오환(烏桓)이 반란을 일으킨다. 조조는 조창을 북중랑장에 임명하고 행효기장군으로 삼는다. 조창은 북정하여 탁군으로 들어가다가 수천의 오환기병을 마주친다. 당시 조창의 병마는 아직 다 도착하지도 않았고, 겨우 보병 천여명, 기병 수백명이 있을 뿐이었다. 조창은 전예(田豫, 어양 사람. 북방상황을 잘 알았음)의 계책을 써서, 험지를 지키며 나가 싸우지 않았다. 오환은 여러번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철군했다. 조창은 뒤이어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며 직접 싸운다. 화살을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반나절을 싸우면서 조창의 갑옷에서 화살이 여러개 꽂혔는데, 투지는 더욱 왕성하여 적을 추격해서 상간하(桑干河)에 이른다. 이곳은 대군에서 200여리 떨어진 곳이다. 수하의 부하들은 모두 너무 멀리 나왔고,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지쳤으며, 대군을 지나지말라는 명령도 있었으니, 적의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지 말도록 권했다.
그러나 조창은 말한다.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왔는데, 관건은 승리하느냐 못하느냐이다. 왜 명령에 구애받는가. 오랑캐들이 아직 멀리 가지 못했으니, 그들을 쫓아가면 궤멸시킬 수 있다. 명령을 따르느라고 적을 놓아주는 것은 좋은 장수가 할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말에 올라타고 명령을 내린다. "따르지 않는 자는 참하겠다." 하루낮밤동안 적을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수천명을 포로로 잡는다. 조창은 2배의 기준으로 부하장병들에게 상을 내리니, 모두가 기뻐해 마지 않았다. 당시 선비부락의 수령인 가비능(軻比能)이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쌍방의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는데, 조창이 잘 싸우는 것을 보고는 신복(臣服)한다. 이렇게 하여 북방은 평정되었다.
당시 조조는 장안에 있었는데, 조창을 자신의 행영으로 부른다. 조창은 업성(鄴城)을 지나면서 태자 조비를 만난다. 조비는 그에게 이렇게 일러준다. 네가 이번에 큰 공을 세웠는데, 부친을 만났을 때 절대로 공로를 자랑하지 말고, 대답할 때 반드시 겸손해야 한다. 조창은 부친을 만났을 때, 조비가 당부한대로 모든 공로를 수하장수들에게 돌린다. 그러자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조창은 노란 수염을 길렀는데, 조조는 조창의 수염을 붙잡고 말했다: 생각지도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다. 나의 황수아(黃鬚兒)가 이렇게 철이 들었을 줄은.
<삼국지.조창전> 배송지 주인 <위략>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조조가 한중에서 유비와 싸울 때, 유비의 군대가 산에 주둔하고 있었고, 양아들 유봉을 산아래로 내려보내 도전했다. 조조는 이렇게 욕한다:
"짚신이나 팔던 놈이 가짜아들을 가지고 어르신에게 항거하느냐. 나의 황수아로 그를 수습하겠다."
조조는 급히 조창을 한중으로 오도록 부른다. 조창은 밤을 새워 달려왔는데, 장안에 도착했을 때, 조조는 이미 한중에서 철군했었다.
222년 임성왕에 봉해진다.
223년 경사에서 병사한다. 시호는 위왕(威王)이다.
조식(曹植): 가장 재능있는 아들
조식은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문학조예로 부친 조조, 형 조비와 함께 삼조(三曹)라 불린다. 남조의 문학가 사영운(謝靈運)은 "천하의 재주가 일석이라면, 조자건(曹子建, 조식)이 팔두를 독점했다(天下才有一石, 曹子建獨占八斗). 청나라초기의 시인이자 문단의 영수인 왕사정(王士禎)은 더더구나 이런 말을 한다. 한위(漢魏)이래 시인으로 선재(仙才)라 부를 수 있는 자는 조식, 이백, 소식 3명 뿐이다.
조식, 자는 자건, 10살 전후하여 <시경>, <논어> 및 각종 사무 수십만자를 통독했고, 글을 잘 썼다. 한번은 조조가 그의 문장을 보고 물었다: 아들아. 너의 이 글은 누구에게 부탁해서 받은 것이냐. 조식은 바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제가 쓴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재를 내주시면 제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받을 필요가 있을지 없을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조조는 업성에 동작대를 만들고 아들들을 불러서 모두 부(賦)를 1수씩 짓도록 한다. 조식은 붓을 들어 바로 써내려갔고, 다른 형제들을 압도했다. 조조가 크게 놀란다.
