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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가정제(嘉靖帝): "제왕술(帝王術)"의 최고고수

by 중은우시 2021. 4. 23.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정덕15년(1520년) 구월, 남하하여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를 생포한 황제인 명무종(明武宗) 주후조(朱厚照)가 병석에 눕는다.

 

원인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도중에 혼자서 강위에서 배를 띄우고 물고기를 잡다가 부주의하여 물에 빠졌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북경 자금성 안에서만 살아왔던 황제는 수영을 할 줄도 몰랐고, 물에 빠져서 익사할 뻔한다.

 

이치대로라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온갖 놀이를 다해 본 황제라면 무수한 일을 겪었을 것이고, 물에 한번 빠졌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이틀 정도 기침이나 하고, 태의가 지어준 약이나 먹으면서 침상에 한 이틀 정도 누워있으면 정상으로 회복될 일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대부대가 경성으로 돌아온 후에도 명무종의 병은 낫지를 않았다. 먼저 다음해 정월 남교(南郊)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대신들의 앞에서 피를 토한다. 그리고 곁에 있던 태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짐의 병때문에 안되겠다." 그리고 태감을 시켜 신하들과 자신의 모후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게 하고, 이어서 붕어한다. 

 

짧은 몇달만에 물에 빠졌던 이 젊은 황제는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명무종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다음번 황제를 누구로 할 것인지가 문제로 된다. 조정의 중신들과 태후는 고민을 하게 된다.

 

이치대로라면 황위승계인을 찾아내는 것이 어려울 것은 없다. 일찌기 명나라가 성립된 초기에, 명태조는 <황명조훈(皇明祖訓)>을 반포했고, 황위계승 순서에서 "부친이 죽으면 아들이 승계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승계한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비록 명무종 주후조가 생전에 그의 부친 명효종의 유일한 아들이었지만, 명효종의 부친인 명헌종은 비록 만귀비를 총애했지만, 그래도 명효종 외에 최소한 10명의 황자를 남겼다. 명효종보다 약간 어린 황자가 바로 명헌종의 넷째아들인 흥원왕(興元王) 주우원(朱祐杬)이었다.

 

다만 이때, 흥원왕 주우원은 이미 죽었고, 그의 왕위는 차남 주후총(朱厚㷓)이 승계했다.

 

이렇게 하여, 주후총은 대명의 황위계승자가 된다.

 

1

 

경성에서 황위승계자에 대한 논의가 분분할 때, 당시 호광 안륙주(지금의 호북성 종상시)에 있던 흥왕 주후총은 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명무종이 죽기 5일전에, 그는 막 경성에서 온 성지를 받아들었고, 그로 하여금 조기에 상복을 벗고 이미 2년전에 사망한 부친을 승계하여 안륙주에서 새로운 흥왕에 오르도록 명했다.

 

대명의 법도에 따라, 흥왕과 같은 세습번왕은 평생 유일하게 할 수 있고, 해야하는 일이 그저 잘 먹고, 아이를 많이 낳으며 종친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다. 화만 당하지 않으면 평생 원만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나이 겨우 15살의 그를 점찍었다. 그가 겨우 흥왕으로 5일만에 다시 승급하여 대명왕조의 '구오지존(九五至尊) 즉 황제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겨우 왕으로서의 경력이 5일밖에 없던 주후총은 흐리멍텅한 주군이 아니었다. 2년전 부친이 사망한 후, 그는 이미 왕부에서 흥왕세자의 신분으로 실무를 해보았다. 명나라조정에서 사자가 와서 주후총을 경성으로 모셔가 황제에 옹립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소년은 금방 새로운 역할에 적응한다.

 

명무종의 생모 자수황태후(慈壽皇太后)와 내각수보 양정화(楊廷和)는 미리 계획한 바에 따라, 주후총을 북경성으로 모셔온 후, 먼저 동화문으로 입궁하여, 문화전에 기거하게 한 후, 길일을 택해, 문무백관들의 권유를 받아 황태자의 신분으로 등극하게 하려 했다. 이렇게 하면 주후총은 황태후의 친아들이 아니므로, 명목상으로 보면, 그는 사실상 자신이 흥헌왕의 일맥에서 명효종의 양자로 입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황제가 바뀌더라도, 자수황태후는 여전히 황제의 모친이고 여전히 원래의 대우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아직 경성에 도착하지 않은 주후총은 이미 그의 총명한 일면을 드러낸다.

