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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팔국연합군": 중국에 의해 가장 심하게 왜곡된 역사

by 중은우시 2021. 1. 9.

글: 유기곤(劉淇昆)

 

팔국연합군의 전투는 중국에 의해 가장 심각하게 왜곡된 중국근대사이다.

 

팔국연합군이 왜 북경으로 진군했는가? 두 마디로 개괄할 수 있다: (1) 청나라조정이 서방각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이 전쟁은 청나라조정이 일으킨 것이고, 서방각국은 응전했을 뿐이다), 외국연합군은 대고구(大沽口)에 상륙하여, 경성으로 진격했다. 이건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닌가. (2) 서방각국은 중국을 멸망시킬 생각은 없었다. 북경에 진군해서, 청나라조정에 압력을 가하는 외에, 주로 경성에 갇혀 있던 각국 외교관과 선교사들을 구했다.

 

글쓰는데 편의를 위해 먼저 이 전쟁의 이름을 제대로 붙이기로 하자. "팔국연합군"은 전쟁의 이름이 될 수 없다. "팔국연합군침화전쟁"은 흑백이 전도된 말이고, 역사를 강간하는 것이니 본인은 절대로 채용할 수 없다. 만일 '갑오전쟁'의 명명법을 따른다면, 이번 전쟁은 마땅히 '경자전쟁(庚子戰爭)'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이 경자년에 발생했고, '경자지란(庚子之亂)'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경자지란은 권비(拳匪)에서 시작된다. "권비"는 의화단(義和團)의 가장 정확한 칭호이다. 그 우두머리인 이내중(李來中), 장덕성(張德成), 조복전(曹福田)등과 핵심인물은 말그대로 토비(土匪), 건달, 사기꾼이다. 그들은 외국의 선교를 반대하고, 서양인과 이모자(二毛子, 매국노)를 제거한다는 것을 명목으로, 소란을 일으키고, 악행을 저질렀다. 청나라조정(서태후)는 그들의 '도창불입(刀槍不入, 칼이나 총을 맞아도 죽지 않는다)'이라는 사기술에 속아서, 의화권을 이용하여 서양인을 몰아내려고 생각한다. 의화권은 그리하여 '부청멸양(扶淸滅洋, 청나라조정을 도와 서양인을 없앤다)'이라는 구호를 내놓는다. 권비는 교회를 불지르고, 외국선교사와 중국인기독교도와 가족들을 살해하고, 철로를 파괴하며, 전선을 끊고, 서양약방을 불지르며, 서양인의 집을 약탈하고 살인방화를 저지른다. 일시에 홍색공포(권비들은 머리에 붉은 두건을 쓰고, 허리에는 붉은 허리띠를 매었다)가 북방의 몇개 성과 경성을 휘감는다.

 

'양(洋)'자가 들어가는 것은 모두 화를 입었을 뿐아니라, 정부고관, 황실인척도 권비들 앞에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권비들이 누가 매국노라고 말하면 바로 그가 매국노였다. '감별'방법은 소위 '분표(焚表)'인데, 바로 촛불에 황색종이를 태우는데 모두 타서 그 재가 날리면 '신'의 인정을 받은 것이고, 그는 화를 벗어난다. 만일 누군가를 해치고 싶다면, 분표때 살짝 장난을 칠 수 있다. 그러면 그는 겁난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권비들은 심지어 자금성 안으로 쳐들어가서 '이모자' 즉 사상이 개화되었던 광서제까지 죽이려고 한다. 공포를 만들어 내고, 미친듯이 외국인을 배척하는 것은 권비만이 아니었다. 관군들도 있었다. 외국인과 이모자를 죽이는데 눈이 벌개서, 청군은 심지어 벌건 대낮에 북경의 길거리에서 독일공사 케틀러(Clemens Freiherr von Ketteler, 1853.11.22-1900.6.20)와 일본공사관 서기관 스기야마 아키라(杉山彬, 그의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낸다)를 죽여버린다.

 

각국은 계속하여 청정부에 외교관과 선교사를 보호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청정부의 반응은 오히려 더 했다. 청정부는 서방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병사를 북경대사관지역과 서십고교당에 보내어 포위하여, 북경에 있던 모든 서방의 외교관과 서십고교당에 피해 있던 외국선교사와 교인들을 죽이고자 시도한다. 이런 정부, 이런 폭민을 혼내지 않으면 말이 되는가?