조식은 성격이 단순하고 검소하여, 쉽게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격식을 따지지 않았다. 의복이나 수레등도 화려함을 추구하지 않았다. 매번 조조와 얘기를 나눌 때면 조식이 막히지 않고 바로 대답하여 조조도 그를 남다르게 여긴다.
214년, 임치후(臨菑侯)에 봉해진다. 조조가 손권을 정벌할 때, 조식으로 하여금 업성을 유수(留守)하게 하며 그에게 당부한다: "내가 예전에 돈구령으로 있을 때 나이가 23살이었다. 그때 한 일을 지금 생각해도 후회하지 않는다. 현재 너도 23살이다. 잘 해보도록 해라."
조조가 태자를 세울 때, 조식은 조비의 가장 유력한 경쟁자였다. 이 부분은 이후에 자세히 쓰도록 하자.
220년, 조비가 황제에 오르고, 조식에 대하여는 계속 거리낌이 있었다. 조비가 죽고 아들 조예가 등극한다. 그가 위명제이다. 조식은 여러번 국가를 위해 일하겠다고 자청했지만, 기용되지 않ㄴ믄다.
232년 조식이 사망한다. 시호는 진사왕이다.
조비(曹丕): 문무를 겸비한 아들
'삼조'가운데 문장의 명성으로는 가장 낮다. 그가 어떤 작품을 썼는지 대다수의 사람들은 잘 모른다. 조비가 태자로 있을 때, <전론(典論)>을 썼다. 이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문예이론비평서이다. 원래 22편인데, 대부분 망실되고, 현재는 <자서(自敍)>, <논문(論文)>, <논방술(論方術)>의 3편만 남아 있다.
<전론.자서>에는 조비가 자신을 소개한 내용이 있다.
내가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탁의 난이 발발한다. 5살때, 부친은 나에게 활쏘기를 배우게 했다. 6살때 나는 괜찮게 배웠다. 다시 말타기를 배운다. 8살이 되자 나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모두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부친이 출정을 나가면 자주 나를 데리고 갔다. 건안2년(197년), 부친은 형주로 남정을 갔다. 완현에 이르러, 장수가 투항한다. 며칠 지나지 않아 이 자가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나의 형 조앙, 나의 당형 조안민(曹安民)이 위해를 당한다. 그 때 나는 10살이었다. 다행히 나는 말을 잘 타서 도망칠 수 있었다.
글을 배우건 무예를 배우건 핵심은 운용에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부대 사이에서 자랐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다. 지금도 싫증나지 않는다. 새와 짐승을 사냥할 때면 한번에 십리를 달려나가고, 말 위에서 활을 쏘면 백보밖까지 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몸이 건강하다. 사냥을 즐기며 싫증낸 적이 없다.
건안10년(205년), 부친이 기주를 평정하고, 부근의 소수민족이 모두 신복했다. 어떤 자는 좋은 활을 바쳤고, 어떤 자는 명마를 바쳤다. 그해 늦봄, 바람이 부드럽게 불고 있었고, 풀은 얕고 짐승은 살찌는 시기이다. 나와 당형 조자단(曹子丹) 즉 조진(曹眞)은 업성의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 하루종일 나는 장록(獐鹿) 9마리, 토끼 30마리를 잡았다.
건안17년(212년), 나는 다시 부친을 따라 남정에 나섰다. 곡려(曲蠡)에 군영을 차렸다. 상서령 순욱이 와서 군대를 위로했다. 우리 둘은 만나서 한담을 나누었다.
순욱이 물었다. 듣기로 활을 좌우로 잘 쏜다고 들었다. 정말 대단하다.
나는 말했다. 그게 뭐 대단합니까. 내가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보지 못했지요. 활을 머리 뒤로 돌리고, 입으로 화살을 물고 엎드려 쏘기도 하고, 드러누워 쏘기도 합니다. 화살을 쏘기만 하면 모두 과녁에 명중하지요.
순욱이 웃으며 말했다. 아, 화살을 그렇게 쏘기도 하는군요.