 

조정의 게획을 그는 완전히 부정한다. 먼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대명의 신하들에게 '하마위(下馬威)'를 보인 것이다. 당초 양정화가 초안한 조서를 보고 한 마디 한다: "유조(遺詔)에는 내가 황제위를 승계한다고 되어 있지, 황자가 된다고 되어 있지 않다." 너희가 조정에서 상의한 결과는 본왕으로 하여금 경성으로 와서 황제위에 오르라는 것이 아니었느냐, 그런데 왜 지금은 다시 황태자로 고치는가. 말에 신의가 없지 않은가.

 

비록 주후총이 양정화에 의해 준비된 등극방식을 무시했지만, 이미 4명의 황제를 모시고, 명무종의 유명을 받아 조정을 총괄하고 있던 양정화도 보통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주후총은 한번도 용상에 앉은 적이 없는 그저 번왕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설사 이후 황제에 오른다고 하더라도, 그저 10여세의 어린아이일 뿐이다. 조정에서는 고립된다. 그와 같이 조정에서 수십년 구르고 복잡다단한 관계망을 가진 '늙은 여우'와 대항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웃기는 일이다. 그리하여, 양정화는 예부에서 준비한 의식으로 진행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주후총은 그런 모습을 보자 명을 내려 수레를 멈추게 하고,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

 

이런 들어보지도 못한 힘겨루기과정에서 주후총은 아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신은 대명천자이다. 만일 양정화가 끝까지 자신과 싸운다면, 결국 손해보는 것은 그 자신일 것이다.

 

나라에는 하루도 임금이 없을 수 없다. 이런 이치는 모두 알고 있다.

 

그 주후총이야 돌아가더라도 그냥 편안하게 왕야로 한평생 지내면 되는 것이지만, 우국우민의 대신들에게는 적절한 황제를 옹립하지 못한다면 그 죄는 엄청나게 클 것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대치한 후, 자수황태후의 의지(懿旨)가 대치국면을 타파해준다. 그녀는 서로 논쟁을 멈추고 먼저 미래의 황제를 경성으로 들인 다음에 얘기하라고 한다.

 

2

 

정덕16년(1521년) 사월 이십일일, 주후총은 여러 신하들의 권유하에 자금성의 정문 대명문으로 황성에 진입한다. 그리고 봉천전(태화전)에서 등극한다. 역사에서 가정제로 불리는 황제이다.

 

이 예절법도는 완전히 황태자가 황제로 등극하는 절차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양정화등은 비록 불만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드러내서 말하기는 곤란했다.

 

가정제가 등극한 후, 이 '부친이 죽으면 아들이 이어받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는다'는 이슈를 놓고 논쟁이 계속되고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더 커졌으며 온 조정이 논쟁을 그치지 않게 되는 "대예의(大禮儀)사건"으로 비화된다.

 

소위 "대예의"는 가정제 등극후의 각종 예의제도에 대한 토론이다. 여기에는 황제의 연호등 기본적인 예의규정외에, 도대체 누가 가정제의 부모인가 하는 것이 가장 골치아픈 이슈였다.