 

경자전쟁은 중국의 치욕이다. 치욕은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 아니라, 청정부와 백성들이 보여준 모습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매하고, 야만적이고, 광망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범한 엄중한 전쟁죄행이다. 이 전쟁은 인류역사상 기이한 전쟁이다. 사상유례없는 점이 6가지나 된다. 하나하나 얘기해보기로 한다.

 

첫째, 중국은 대규모로 외국선교사와 교인(중국인 기독교도)을 죽이고, 교당을 불태우고, 외교관을 죽인 후, 당시 세계의 모든 강국들에게 동시에 선전포고를 한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등 11개국이다. 수년전의 갑오전쟁때는 일본 하나도 당해내지 못하고 일패도지했었다. 지금 청나라조정은 전세계의 열강을 모두 상대하려 한다. <선전조서>에서는 각국에 대하여 "대장달벌(大張撻伐)'하겠다고 큰소리친다. 이런 우매함과 광망함은 고금이래로 선례가 있기는 할까?

 

둘째, 양국이 전쟁을 하더라도 사신은 죽이지 않는 법이다. 문명고국으로 자칭하는 중국은 경자전쟁때 최우선적인 전략목표는 바로 북경의 각국 공사관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각국의 외교관(그리고 대사관의 비호를 받는 외국선교사, 상인 및 중국인인 교인)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었다. 전쟁에서도 외국교민은 보호해야 한다. 중국정부는 공공연히 서양인을 죽이는 것에 현상금을 내걸었다: "서양인 1명을 죽이면 오십냥, 서양여자는 사십냥, 서양아이는 삼십냥의 상을 내란다" 이렇게 외교관을 모조리 죽이고, 서양인, 여자, 아이까지 죽이는 야만적이고 잔혹한 경우가, 고금에 선례가 있기는 할까?

 

셋째,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중국은 경자전쟁때 최우선 전략목표가 경성의 각국대사관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한 국가가 전쟁의 수단을 써서, 정규군이 전력을 기울여 경성의 외국공사관을 공격한다. 이는 원래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운 일이고, 순식간에 완성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한다. 결국 실패로 끝난다. 이같은 전적(패전)이 고금에 선례가 있기는 한 것일까?

 

쌍방의 역량을 대비하면 어떠할까? 외국공사관을 공격한 청군의 주력은 동복상(董福祥)의 "감군(甘軍)"이다. 여기에 경사를 호위하는 어림군인 호신영(虎神營), 신기영(神機營)이 협력했다. 동복상 휘하의 감군은 최소 27개 영(營)을 보유하고 있었다. 1개 영에 500명이라고 계산하면, 감군의 수량은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1만3천 내지 1만4천에 이른다. "공사관내에 갇혀 있던 사람은 모두 3천명이다. 그중 2천명은 보호를 요청한 중국인이다. 외국인 남성이 400명, 여성이 147명, 아이가 76명이었다."

 

병력숫자에 이렇게 큰 차이가 있었는데, 그럼 무기장비는 어떠했을까? 과거 중국이 수치를 가리는 하나의 수법은 청군은 큰칼이나 창을 들고, 서양인들은 총과 대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청정부의 군대도 정예군은 일찌감치 현대화 되어 있었다. 당시 청군의 북방주력은 '무위5군' 즉 동복상의 감군, 섭사성(聶士成)의 무의군(武毅軍), 원세개(袁世凱)의 신군(新軍), 송경(宋慶)의 예군(豫軍)등이다. 이들의 무기장비는 외국연합군에 비하여 못하지 않았다. 잊지 말아야할 것은, 갑오해전때 북양함대 군함의 톤수, 수량, 화력은 모두 일본해군보다 뛰어났다. 실제로 외국대사관을 공격한 감군의 무기장비는 공사관의 방어자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공사관의 방어자들은 겨우 '3정의 기관총과 4문의 소형화포'를 갖추고 있을 뿐이었다.

 

외국대사관을 오랫동안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청군은 한림원(翰林院)을 불태운다. 한림원은 영국공사관의 북쪽에 있었고, 북쪽에서 공사관을 공격하는 것이 비교적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존귀한 아문까지도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한림원만 불태웠을 뿐,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경성의 전투는 공사관지역외에, 서십교교당에서도 발생한다. 북경의 남당(南堂)은 권비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북당(北堂, 즉 서십고교당)은 외국선교사, 가족 및 많은 중국교인들의 피난소가 되었다. 북방을 공격하는 수천수만의 권비(여기에 정규군도 협력했다)들의 우두머리는 군기대신(軍機大臣) 강의(剛毅)였다. 교당이 일단 무너지면, 참혹한 사태가 벌어질 판이었다. 그러나, 서십교교당은 지켜낸다. 권비와 청군은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청정부의 군인들과 백성들이 얼마너 형편없었는지를 알 수 있는 일이다.

