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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명)

조휘(趙輝): 중국역사상 가장 장수한 부마, 명나라 9조(朝)의 황제를 겪다

by 중은우시 2022. 6. 7.

: 도도설문사(濤濤說文史)

 

최근 몇 년간 전통적인 한문화를 젊은이들이 갈수록 더 좋아하고 있다. 원래 TV를 수십년동안 차지하고 있던 청나라궁중드라마가 많이 줄어들었고, 명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드라마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최근 비교적 인기리에 방영된 <산하명월> 그리고 이전의 <대명풍화> 그리고 오랫동안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던 <대명왕조1566>.

 

봉건왕조중 가장 마지막 한족통치의 왕조로서, 명나라는 독보적인 매력이 있다. 명나라는 끝까지 화친하지도 않고, 투항하지도 않으면서 천자가 국문을 지켰던 왕조이다.

 

대명은 후세에 많은 보물을 남겼다. 예를 들어 4대명저, 본초강복, 그리고 수많은 문인, 장수. 예를 들어 왕양명, 탕현조, 서하객, 이시진등등.

 

그외에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전설적인 인물도 있다. 예를 들어 9명의 황제를 겪은 부마 조휘. 명나라의 16명의 황제중에서 그는 절반이상을 만난 것이다. 역사상 기록에 남아있는 유일무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1476, 성화22년 삼월, 명헌종 주견심(朱見深)은 한 상소문을 본다. 부마도위 조휘가 병사했다는 내용으로 예부에서 어떤 규격으로 장례를 치를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부마도위는 한나라때 최초의 직책은 황제가 외출할 때 마차를 모는 것을 책임지던 관리였다. 이 직위는 많은 경우 종친이나 외척이 맡았고, 영예를 상징했다.

 

후세에 왕조가 교체되면서, 명나라에 이르러, 부마도위는 단지 공주의 남편에 대한 칭호가 된다. 아무런 실권은 없고, 5품에 속하는 한직인 관직이다.

 

황제에 있어서, 이 품계의 관리는 너무 많다. 그리고 실권도 없는 부마도위는 조정에 얼굴을 드러내는 경우도 아주 적다. 그래서 그는 이 상소문에 나오는 조휘에 대하여 그다지 인상이 남아있지 않았다.

 

황제는 상소문을 읽으면서 어느 부마도위인지 물어보았다. 신하는 태조황제의 따리 보경공주(寶慶公主)의 남편이라고 말한다. 그제서야 황제는 속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1368년 명나라의 개국황제 주원장으로부터 명헌종에 이르기까지 명태조, 명혜종, 명성조, 명인종, 명선종, 명영종, 명대종, 명경제(명대종과 같음), 명헌종의 9 8명의 황제를 겪은 것이다.

 

당금황제인 명헌종은 명나라의 8번째 황제이다. 명나라는 전후로 16명의 황제가 있었으니, 그는 절반의 황제를 겪은 것이다.

 

9조의 황제중 여러 번 황권교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명성조 영락제 주체가 명혜종 건문제 주윤문으로부터 황위를 빼앗는 일이 벌어졌고, 토목보의 변 이후에 황위는 주기진과 주기옥 두 형제간에 두번 오갔다. 세상에는 일조천자일조신(一朝天子一朝臣)이라는 말이 있다. 하물며 이처럼 부자간에 황위가 승계되는 정권교체가 아니면, 많은 조정신하들은 2개이상의 조대를 견디기 힘들다. 그러므로 조휘와 같은 경우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명나라때 부마도위는 황실의 종친이고, 사망을 ()”이라고 표현했다. 명나라의 제도에 따르면, 문관이 사망하면 그의 생전의 공적과 지위에 따라 그를 위해 제문을 짓고, 시호를 내리며 사당에 제사지내고, 황제는 하루 조회를 열지 않고 애도를 표한다.

 

조휘는 홍무20(1387)에 태어났다. 사망했을 때는 89세의 고령이었다. 비록 생전에 공적은 별로 없지만, 어쨌든 배분이 높고, 지위도 존귀했다. 그래서 명헌종은 조회를 하루 열지 않고 존중을 표시한다. 이는 조휘에게는 최대의 예우였다.