 

처음에 황위에 등극한 가정제는 시종 자신은 흥왕에서 왔고, 흥헌왕이 자신의 부친이고, 흥헌왕비가 자신의 모친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가정제가 즉위하기 전에, 조정에서 당시 아직 왕야이건 주후총에게 동화문으로 입궁하여, 황태자의 신분으로 등극하도록 요구한 것처럼, 수보 양정화와 대신들은 시종 황제가 되려면 "대종불가절(大宗不可絶)"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즉 원래의 명나라의 황위가 전승되어 온 것처럼, 계속 전승되어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명효종이 명무종에게 전위하고, 명무종은 아들이 없으므로 가정제에게 전위했다. 그렇다면 가정제는 반드시 명효종의 의발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황제 신분을 유지하는 사람은 명나라의 대종이 끊이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정화가 이렇게 하는 것은 아마도 문관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명효종 시기에, 문관들의 지위가 크게 제고되고, 명효종은 그들이 하는 말이라면 다 들어 주었다. 군신간에 서로 화목하게 지냈다. 명효종이 죽은 후, 문관들은 속속 그는 그들이 본 대명황제중 유일한 "성군"이라고 말하였다. 명효종의 계승자인 명무종은 부친처럼 문관들을 신임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문신들과 싸웠다. 예법에 도전하는 각종 방식을 써서, 문신들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다만 양정화가 고집하는 것은 확실히 기본적인 인정에 어긋나는 것이기도 하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어제까지 다른 집의 아들이었는데, 오늘 갑자기 생부와 생모를 부친 모친이라고 부르면 안되고, 이제부터는 백부의 아들이다. 그러니, 이후부터는 너의 생부를 숙부라고 부르고, 너의 생모를 숙모라고 불러야 한다고 한다면, 아마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하물며 가정제는 어떠했겠는가.

 

자연스럽게 이렇게 강압적인 요구를 가정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15년의 인새을 모두 지방에서 왕야로 지내지 않았는가.

 

양정화를 위시한 대신들은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았다. 예부상서 모징(毛澄)등 60여명의 문무대신들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황제에게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그러면서, "이의가 있는 자는 간사한 자이니, 마땅히 참해야 한다"고 쓴다. 일시에 막 등극한 가정제에게는 엄청난 압박이 된다.

 

그러나, 이 핵심문제를 정말 아무도 해결할 수 없을까?

 

아니었다. 양정화가 초안한 명무종의 유조는 가정제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기회를 주었다.

 

이 유조는 비록 명무종의 구술이 아니지만, 글자는 분명히 "준봉조훈형종제급지문고어종묘(遵奉祖訓兄終弟及之文告於宗廟)"(조훈을 받들어 형이 죽으면 동생이 승계한다는 글을 종묘에 고했다). 이건 엄숙한 문제이다. 유조에 언급한 조훈은 바로 주원장의 <황명조훈>을 가리킨다. 그 안에는 분명히 '형이 죽으면 동생이 승계한다'는 문구가 있다. 그외에 이 일을 유조에서는 이미 '종묘에 고했다'고 하였다. 종묘에 고했다면 확정되고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문무백관은 다 알고 있다 종묘에 세워진 패위는 모두 돌아가신 황제들이라는 것을.

 

제도와 법률의 각도에서 보자면, 명무종의 이 유조는 그게 황제 본인의 의사이든 아니든간에 이미 고칠 수 없는 법률효과가 있다.

 

그러므로, 막 관료사회에 진입하여, 예부에서 실습하고 있던 장총(張璁)은 감히 수도 양정화에 대들 수 있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명효종의 후사를 잇는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지 않았다. 미리 황태자로 세워져서 궁안에서 길러진 경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그 말에 숨은 뜻은 수보 양정화가 처음에 초안할 때 부주의했다는 것이고, 지금 뒤집고 싶어도 그게 그렇게 쉽겠느냐는 것이다.

 

확실히, 수보 양정화가 부주의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직 명효종의 아들로 황위를 승계시키고 싶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던 그는 다른 한편으로 마음 속으로 죽은 전황제 명무종은 무시했다는 것을 반영한다.

 

장총의 그 말을 들은 가정제는 크게 기뻐한다. "그 말이 나오는 바람에 우리 부자는 온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은퇴한 전임대학사 양일청(楊一淸)도 한 마디 한다. 장총의 이 말은 비록 성인이 나타나더라도 헛점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3년간 논쟁을 벌인 '대예의'문제는 가정제의 뜻대로 집행된다. 흥헌왕을 '본생황고공목헌황제'로 받들고, 명효종을 '황백고(皇伯考)'로 칭하게 되며, 자수황태후는 소성황태후(昭聖皇太后)고 개칭되며, "황백모(皇伯母)"로 칭한다. 흥헌왕비는 장성황태후(章聖皇太后)가 되어 "성모(聖母)"로 칭해진다.