나는 말했다. 평상시에 활쏘기를 연습할 때는 과녁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백발백중해도 뭐 대단할 것은 없습니다. 모두 가만히 있는 것을 쏘는 것이니 뭐 재주랄 것도 없지요. 만일 재주가 있다면 반드시 대초원으로 나가야 합니다. 풀이 깊고, 짐승은 교활하며, 새는 기민합니다. 이런 상황하에서 모두 맞추여야 진짜 재주가 있는 것이지요.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군제주(軍祭酒) 장경(張京)이 곁에 앉아서 순욱을 보면서 주먹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나는 또한 검술도 배웠다. 좋은 스승을 찾았는데, 나는 지방이 다르면 검술도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만 가장 대단한 것은 역시 경사검법(京師劍法)이었다. 한환제, 한영제때 한 호분위사가 있는데 이름이 왕월(王越)이다. 그의 검술은 신기막측하여 경사에 이름을 떨쳤다. 하남사람 사아(史阿)가 말하기를 예전에 왕월과 같이 지낸 바 있고, 왕월의 검술은 모두 자기가 가르쳐준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래서 사아에게 검술을 배웠고, 그 정수를 모두 얻었다. 한번은 내가 평로장군 유훈(劉勛), 분위장군 등전(鄧展)등과 같이 술을 마시는데, 등전의 권각(拳脚)술과 병인(兵刃)은 모두 유명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빈손으로 칼을 이길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와 논검을 했다. 서로 말로 싸웠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등전이 말했다. 검을 겨루는데 입으로 할 필요는 없지요. 자신있으면 한번 겨룹시다. 당시 나는 이미 술에 흠뻑 취해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 감자가 있었다. 우리는 감자를 가지고 대전의 아래에서 겨루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그의 팔을 3번 명중시켰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등전은 3번 연속해서 졌지만 여전히 불복하고 계속 겨루자고 있다. 나는 내 검술이 비록 빠르지만 다른 사람의 얼굴을 명중시키기는 아주 어렵다. 그래서 항상 너의 팔을 맞힌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감자를 들었다. 나는 그가 나의 중로로 공격해올 것이라고 예측하여 먼저 공격하는 척했다. 등전은 과연 직접 찔러왔다. 나는 뒤로 살짝 피한 다음 순에 든 감자로 그의 이마를 찍었다. 이번에는 모두 깜짝 놀란다.
나는 자리로 되돌아와서 웃으면서 그들에게 말했다:
옛날 순우의(淳于意)가 양경(陽慶)을 스승으로 모시고 의술을 배울 때, 양경이 말했다. 네가 나에게 배우려면, 반드시 네가 이전에 쓰던 그 쓸데없는 약방문은 모두 버려야 한다. 그래야 내가 너에게 의학비술을 가르쳐 줄 수 있다. 오늘 나도 등장군에게 당신의 검법은 모두 잊으라고 말하고 싶다. 다시 진정한 검도를 배우기 바란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가가대소했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어떤 일이건 아무리 잘 하더라도 함부로 자랑해서는 안된다. 내가 젊었을 때, 손에 쌍극을 들면 적수를 만날 수 없었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쌍극을 들면 철갑을 입은 것과 같다. 방패는 그저 나무로 만든 것이 아닌가. 나중에 나는 진(陳)나라사람 원민(袁敏)에게 단극(單戟)으로 쌍극을 상대하는 법을 배웠다. 익히고 나자 적수를 찾을 수 없었다. 내가 손을 쓰면, 상대방은 어느 방향으로 그를 공격하는지 알지 못했다. 만일 이전에 내가 원민과 만났다면 나는 분명 쌍극을 들고 그의 단극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어찌 그의 적수가 되었겠는가.
나의 부친은 글읽기를 좋아한다. 비록 군대에 있지만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않았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한다. 사람이 어렸을 때 배운 것은 잘 기억한다. 나이들어서 배우면 잘 잊어버린다.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글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은 나와 원유(袁遺, 원소의 당형)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시를 읽었고, 글을 읽었다. 다시 조금 더 커서는 오경, 사부, 사기, 한서, 제자백가를 읽었다. 모두 통독했다. 나는 일부 문장과 시부를 짓기도 했다. 개략 60여편이다. 내가 지혜가 있지만 우둔해보일 수 있고, 용감하지만 겁먹은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인의로 사람들과 교류하며, 관용으로 부하를 대하는지는 이후의 사관들이 평가할 것이다.
[개인적인 느낌으로 조비의 이 글은 자신을 지나치게 자랑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의 자서를 보고 정말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전에 조비에 대하여 느꼈던 인상과는 크게 달랐다. 여러분은 읽은 후에 나와 같은 느낌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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