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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유비가 서촉으로 들어갈 때, 유장(劉璋)을 배신하고 유비에게 온 3명의 최후는...?

by 중은우시 2020. 10. 14.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익주(益州)전투는 동한말기, 유비가 익주를 빼앗기 위하여 유장과 벌인 전쟁이다. 적벽대전이후, 유비는 형주를 차지했다. 제갈량의 <융중대>에 나오는 형주, 익주를 차지하는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유비는 일찌감치 익주로 진격하는 것을 도모했다. 이때 유장은 한중의 장로에게 제약을 받고 있었고, 다시 강대한 조조가 한중을 취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이는 촉에 위협이 되었다. 장송(張松)은 그리하여 유장에게 유비를 불러들여 실력을 강화시키자고 건의하게 된다. 장송등의 권유로 유장은 유비를 촉으로 불러들인다. 211년, 유비는 촉에 들어간 후 처음에는 유장과 관계를 좋게 유지했다. 그러자 유장은 유비에게 병사를 내주며 그에게 장로를 치도록 한다. 다만, 유비는 가맹(葭萌) 일대까지 진군한 후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건안17년(212년) 십이월, 유비는 유장과 결렬하고, 전쟁을 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익주전투이다. 유비에 있어서, 그가 이렇게 반객위주(反客爲主)하여 익주목 유장에게 전쟁을 도발하게 된 것은 유장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유약할 뿐아니라, 유비가 촉에 들어왔을 때, 유장 휘하에 이미 반도가 생겼기 때문이다. 즉, 법정(法正), 맹달(孟達), 장송(張松)은 일찌감치 유비와 암중 결탁한다. 심지어 유비를 위해 익주를 취하는 계책까지 내놓는다. 그렇다면, 궁금한게 있다. 유비가 촉에 들어올 때, 이 세 명은 유방을 배신하고 유비와 결탁했는데, 그들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장송

 

장송(?-212), 자는 자교(子喬, 그의 자를 永年이라고 한 것은 삼국연의가 혼동한 것이다. 기실 영년은 촉의 또 다른 명신 彭羕의 자이다)이다. 촉군 성도(지금의 사천성 성도시) 사람이다. 출생지로 보더라도 장송은 익주 현지의 사족(士族)이다. 당연히 유장에 있어서, 강룡불압지두사(强龍不壓地頭蛇)이다. 익주목의 자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유장은 장송등 익주현지 사족을 기용했다. 건안13년(208년), 장송은 익주목 유장의 별가(別駕)가 된다. 별가종사사(別駕從事史)는 관직명이다. 줄여서 별가종사, 혹은 별가라 부른다. 한나라때 두었고, 주자사(州刺史)의 보좌직이다. 다만, 장송에 있어서 유장을 보좌하는 중임을 맡은 것이다. 적벽대전이후, 조조가 손권, 유비연합군에 격패당했지만, 전체실력으로 보면,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명령하는 조조가 여전히 가장 강력한 제후였다. 그리하여 유장은 조조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고, 그 임무를 장송에게 맡긴다.

 

장송은 조조가 있는 지방으로 가는데, 그의 용모가 형편없다보니 조조가 그를 중시하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조조에 대한 원한을 가슴에 품게 된다. 그는 돌아와 유장에게 조조와의 관계를 단절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유장에게 유비와 우호관계를 맺을 것을 권한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보기에, 장송은 원래 유장을 배신하고, 조조에 의탁하려 했다. 다만 조조가 그를 경멸하고 무시하자, 장송은 다시 유비에 의탁하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후, 장송은 유비를 도와 익주를 빼앗는 것을 도운다. 예를 들어, 장송은 유장에게 유비를 촉으로 불러들여, 장로를 치자고 권유한다. 건안17년(212년), 장송이 암중으로 유비를 도우는 것이, 그의 형인 장숙(張肅)에게 들키고, 장숙이 고발한다. 유장은 분노하여 장송을 죽여버린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장송이 피살된 후, 유비가 정식으로 유장과 결별했다는 것이다. 즉 어느 정도 유비가 익주전투를 개시할 핑계거리를 준 것이다. 유비가 촉한을 건립한 후, 장송의 아들 장표(張表)는 유비에 의해 중용되어 내항도독(庲降都督)의 직위를 받는다. 즉 촉한의 남중지구를 지키는 책임을 맡은 것이다.

 

법정

 

법정(176-220), 자는 효직(孝直). 부풍군(지금의 섬서성 미현 소법의진) 사람이다. 동한말기 유비의 모사이고, 명사(名士) 법진(法眞)의 손자이다. 동한말기, 법정은 친구인 같은 군의 맹달과 함께 촉으로 가서 유장에 의탁한다. 다만 유장은 사람을 잘 쓰는 인물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법정은 겨우 신도현령이 된다. 그후 다시 군의교위가 된다. 법정은 재주를 가지고도 제대로 쓰이지 못한다는 불만이 있었다. 다시 주읍의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으니 아주 골치아팠다. 익주별가 장송도 법정과 가까운 친구였다. 유방은 대사를 이룰 인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고, 자주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했다.