 

양정화를 지지하던 관리들은 좌천되거나, 하옥되어 고문당한다. 심지어 16명은 황제의 분노를 사서, 정장(廷杖)을 맞고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양정화에 대하여는 가정제가 그래도 체면을 어느 정도 세워주어 스스로 물러나게 한다.

 

이후, 양정화는 죽을 때까지 조정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대신들과의 싸움을 통해서 가정제는 자기 편이 아무도 없던 상황에서 점점 세력을 가지고 안정을 얻으며, 진정한 대명의 군주가 되어 간다.

 

3

 

가정제는 처음부터 도교를 숭상하고 장생불사를 추구하던 혼군(昏君)은 아니었다.

 

번왕에서 황제로 대통을 이은 그는 처음에 황제에 올랐을 때는 함부로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 황권교체로 인한 조정의 혼란외에 수재, 가뭄이 연이어 발생했다. 만일 조금만 처리를 잘못하면 왕조가 위태로워질 상황이었다.

 

위기가 사방에 숨어 있는 국면하에서, 가정제가 당시의 내각수보 양정화에게 지시하여 초안한 즉위조서의 내용도 명나라의 다른 황제들과는 달랐다. 태평성대에 일반적인 수성지군의 즉위조서는 그저 형식적이다. 다만 가정제의 즉위조서는 7천여자에 이른다. 대명제국의 모든 면을 언급한다. 그 본인의 뜻에 따르면, 최종결론은 이러하다: 흥도치치(興道致治)하려면, 반드시 혁고정신(革故鼎新)해야 한다"

 

짐이 등극한 후 폐해를 제거하고 대명을 중흥시키겠다는 의미이다.

 

사실상 진정 대권을 장악한 후 한동안 가정제는 정치에 집중하는 자태를 보인다. 명무종의 재위기간 보였던 마음대로 장난하는 듯한 모습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즉위전반기 거의 매일 사경에 일어나서 일을 처리했고, 날이 밝기 전에 여러 신하들과 아침조회(早朝)를 연다. 어떤 때는 너무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는 바람에 대전이 어두워서 촛불을 켜야만 했다.

 

그는 또한 사람을 시켜 명효종시기의 '오조(午朝)'를 연다. 여러 방법으로 대신들과의 거리를 가깝게 하려 했고 많은 보고를 받아, 국가대사를 이해하려 했다.

 

언관들이 말을 충분히 하고, 다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가정제는 대외적으로 이렇게 선언한다: "급사중, 어사직은 말을 해야 한다. 이후 조정의 정무에서의 득실과 천하군민의 이폐는 직언하고 숨기지 말라."

 

이런 상황하에서, "언로를 크게 열었고, 진언하는 사람의 말이 과격하더라도 황제는 받아주었다." 한때 대신들은 가정제가 분명 제2의 명효종이라고까지 여기게 된다.

 

문관들에 있어서, 가정제는 아마도 어떤 방면에서는 우대해주어서, 이전의 명무종때보다는 많이 낫다고 여겨졌다.

 

다만 이 젊은 가정제에 있어서, 이는 그가 번왕의 역할에서 제왕의 역할로 변신하는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그가 등극하기 전에, 대명에서 번왕으로 있다가 대통을 이은 경우는 경태제(景泰帝) 주기옥(朱祁鈺)뿐이었다. 주기옥이 등극할 때, 그에게는 형인 명영종(明英宗) 주기진(朱祁鎭)이 몽골 오이라트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주기옥의 등극과 가정제의 이번 등극은 모두 위기하에 황위를 넘겨받은 것이다.