 

넷째, 청나라조정은 멍청하게도 11개국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외성의 독무(督撫, 총독, 순무)들 중에서 깨어있던 사람들 즉 이홍장(李鴻章), 유곤일(劉坤一), 장지동(張之洞), 원세개등은 망국의 화가 닥쳤음에도 '동남호보(東南互保)'를 결성해서 공개적으로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한다. 그들은 각 교전국들과 합의를 달성하였고, 동남의 각 지방정부는 선전조서를 따르지 않는다. 열강들도 동남지역에서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중앙정부가 전쟁을 벌이는데, 지방정부는 중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적국과 서로 보호하기로 합의한다. 이런 황당한 일이 고금에 선례가 있었을까?

 

다섯째, 경자전쟁중 교전쌍방중 일방(서방열강)은 어떤 의미에서 실제 상대방(중국)을 위한 것이었다. 청정부의 실패는 중국에게 대행운이고, 만일 팔국연합군이 실패하였다면 그것은 중국의 대재난이었을 것이다. 이것도 전쟁사상 기괴한 일이 아닌가?

 

전쟁발발 2년전인 1898년, 광서제가 주도하던 변법유신이 서태후를 위시한 수구완고파의 반대로 실패한다. 서방각국은 중국의 변법유신을 지지했고, 청정부가 정치체제개혁을 통하여 중세기의 야만국가에서 현대의 문명국가로 진화하기를 기대했다. 무술정변후 중남해의 영대에 연금되어 있던 광서제에게는 동정심을 가졌다. 광서제가 해를 입을까 우려하여, 프랑스정부는 의사를 보내어 병에 시달리던 광서제의 몸을 진료해주었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폐위시키고 싶어했고, 단친왕(端親王) 재의(載漪)의 아들 부준(溥儁)을 황제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외국사절단이 불만을 표시하여 결국 진행하지 못한다. 부준은 단지 '대아거(大阿哥)'(즉, 황위계승자)로 세워졌을 뿐이다. 유신파의 우두머리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는 영국, 일본의 도움으로 해외로 빠져나갔으며, 계속 변법유신을 고취한다. 그래서 서태후당은 이들을 심복지환으로 보았다.

 

야심만만한 단친왕 재의는 아들이 황제에 오르지 못하자, 열강에 대하여 원한을 품는다. 그의 심복은 정보를 위조하여, 열강이 서태후를 압박하여 광서제가 다시 친정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한다. 권력을 목숨처럼 여기던 서태후에게 그것은 하늘이 무너질 일이다. 그래서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해야 했고, 신통광대하다고 알려진 권비를 이용하여 서양인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전쟁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 전쟁의 원인을 분석해보자. 전쟁의 결과를 놓고 보면, 중국정계의 완고파를 제거했다. 예를 들어, 재의, 재란(載瀾), 재훈(載勛), 영년(英年), 조서교(趙舒翹), 계수(啓秀), 육현(毓賢)등. 이것은 <신축조약>의 중요내용이다(강의와 서동(徐桐)은 이때 이미 죽었다). 그래서 그후 청말의 헌정개혁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었다. 중국정계에서 쓰레기들을 청소하는 동시에, 서방각국은 조약협상때 청나라조정에 서태후에 의해 죽임을 당한 허경징(許景澄), 원창(袁昶), 서용의(徐用儀), 연원(聯元)등 5대신의 명예를 회복시키게 했고, 원직에 복귀시킨다. 이들 충의인사들은 개인의 안위는 신경쓰지 않고, 외국에 선전포고하거나 외국인을 죽이거나 공사관을 공격하는 것에 반대했다. 청나라정부에서 간신을 제거한 것은 팔국연합군이 압박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만일 팔국연합군이 실패했더라면, 서태후, 단친왕과 권비는 하고싶은대로 했을 것이다. 중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청나라조정은 서방각국과 일체의 외교관계를 끊었을 것이고, 서방각국과의 무역왕래도 단절했을 것이다. 모든 서양인들은 죽이거나 축출하고, 서방에서 들어오는 공업기술도 배척했을 것이다. 중국의 반세기여동안 지속된 '양무운동'은 물거품이 되고, 중국은 다시 폐관고수, 중세기의 야만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렇게 보면 팔국연합군의 승리는 중국역사의 도퇴를 막아낸 것이다.