 

그리하여, 법정등이 유장을 배신하고 유비와 결탁한 중요한 원인은 중용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혹은 유장의 휘하로는 포부를 펼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적벽대전이후, 장송은 유방에게 적극적으로 유비와 교분을 맺을 것을 권한다. 장송의 추천으로 법정이 유비에게 사신으로 간다. 유비는 법정을 만난 후, '은혜를 베풀머 대접했고, 은근한 정을 다 했다' 법정은 유비에게 웅재대략이 있다고 보았고 보좌할만한 명주라고 여긴다. 익주로 돌아온 후, 장송과 밀모했고, 암중 유비를 주공으로 모시기로 결정한다. 익주전투에서 유비의 여러 부하들은 결국 모두 유비에 투항한다. 그러나, 이는 주로 유방이 이미 패배한 후이거나 대세가 기운 이후였다. 다만 법정, 맹달, 장송등은 익주전투가 발발하기 전에 이미 암중으로 유비를 도와주었다. 그래서 익주의 주인이 바뀌는 것에 이 세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건안16년(211년), 유비가 촉에 들어갈 때, 법정은 유비에게 계책을 올린다: "각하는 영명한 인재입니다. 유장은 명주의 능력이 없습니다. 장송이 안에서 호응하면 익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익주는 부유한 곳입니다. 천부지국의 험준함을 빌면 대업을 성취하는 것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제갈량의 융중대에도 천하를 탈취하려면 반드시 형주와 익주를 점거해야한다고 되어 있다. 법정, 장송의 배반은 하늘이 내린 기회이다. 그리하여 유비는 승락했고, 군대를 이끌고 촉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214년, 유비가 성도를 포위했을 대 유장에게 투항을 권유한다. 그리고 뒤에 유비와 한중으로 진격하여 취한다. 계책을 내서 조조의 대장 하후연을 참수한다. 법정은 기발한 계책을 잘 냈다. 그래서 유비가 신뢰하고 중용했다. 건안24년(219년), 유비가 한중왕이 되고, 법정을 상서령, 호군장군에 봉한다. 다음 해, 법정이 사망한다. 향년 45세이다. 법정의 죽음에 유비는 아주 슬퍼한다. 며칠간 연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에게 익후(翼侯)에 추존하는데, 유비가 유일하게 시호를 내린 대신이다.

 

맹달

 

마지막으로 맹달(?=228), 자는 자도(子度, <삼국연의>에는 자를 子慶이라고 썼다), 원래 자는 자경(子敬)이었는데, 유비의 숙부 이름이 유자경(劉子敬)이어서 피휘를 통해 자를 고친 것이다. 부풍군사람이다. 맹달에 있어서, 법정과는 같은 고향출신이다. 동한말기, 중원일대의 전란으로 맹달과 법정은 남으로 가서 유방의 휘하에 들어간다. 당연히 중용받지 못했기 때문에, 맹달과 법정은 익주목 유방을 배신한다. 

 

건안16년(211년), 유장은 조조가 사례교외 종요(鍾繇)로 하여금 장로를 치게 한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리하여 조조가 한중을 취한 후에 다시 익주를 공격할 것을 두려워한다. 장송은 그리하여 유장에게 유비를 촉으로 데려와 유비를 시켜 장로를 치자도 권유한다. 맹달은 법정과 함께 2천명을 데리고 유비에게 사신으로 간다. 그리고 유비를 촉으로 모셔온다. 그리하여, 유비가 촉에 들어올 때, 맹달은 유장을 배신했을 뿐아니라, 유비에게 병마도 제공했고, 정보도 제공했다.

 

유비에 귀순한 후, 맹달은 유비를 도와 익주를 취하게 해주었을 뿐아니라, 상용군(上庸郡)을 취하는 전투에도 참가한다. 그러나, 219년, 관우가 양번지전(襄樊之戰)을 일으킬 때, 맹달과 유봉(劉封)은 병력을 보내주어 관우를 구해주지 않은 것때문에 유비의 분노를 산다. 그리하여 맹달은 조위(曹魏)로 도망친다. 맹달의 조조에게서 관직이 산기장군, 건무장군에 이르고, 평양정후(平陽亭侯)를 받는다. 그후 촉한승상 제갈량이 중원북벌을 준비할 때, 맹달은 다시 조위를 배반하고 촉한으로 돌아가려 한다. 결국 사마의에게 참살당한다. 그리하여, 장송과 법정에 비하여 맹달은 반복무상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동한말기의 여포와 유사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최후는 자연스럽게 서로 비슷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