 

비록 가정제의 황위를 빼앗고자 하는 자는 없었지만, 전황제를 모시던 구신들과는 잘 알지 못했고, 은원도 없다. 그것이 그에게는 큰 약전이었다. 그러므로 조회를 더 많이 열고, 언로를 널리 개방한 것은 구신들을 회유하다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자신의 이미지를 제고하려는 측면은 있었다.

 

4

 

이러한 기초 위에서, 가정제는 문관과 환관관의 당쟁국면의 균형을 맞추기 시작한다.

 

여기에 문무관리들 특히 내각의 중신들은 적극 지지한다.

 

황제가 재상을 페지한 후, 여전히 국가를 다스려야 했고 내각은 점점 명나라 황제들이 국가를 관리하는 '도구'가 된다. 단, 내각이 출현하면서, 황제의 나태는 극한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황제의 말을 전하는 책임을 지는 태감의 권력이 갈수록 커졌다. 태감들이 성지를 전달하면서, 내각에 명령하는 권력을 쥐게 되면서 태감과 문신듸 당쟁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명나라의 환관은 지방에 재직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를 '진수태감(鎭守太監)'이라 한다. 진수태감의 직권은 원래 군사를 감독하는 것이고, 관리의 병권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명영종때부터, 진수태감은 점점 지방사무에 관여하기 시작하고, 사회치안을 교란시켜 위해가 커졌다. 특히 명무종의 재위기간동안 대환관 유근(劉瑾)은 조정대신들에 대항하기 위해 이런 기풍을 지방에까지 퍼트린다. 진수태감들은 하나하나 모두 현지의 '토황제'가 된다.

 

가정제가 아직 세자로 있을 때, 이런 상황을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즉위후에 바로 처리하지 못한 것은 기반이 튼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황위가 안정되자, 이런 지방의 '해충'은 즉시 가정제가 정리해야할 대상으로 떠오른다.

 

가정제의 뜻을 잘 아는 장총은 평소에 만나서 아뢰는 기회에 황제에 제안한다. 각지의 진수태감을 철수하도록 하자고. 가정제의 또 다른 심복인 계악(桂萼)도 명확히 지적했다. 진수태감제도는 명태조가 건국초기에 만든 조제가 아니니 폐지해야 한다고.

 

그리하여,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게 된 가정제는 과감하게 가정8년(1529년) 태감이 지방에 진수하는 것을 폐지한다.

 

조정내에서 환관의 권한이 너무 커진 것에 대하여도 가정제는 아주 엄격한 조치를 취한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가정제는 즉위후 전황제떄부터 내려온 궁중태감들에 대하여 엄히 단속했다고 한다. 만일 죄를 범하면, 맞아죽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일벌백계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가정제는 자주 죄가 있는 환관을 때려죽인 후, 성벽에 수급을 걸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도록 했다. 이렇게 하니, 이전에 위세를 떨치던 태감들도 가정제를 만나면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다.

 

가정제는 그러나 냉혹한 사람은 아니다. 흥왕세자시대부터 그를 볼봐주던 태감들 예를 들어 황금(黃錦)등은 그가 심복으로 여기고 중임을 맡긴다. 이들은 나중에 모두 가정제가 20여년간 조회에 나가지 않을 때 황제의 말을 전하는 전달자가 된다.

 

5

 

가정제가 재위 전기에 통치로 명왕조는 상하가 완전히 새로워진다. 민간의 수공업과 상품경제가 번성하고, 소설, 화본, 종이생산과 인쇄산업등 문화교육시장도 크게 발전한다.

 

다만 뼛속부터 가정제는 도교에 대한 숭배와 장생불사의 추구를 가지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철저히 권력을 장악한 후 어느 정도 실적이 나타나자, 바로 정신이 해이해지게 만든다.

 

유, 불, 도의 삼교중에서 가정제는 유독 도교를 좋아했다. 이는 그의 어릴 때 생활경험과 관련이 있다.

 

모두 알다시피 도교는 형초(荊楚)일대에서 탄생했다. 장강중류지역에 많은 신도를 보유하고 있다. 가정제는 어려서부터 안륙주에서 생활했는데, 이곳은 호광에 속한다. 바로 이 범위내이다.