 

청정부는 경자전쟁때 엄중한 전쟁범죄를 저지른다: 패전이후, 서방열강은 중국에 대한 태도는 관대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악독하게 핍박하지 않았다. <신축조약>협상과정에서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고, 논쟁이 치열했던 것은 조약제2조 '징판화수(懲辦禍首)'였다. 전쟁의 최종책임자는 당연히 서태후이다. 그것은 분명한 일이다. 다만 서태후에 대한 여하한 징벌은 물론이고, 서태후에 대한 여하한 비난도 청정부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서방열강은 최종적으로 청정부의 최고통치자에 대한 최후의 선을 지켜주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만일 서방각국이 서태후에게 죄책을 지도록 끝까지 요구하고, 광서제가 복귀하게 하였더라면(이것은 계속하여 각국의 바램이었다), 중국은 어떤 국면이 되었을까? 이 점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열강이 청나라조정에 압력을 좀더 강하게 행사했더라면 될 수 있었다. 자연히 서태후는 끝까지 항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청정부와 중국과 함께 순장하고 싶어해도, 그녀는 그럴 수가 없다. 청나라의 귀족, 조정중신, 외성독무들은 결국 그녀를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광서제가 친정하고, 헌정개혁을 주도한다면, 중국의 역사는 다시 쓰여질 수 있었다. 명치유신이 일본에 기적을 창조한 것처럼 중국에서도 기적이 발생할 수 있었다. 중국인민이 20세기(지금까지)에 받은 고난은 아마도 회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방각국은 죄악이 큰 전범 단친왕 재의에 대하여 청나라조정에 처형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황실귀족이어서, 청나라조정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서방각국은 차선책으로 '가짜사형' 즉 참감후(斬監候)를 요구한다. 그러나 청나라조정은 이것도 거절한다. 결국 재의는 평생 권금(圈禁, 집안에 연금당하는 것)당한다.

 

어떤 사람은 <신축조약>에 규정한 사억오천만냥의 배상금에 대하여 불만이 많다. 전승국이 전쟁배상금으로 돈을 벌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쟁배상금은 일반적으로 전승국의 군비에 대한 보상이다. 전쟁의 비용은 여러가지가 있다. 특히 해외에서 전투를 하려면 그러하다. 경자전쟁에서 청나라조정은 11개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8개국이 참전했다. 각국의 군비를 합치면 당연히 적은 숫자가 아니다. 경자배상금으로 유일하게 이익을 얻은 나라는 러시아이다. 러시아는 1억3천여만을 얻어서 전쟁배상금중 29%를 가져갔다. 러시아의 전쟁지출은 1억7천만루블이다. 그런데 얻은 배상금은 루블로 환산했을 때 1억8천4백만루블이다. 수지를 상계하면 1천4백만루블의 이익을 얻은 셈이다. 미국은 경자배상금을 중국에서 교육사업을 하는데 썼다. 인의의 극치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섯째, 경자지란과 그후의 경자전쟁에서, 중국북방민중은 권비, 관군에 해를 입는다. 외국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후, 비로소 정상적인 사회질서를 되찾는다.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린 것이 외국군대가 아니라 본국군대였다. 이것도 전쟁사상 기괴한 일이 아닌가.

 

팔국연합군은 중국에서 살인, 방화, 약탈 간음등 온갖 나쁜 짓을 다했다. 이것은 중국인들이 어려서부터 중국정부에 의해 주입된 여러 거짓말중 상당히 두드러진 것이다. 이는 중국인이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짓이다. 살인, 방화, 약탈, 간음등을 한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외국군대가 아니라, 중국인 자신이었다. 팔국연합군은 훈련을 제대로 받은 군인들이다. 그들의 군기, 군법은 권비, 청군과 비교할 수조차 업쇼다. 살인, 방화, 약탈, 간음으로 백성들을 해친 것은 권비와 청군이다. 특히 전쟁후기, 일방적으로 패배할 때 더욱 그러했다. 팔국연합군이 전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북경을 점령한 후, 그들이 한 것은 질서를 유지하고, 질서를 회복시킨 것이다. 자금성은 당시 일본군대가 관할했는데,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외국군대중 군기가 가장 엉망인 것은 러시아군대였다. 러시아군대는 단독으로 출병했고, 남만주를 점령한다. 이 군대는 연합군총사령관의 지휘를 따르지 않았다. 엄격히 말해서 팔국연합군에 속하지 않는다.

