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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조)

조조(曹操)의 묘(墓)는 어디에 있을까?

by 중은우시 2019. 4. 11.

글: 지역사(知歷史)


조조는 삼국시대 가장 논쟁이 많은 인물이다. 그의 일생은 간웅(奸雄)이었다. 웅재대략(雄才大略)을 가지고, 잔혹악독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가 죽기 전에 후인들의 그의 분묘를 파해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놀라운 조치를 취한다. 즉, 장례식때 백성들이 본 것은 신기한 일막이다. 업성의 모든 성문이 동시에 열리고, 72구의 관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향해서, 미리 준비해놓은 묘혈에 묻힌다. 이렇게 하여, 조조의 시신이 도대체 어디에 묻혔는지는 수수께끼로 남게 된다. 이렇게 하여, "조조칠십이의총(曹操七十二疑塚)"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조조의 의총에 관하여 고인들은 시가(詩歌)에서 자주 언급했다. 왕안석(王安石)의 <의총(疑塚)>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청산여랑입장주(靑山如浪入漳州(), 동작대서팔구구(銅雀臺西八九丘), 누의왕환공농무(螻蟻往還空壟畝), 기린매몰기춘추(麒麟埋沒幾春秋)" 이는 동작대 유적지에서 쓴 것이다. 그냥 의총이 있다고만 했지 72개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나라때의 유응부(兪應符)가 쓴 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생전기천절한통(生前欺天絶漢統), 사후기인설의총(死後欺人設疑塚), 인생용지사즉휴(人生用智死卽休), 하유여기지구롱(何有餘機至丘壟), 인언의총아불의(人言疑塚我不疑), 아유일법군미지(我有一法君未知), 직수진발의총칠십이(直須盡發疑塚七十二), 필유일총장군시(必有一塚藏君屍)" 이 시는 조조가 생전에 한황실을 기만하고, 죽어서는 사람들을 기만한다고 했다. 72의총으로 사람들을 미혹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조조묘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여러 설이 난무하지만, 주로 3가지 견해가 있다. 첫번째 견해는 조조가 업성의 동작대등 삼대(三臺)의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칠십이의총의 설이다. 두번째 견해는 조조는 물아래 묻혀 있다는 것이다. 묘혈은 장하의 강바닥에 암도(暗道)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요재지이>에 기록되어 있다. 세번째 견해는 조조의 사후 업성에 묻히지 않고, 하남성 중부의 허창성 밖에 묻혔다는 것이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조조은 생전에 <종령(終令)>을 반포하여 자신의 능묘는 "인고위릉(因高爲陵), 불봉불수(不封不樹)"하도록 말했다. 즉 능묘는 높은 언덕에 만들고, 땅 위에 높은 무덤을 만들지도 말고, 나무같은 것을 심어서 위치를 남기지도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서문표사의 서쪽 높은 언덕에 능침을 만들었고, '고릉(高陵)'이라 했다. 동시에 당시 조조는 <양현자명본지령(讓縣自明本誌令)>이라는 글을 썼는데, 거기에는 그가 자신이 죽은 후, 신도에 비석을 하나 세우고, 그 위에 "한정서장군조후묘(漢征西將軍曹侯墓)"라고 써달라고 했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한 고고전문가는 하북성 임장에서 고묘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8글자가 쓰여 있었다: "한정서장군조후묘"


이를 보면, 조조묘의 위치를 개략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외에 일부 증거들을 보면, 조조묘는 아마도 장하에 가까이 있을 것이다. 다만 장하는 여러번 물길을 바꾸어 당시 조조묘는 아마도 이미 강물에 매몰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민간에는 이런 전언도 남아 있다. 조비가 당초 장하에 조조묘가 휩쓸려 가버렸으므로, 제사를 지낼 수가 없어서 비통해 했다고. 아마도 <요재지이>의 이야기는 아무런 근거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조조묘가 정말 장하 부근에 있다면, 홍수가 묘위의 봉토를 휩쓸고 지나간 후, 남은 튼튼하고 견고한 전석은 강바닥에 남아 있을 것이다.


당연히, 그렇기는 해도 조조묘에 대하여 최후의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아직도 크고 작은 수수께끼들이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