 

<종상현지>에 따르면, 정덕연간, "순일도인이 현묘관에 거처했는데, 도행이 아주 높았다. 흥왕은 그와 교류했다. 하루는 선잠에 빠져 있는데, 순일도인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깨어난 후, 좌우에 물었다: '순일이 이곳에 왔었느냐? 그러자 궁중에서 세자를 낳았다고 보고해 왔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나중에 견강부회한 것일 것이다. 가정제의 탄생을 신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흥헌왕이 살아 있을 때 일상생활에서 도사들과 어울렸다는 것이고, 장생불사를 추구했다는 것이다.

 

당시, 주후총이 천리 멀리 떨어져 있는 안륙주에서 혼자 경성으로 와 황제에 올랐을 때, 비록 지존의 자리에 올랐지만, 등극때 대신들에게 위협을 받고, 혈연관계틀 논쟁하고, 제국의 재난상황등 곤란한 문제들이 ㅁ낳았다. 이는 처음 경성에 온 그에게는 여리박빙의 상황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고독, 고향생각, 가족생각등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잘아는 도교문화에 빠져서 정신의 의탁하게 된 것이다.

 

당여닣, 도교에서 말하는 장생불사는 영명했던 진시황, 한무제도 마찬가지로 빠져들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병이 많고 몸이 약했던 가정제가 도교를 좋아하는 것은 그런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일찌기 막 황제가 되었을 때 가정제는 자주 궁안에 재단(齋壇)을 설치했고, 매일 향을 사르고 기도를 들였다. 명무종은 불교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가정제가 법사를 드리는 것에 대하여 대신들은 극력 반대했다. 황제가 나쁜 것을 배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가정제의 황제위가 안정된 후, 자신이 도교를 좋아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도교숭상과 연결시킨다. 그는 조서를 내려 널리 지방에서 도행이 깊은 도사를 궁으로 불러 강의하게 했다. 예를 들어, '기도하면 바로 비가 내린다'는 강서도사 소원절(邵元節), 도중문(陶仲文)등이다. 그는 대신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서 하늘을 축수하는데 쓰는 청사(靑詞)를 많이 짓도록 권유하며, 청사를 잘 지으면 관직을 올려 주었다.

 

자료에 따르면, 가정제가 재위하는 기간동안, 14명의 내각수보 중에서, 9명은 청사를 잘 써서 결국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직위에 오른 것이다. 여기에는 대간신 엄숭(嚴嵩)도 포함되고, 명신 하언(夏言), 서계(徐階), 고공(高拱)등도 포함된다.

 

자신의 신분을 더욱 도교의 요구에 맞추기 위하여, 가정제는 스스로 '도사'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법호 "태상대라천선자극장생성지소령통원증응옥허총장오뢰대진인현도경만수제군"을 내리기도 한다.

 

더욱 괴이한 것은 가정제는 장생불사를 위해, 당시 입궁해서 강연한 도사 남도행(藍道行)의 말을 믿고 따른다. 남도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장수하려면, "정섭(靜攝)"의 방식으로 양생해야 한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반드시 해가 뜨는 것을 감상하면서 궁녀들이 전날 밤에 황제를 위해 모아온 '아침이슬'을 마셔야 한다. 왜냐하면 아침이슬에는 일월의 정화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장생불사하고 연년익수한다.

 

가정제는 아침 일찍 일어나면 아침이슬을 마시는 습관을 가진다. 그러다보니 궁녀들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를 보면 궁녀들이 가정제를 얼마나 미워했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이 전부가 아니다. 도사 도중문의 제의에 따라, 가정제는 연단을 하기 시작한다. 지순지양한 대보단(大補丹)을 만들기 위하여, 가정제는 3번이나 조서를 내려, 궁안에서 한창 청춘기인 소녀를 입궁시킨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어린 여자들의 생리기이 경혈(經血)을 얻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가정21년(1542년) 십월, 중국역사상 최초의 궁녀반란이 가정의 침궁에서 일어난다.