 

중국역사상 보기드문 구조부마도위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는 역사상 자료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장수한 부마이다. 후세에 그에 대한 평가중 가장 자주 보는 것은 명나라때 인문전기자료선집인 <국조헌징록>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됨이 위엄있고, 문학을 잘하며, 현인과 선비들을 예로 잘 대했다. 다만 호화사치했으며 오래 살았다. 그가 양생술을 얻었다고 말한다….”

 

짧은 몇 글자에서의 평가는 좋은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공과가 모두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이 부마에 대하여 알기는 부족하다. 그에 대하여 좀더 이해하려면 먼저 그의 부인 보경공주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명나라 홍무28년 이월초하루. 유명한 남옥사건이 발생한지 겨우 2년이 지났다. 전체 명왕조는 만여명이 연루된 이 모반사건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67세의 주원장은 더더욱 내정의 변고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날로 노쇠해가는 나이에 그는 무엇인지 모를 두려움도 느꼈다.

 

이때 응천부의 내관이 좋은 소식을 전해왔다. 장비(張妃)마마가 공주님을 낳았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얻은 딸은 이 노쇠한 황제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그는 자신의 말년의 애정을 이 어린 공주에게 모두 쏟았고, 그녀를 아주 총애했다. 어린 공주의 순수한 모습은 평생동안 남을 의심하며 살아온 주원장에게는 얻기 힘든 따스함과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3년후, 주원장이 사망한다. 그는 개국황제로서 공신들을 많이 죽였고, 호유용사건과 남옥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연루된다. 그리고 재상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중앙집권을 이룬다. 이렇게 황제의 지고무상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지배욕이 극히 강한 황제는 죽기 전에 하나의 명령을 내린다. 모든 후궁비빈을 순장하라는 것이다. 다만 그는 유독 보경공주의 생모인 장비만 남겨둔다. 유일한 원인은 그는 나이 겨우 3살인 딸때문이다. 이를 보면 그가 보경공주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장비도 병사한다. 나이어린 공주는 연이어 부모를 모두 잃는다. 그후 건문제 주윤문이 즉위하고 자신의 후궁에게 이 나이 어린 고모를 양육하게 한다.

 

4년후 정난지역이 발생하고, 주체의 군대가 밀고 들어온다. 일시에 응천부의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궁녀와 비빈들도 도망갈 사람은 도망가고 죽임을 당할 사람은 죽임을 당했다. 8살된 어린 공주는 궁녀들의 보호하에 이 겁난을 지나갈 수 있었다. 이어서 명성조 주체가 즉위하고, 이 어린 여동생을 자신의 처인 서황후에게 보살피도록 보낸다.

 

보경공주는 천진하고 활발하며, 단순하고 귀여웠다. 서황후는 현숙하고 덕이 있어 힘껏 그녀를 보살펴준다. 그래서 어린 공주에게 어머니 같은 사랑을 준다. 서황후가 사망한 후, 보경공주는 크게 통곡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이들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은 매우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체도 이 어린 여동생을 좋아했다. 그래서 보경공주는 걱정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다.

 

어느 순간 보경공주는 어른이 된다. 부모 같은 주체와 서황후는 세상의 모든 부모들처럼 보경공주의 혼사에 신경을 쓴다. 공주의 후반생의 행복을 위하여 그들은 심혈을 기울여 부마를 고른다.

 

태조황제는 이런 규정을 만든 바 있다: “부마는 관직에 오를 수 없다. 그 자식은 경사의 관직을 맡을 수 없다.” “부마의 부친이 관직에 있으면 승진을 시킨 후 관직을 물러나게 한다.”

 

그 의미는 분명하다. 만일 한 사람이 부마가 되면, 그의 형제는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그의 아들은 경성에서 관직을 지낼 수 없다. 만일 부마의 부친이 관리이면 반드시 은퇴해야 하며, 실권없는 명호만 남기게 된다. 공주의 남편이 될 정도로 인품도 뛰어나면서, 관직을 탐하지 않는 사람을 구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데 우연찮게 적당한 인물이 나타난다. 한번은 명성조 주체가 금천문의 수비장수 조휘를 만났는데, 그는 용모도 당당하고, 비범했다. 그래서 자신의 막내여동생과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그의 신분을 물어본 후에 혼사를 결정하게 된다.

 

조휘의 부친 조화(趙和)도 군인이었다. 천호장의 직위로 명군을 따라 안남을 원정갔다가 전사한다. 조휘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열의 후예이다. 대명의 제도에 따르면 부친의 직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고 그리하여 금천문의 천호가 된다. 하급관리라 할 수 있다.