 

청군중 군기가 가장 엉망인 것은 동복상의 감군이었다. 동복상은 토비출신이고 회족이다. 그가 지휘하는 '회자병(回子兵)'은 군기가 엉망진창이었고, 악명이 높았다. 병비일가(兵匪一家, 군인과 토비는 한통속이다)라는 말이 헛된 말이 아니다. 7월 21일 팔국연합군이 경성을 점령하는 날, 동복상은 병력을 이끌고 약탈을 벌인다. 창의문을 나와 서쪽으로 갔는데, 동복상 개인은 백만냥이상의 재산을 모은다. 청군의 부패로, 경자전쟁에서 기본적으로 일촉즉궤(一觸卽潰), 한번 부딛치면 바로 궤멸했다. 심지어 미촉선궤(未觸先潰), 부딛치기도 전에 먼저 궤멸해 버렸다. 청군이 궤멸된 후에는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적지 않은 패잔병들은 진정한 야수로 돌변하여, 살인, 방화, 약탈, 간음등 온갖 나쁜 짓은 다 했다. 청나라의 지방관은 전쟁때 멀리 도망쳐 버렸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은 오히려 외국의 점령군이었다.

 

백성들에게 가장 큰 해를 끼친 것은 권비이다. 권비는 경진지구(京津地區, 북경, 천진)를 포함한 중국북방에 홍색공포를 불러왔다. 특히 '부청멸양'의 기치를 내걸고, 청나라조정의 인정을 받은 후에는 중국근대역사상의 대겁난을 일으킨다. '멸양'으로 '양'자가 붙은 모든 것을 없앴다.(여기에는 양유(洋油)를 사용하여 도처에 방화하는 것도 포함된다). 서양인, 서양여자, 서양아이들은 보는대로 죽였다. 서양종교를 믿는 자들도 모조리 죽였다. 교당을 불태우고, 철로를 파괴하고, 전선을 끊고, 기차역을 불태웠다. 대파괴과정에서 서양엔지니어와 가족들고 함께 살해된다.

 

권비들이 살륙을 벌이는데, 처음 시도한 것은 하북성 래수(淶水) 고루촌(高婁村)이고, 권비의 우두머리 장덕성이 친히 지위했다. 이 마을에는 34호의 사람들이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 권비는 신도들이 오후에 교당에 모여 미사를 할 때 교당으로 쳐들아가 신도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그후 교인들의 집을 불태웠는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린다. 부녀에 대해서는 먼저 강간한 후 죽였다. 이어서 재물을 뒤지고, 집을 불태워버린다. 34호의 140여명의 촌민들이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다.

 

권비가 인명을 경시하며, 남살하는 것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권비는 길에서 제복을 입은 학생을 만나면 매국노로 규정하고, 칼을 휘둘러 죽이곤 했다. 이런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어림군인 호신영의 익장(翼長)인 아극단(阿克丹, 2품고관)은 일찌기 천주교를 믿은 바 있었다. 그래서 그도 권비들에 의하여 참수된다. 무의군의 총사령관 섭사성은 경자전쟁때 거의 유일하게 팔국연합군과 싸운 청군의 장령이다. 그는 권비들이 함부로 살인을 저지르고,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을 탄압했다. 그래서 권비는 그를 뼛속까지 미워한다. 그리하여 섭사성이 앞장서서 팔국연합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귄비는 그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그의 노모, 처, 딸까지 납치해 간다. 친병이 그에게 와서 이를 보고하자, 섭사성은 대노하여, 군대의 절반을 빼내어 가족을 구하러 보낸다. 권비들은 오히려 팔국연합군과 함께 섭사성의 청군을 공격한다. 섭사성은 포탄에 맞아 전사한다. 권비는 섭사성을 '육시(戮屍)'하려고 하였으나, 팔국연합군이 추격해 오는 바람에 황급히 도망친다. 그래서 섭사성의 부하가 비로소 그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부도통 경항(慶恒, 2품고관)은 어림군 호신영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단친왕 재의의 심복이다. 그런데 그도 권비들의 독수에 당하여, 일가 노소 13명과 경항 본인까지 권비들에게 살해당한다.