 

그날 두 명의 황제때문에 온갖 고생을 겪고 있던 궁녀가 자신의 주위에 잘 아는 10여명의 궁녀를 모아서, 황제가 잠을 자는 틈을 타서 용상으로 올라가, 사전에 준비한 비단으로 끈을 만들어 가정제의 목에 걸고 그를 목졸라죽이려 한다.

 

사전에 연습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기술이 부족했는지, 조작과정에서 매듭이 잘못 지어져 아무리 잡아당겨도 목이 졸라지지 않는다. 가정제는 고생은 했지만, 죽지는 않는다. 궁녀 1명이 이런 상황을 보자 바로 황후에게 보고하고, 황후가 달려와서 다행히 황제는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6. 

 

죽다가 살아난 가정제는 그런 일을 겪고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여러 해동안의 '수련'을 거쳐 가정제는 이미 도교와 하나로 합쳐진 것같았고, 피차 분리될 수 없게 된 것같았다.

 

무서운 자금성에서 도망치기 위해, 그는 아예 그의 당형인 당무종이 했던 것처럼 "정섭"을 이유로 들어 서원(즉 지금의 중남해)으로 옮겨서 거주한다.

 

집권전반기에 성실히 정무를 보며 대명의 중흥을 이끌던 황제가 이렇게 타락하는 것을 조정대신들은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가정제의 전반기의 성지를 받들어, 감찰어사 양작(楊爵)등은 "좌도혹중(左道惑衆), 성왕필주(聖王必誅)"(좌도로 무리를 혹세무민하면 성왕은 반드시 벤다)는 말로 가정제의 옛날 근정하던 내심을 일깨우고자 했다.

 

그러나, 황제가 어찌 자신이 숭상하는 도교를 방문좌도로 모는 것을 용인하겠는가. 조서를 내려 양작을 하옥시키고 구타하게 한다.

 

다만 웃기는 것은 가정21년 도교의 신을 모시기 위헤 만든 대고현전에서 나중에 화재가 발생하는데, 가정제는 불 속에서 신선에 양작은 충신이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깜짝 놀라고, 바로 조서를 내려 양작등을 석방한다. 가정제가 이렇게 많은 일을 저지른 것은 사람들에게 그와 같이 도교를 숭상하고, 황위에 복종하고, 당쟁을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다.  유학사상을 받들어온 대신들이 어찌 황제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되니 원래 대신들과의 관계가 괜찮았던 가정제는 아예 조회에 나가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대신들을 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대신들을 피한다고 하여 가정제가 대신들을 전혀 만나지 않고, 조정을 내팽개쳤다는 것은 아니다. 대신들은 매일 서면으로 황제에게 보고했고, 그는 대신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일상사무에 관한 상소외에 조정에서 가정제는 특별히 16명의 대신을 골라서 그와 조정과의 연락업무를 맡긴다. 이들은 그가 내린 특권을 누렸다. 언재든지 대신들을 모아서 의견을 듣고, 그것을 글로 적어 황제에게 올리는 것이다.

 

황제가 천하 상하를 살피는 '눈'으로 삼기 위해 금의위의 지휘사는 가정제가 어려서부터 같이 놀던 친구인 육병(陸炳)에게 맡긴다.

 

7

 

그러나, 반평생을 들여 연단을 했지만, 결국 정상적인 인간의 생로병사는 피하지 못한다.

 

가정45년 십이월(1567년 1월), 평생 도교를 믿고, 반평생 '정섭'을 한 주후총은 서원에서 붕어한다.

 

마지막 유언에서 가정제는 명무종과 같이 스스로를 반성하는 듯한 말투를 나타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저 병이 많아서, 장생불로를 지나치게 추구했고, 간사한 자들에게 미혹되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의식한 것같다. 황제로서 장생불사를 추구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틈을 노리는 자들은 항상 황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파악해서 그것을 부추긴다. 결국은 그저 유감을 남기면서 생을 마감할 뿐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가정제는 45년간 재위했고, 시간을 너무 많이 낭비했다. 이미 대명이라는 점점 침몰하는 거함을 구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