 

부마가 되는 것은 조휘에 있어서 더할 나위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는 기꺼이 이 혼사를 받아들인다. 이때 18살의 보경공주는 이 젊은 군인에게 아주 만족했다. 그리하여 주체는 두 사람의 혼사를 서두른다.

 

혼례때, 적친공주의 규격으로 행해졌고, 주체는 태자 주고치로 하여금 공주부로 모셔가게 한다. 태자는 미래의 태자이다. 이를 보면 주체는 어린 여동생에게 최고의 예의로 혼사를 이뤄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한쌍의 부부는 결혼후 서로 애정이 깊었다. 신분이 높아졌으므로, 계속 사람들이 찾아와서 인사를 하니 조휘로서는 전에 느끼지 못한 영광을 느꼈고, 이 모든 것을 가져다준 보경공주를 아주 살뜰히 보살폈다.

 

나중에 주체가 죽은 후, 태자 주고치가 즉위한다. 조휘는 황제의 고모부가 된다. 주고치의 시호는 인종이다. 그는 인후하기로 유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어린 고모에게 아주 잘 대해주었고, 조휘도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명인종은 재위 1년도 되지 않아 붕어한다. 그리고 명선종 주첨기가 즉위한다. 조휘와 공주는 조정의 일은 잘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세상의 일과는 상관없이 청한한 생활을 지낸다. 그래서 오히려 편안하고 안정되게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무상으로 선덕8년 정월 십일일, 나이 겨우 39세의 보경공주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2년후에는 명선종도 세상을 떠난다.

 

공주가 젊은 나이로 죽으면서 20년간 같이 살았던 부마 조휘는 공주의 죽음에 그다지 슬퍼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이미 황제의 고조부로 여러 해동안 이미 몸값이 올랐고, 아마도 이미 결혼생활에 더 이상 흥미를 잃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일찌감치 변심했을 수도 있다. 다만 공주가 살아있을 때는 거리낌이 있었지만, 공주가 죽자 그는 원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명선종 주첨기가 붕어한 후, 명영종이 즉위한다. 조휘는 남경의 좌보사가 된다. 매년 조정을 대표하여 명효릉(주원장의 능묘)로 가서 역대군왕에 제사를 지내는 일을 한다. 비록 관직이 높거나 녹봉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정의 대변인으로 가는 곳마다 존중을 받았다.

 

대명의 율력에 따르면, 명나라때 부마는 실권있는 관리가 될 수 없을 뿐아니라, 절대로 첩을 들일 수도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형벌을 받는다. 다만 이때 공주는 이미 죽었고, 그는 조정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더 이상 구속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조휘는 방종했고, 여색을 탐했다. 젊은 시첩을 하나 둘 집안에 들이기 시작한다.

 

<명사>기록에 따르면, 조휘의 집에는 명분있는 시첩만 백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집에 들이지 않은 청루여자들은 포함시키지 않은 숫자이다. 그는 매일 이들 여인들 속에서 술마시고 연회를 즐기면서 살았고, 황실의 체면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명선종이후의 몇대의 황제는 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다. 내우외환이 겹치고, 모두 그보다는 배분상 아랫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사생활을 그다지 간섭하지 않았다. 조휘는 더욱 거리낌없이 풍류생활을 즐긴다.

 

이 시기의 조휘는 이미 70여세의 노인이다. 오랫동안의 방종한 생활로 몸이 축나고 결국 수명에도 영향을 준다. 그런데도 그는 89세까지 살았다. 젊은 후배들이 하나둘 죽어가는데도 그는 살아남았다. 이것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는 양생술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바로 방사에게서 얻은 연년익수의 방법이다. 여자의 월사(月事)에 기와 혈을 보하는 중약 자하거(紫河車)를 함께 먹는 것이다. 이런 토나오는 짓은 들어본 적도 없다. 다만 조휘는 한편으로 방종호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건강과 장수를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고대의 황제들이 꿈에도 그리던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조휘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공주를 취해서 졸지에 황실의 종친으로 영화부귀를 누린다. 9조의 황제를 거치면서 가장 장수한 부마가 된다. 후세의 우리들이 보기에,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좋은 면들이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 영화가 있으면 오욕도 있다. 아마도 그 중의 쓴맛은 당사자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