 

권비는 아무나 매국노라고 규정지었고, 누구든지 마음대로 목숨을 빼앗았다. 정부고관, 군대장령도 마찬가지였다. 권비는 '이모자'를 살해학디 위해 심지어 황궁까지 쳐들어간다. 단친왕 재의의 지휘하에, 권비는 궁궐로 쳐들어간다. '대사형(大師兄)'은 서태후의 앞에서 기고만장하여 소리친다: 궁안에도 이모자가 있다. 그래서 검사를 해야 한다. 태감, 궁녀도 모두 검사해야 한다. 서태후는 그에게 어떻게 검사할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만일 이모자라면, 이마를 쳤을 대 십자무니가 나타난다고 한다. 서태후는 그런 헛소리를 믿지 않았지만, 형세가 급박하니 꾹 참고 그들에게 태감, 궁녀를 검사하도록 허락한다. 권비는 득촌진척(得寸進尺)하여 재의의 지휘하에, 자금성 영수궁(寧壽宮)으로 쳐들어가, '이모자' 광서제를 죽이려 한다. 그러나 서태후에 의해 제지당한다. 권비들이 황궁까지 침입하여 황제를 죽이려 했는데, 누구라고 죽이지 못할 것인가. 그들의 기고만장함은 친왕, 군왕보다도 컸다. 천진에서 그들은 문관이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내리라고 명했다. 무관이 말을 타고 가는 것을 보면 말에서 내리라고 명했다. 그리고 반드시 모자를 벗고, 길옆에 차렷자세로 서 있으라고 한다. 만일 따르지 않으면 칼맛을 보여주었다.

 

살인, 방화, 대거파괴이후, 당연히 약탈도 뒤따랐다. 약탈을 해야 주머니를 챙길 수 있다. 향진에서의 약탈은 말할 것도 없고, 권비는 경성내에서도 마구잡이로 약탈했다. 일반 민가도 화를 면하지 못했고, 경성의 고관집들도 화를 벗어날 수 없었다. 협판대학사(協辦大學士) 손가내(孫家鼐, 1품고관)이 집은 동단두조(東單頭條)에 있었는데, 모조리 약탈당한다. 손가내는 짧은 옷을 입고 도망쳐야 했고, 안휘회관으로 숨어든다; 그의 아들은 짧은 바지 하나만을 남기고 모조리 빼앗긴다. 직예총독 유록(裕祿)은 멍청한 인물이다. 권비를 귀빈으로 모시고, 간성(干城)으로 여긴다. 청나라조정이 양광총독 이홍장으로 유록을 대체하려 하자, 권비들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이홍장은 여러번 상소를 올려 권비를 소탕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교활한 그들은 형제들을 모아 공공연히 약탈을 벌인 후, 재물을 가지고 도망치기로 한다. 우두머리인 장덕성, 조복전은 일찌감치 거부가 되어 있었다. 그때 총독행원에는 현은만 백만이상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장덕성, 조복전은 총독행원으로 쳐들어가서 모조리 죽이고, 현은을 강탈한다. 이제는 '멸양'이라는 명분은 버렸다. 토비의 본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권비들은 이처럼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고 온갖 나쁜 짓을 다 했다. 백성들은 권비에 대해 이를 갈았다. 우두머리인 장덕성은 팔국연합군이 북경으로 진입한 후 황급히 도망친다. 그러나 하북성에서 백성들에게 붙잡혀 맞아죽는다.

 

경자지란과 그후의 경자전쟁에서 권비들에 의한 홍색공포는 중국근대사상 그 짝을 찾기 어려울 정도의 재난이었다. 이번 재난은 팔국연합군이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 막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겁난을 해소하고,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해준 것이다. 이것은 팔국연합군이 출동한 '부산물'이다. 그리고 팔국연합군의 작전목적이기도 했다. 당연히 엄격히 말해서, 팔국연합군이 구해주려고 한 것은 각국의 외교관, 선교사, 상인과 중국의 기독교도들이다. 다만, 중국의 민중과 관리들도 같이 구함을 받았다. 만일 팔국연합군이 이번 재난을 평정한 큰 업적은 잊을 수 없다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만일 팔국연합군이 중국역사의 도퇴를 막고, 반동을 막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드러나는 사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