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원시인(原始人)
순망치한의 상황이 많은 경우에 나타난다. 처음에는 자신과 멀리 떨어진 일이라고 여겨서 다른 사람이 우리 주변의 사람을 괴롭힐 때나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발할 때, 그것이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여기지만, 결국은 자신도 주변사람과 똑같이 당하는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역사상 이런 경험과 교훈은 많다. 진나라가 육국을 멸망시킬 때가 바로 전형적인 경우이다. 처음에 일부 국가는 모두 진나라가 주변의 약소국을 멸망시켜도 자신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어버린다. 그렇다면, 진나라는 어떻게 한걸음 한걸음 육국을 멸망시켰고, 그 군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한(韓)
진나라는 육국을 통일하겠다는 야심을 세운 후, 전략방침을 결정한다. 그것은 바로 '원교근공'이다. 그 뜻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들과는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자신과 비교적 가까우면서 약한 나라는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진나라의 전략은 아주 유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진나라와 거리가 비교적 가까운 나라는 3개이다. 각각 한, 조(趙) 그리고 위(魏)이다. 그들은 예전에 모두 진(晋)나라였다. 이 세나라가운데 한나라와 위나라는 실력이 보통이었고, 조나라는 실력이 비교적 강했다. 그래서 진나라는 아주 총명하게도, 처음에 실력이 약하면서 거리가 가장 가까운 한나라를 겨냥한다.
기원전231년, 진나라의 강력한 공격하에 한나라의 장수 등(騰, 성은 모름. 나중에 관직이 내사에 올라 내사등이라 불림)이 스스로 투항해오면서 남양성을 바친다. 기원전230년, 진왕 영정은 내사등을 보내 한나라를 공격하여 성공을 거두며 일거에 한왕안(韓王安)을 붙잡는다. 이렇게 한나라는 정식 멸망하고, 진나라의 영천군(潁川郡)이 된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 한왕안은 진현(陳縣)에 연금된다. 이때 진시황은 기실 한나라는 자신에게 더 이상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비교적 느슨하게 감시한다. 누가 알았으랴. 기원전226년, 한나라의 옛귀족들이 복국을 시도하며 반란을 일으킨다. 그렇게 되자 진시황은 분노하여 반란을 평정한 후 직접 한왕안을 죽여버린다.
조(趙)
조나라의 실력은 당시에 진나라와 대항할 수 있을 정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진나라가 조나라를 강공으로 취하려면 난이도가 아주 높았다. 그래서 여러가지 고려를 한 후에 진시황은 비교적 총명한 방법을 강구해 낸다. 지혜로 조나라를 취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취했을까? 분석해보기로 하자.
장평지전때, 진나라는 반간계를 써서 조왕으로 하여금 염파를 제거하게 한다. 그렇게 하여 조나라의 실력은 크게 약화된다. 기원전230년, 조나라는 천재지변에 시달린다. 조왕은 그래도 이전의 일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자신의 대신들을 여전히 신뢰하지 못한다.
진나라는 조왕의 그런 특징을 잡아내어, 다시 한번 옛날에 써먹었던 수법을 사용한다. 그 결과 조좡은 다시 한번 진나라의 반간계에 걸려든다. 이목에게 사심이 있다고 보아, 이목을 죽여버린다. 이목이 죽자, 조나라의 군심은 더욱 불안해진다. 진나라는 그 틈을 타서 공격해 들어가 조나라를 일거에 차지한다. 조왕은 방릉(房陵)에 유배보낸다.
조왕은 멸국의 치욕을 안고, 자신이 범한 잘못에 후회막급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견디지 못했고, 결국은 우울증에 빠져 식사도 하지 못한다. 결국 띠집(茅屋)에서 굶어죽는다. 처량한 최후이다. 원래는 좋은 장수를 데리고 있는데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는 군주가 국가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사례이다.
사실상 조나라는 당시 진나라에 항거할만한 실력을 갖춘 최강의 나라였다. 조나라가 멸망한 후에 나머지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진나라에 항거하기 어려워졌다. 멸망하는 것이 거의 결정된 셈이다. 아래에서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위(魏)
한나라와 조나라가 연이어 멸망한 후, 그들의 친구인 위나라는 멸국의 운명을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게다가 원래 위나라와 진나라는 이미 십여년간 서로 죽고 죽였다. 쌍방의 원한이 아주 깊었다. 이때 진나라가 한나라와 조나라를 멸망시키니, 사기가 오를대로 올랐다. 자연히 일거에 계속 진격하여 위나라까지 정리하러 간다.
기원전225년, 진왕은 왕전(王翦)의 아들 왕분(王賁)을 보내 위나라의 도성 대량(大梁)을 공격하게 한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고전을 하며 대량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마지막에 왕분은 강물을 끌어들여 물로 대량을 수몰시킨다. 위왕가(魏王假)는 스스로 회복할 도리가 없다고 여겨 진나라에 투항한다. 그후 진나라는 그를 죽여버린다.
진나라는 위나라와 원한이 너무 커서, 진나라는 위왕을 죽였을 뿐아니라, 위왕의 후손과 많은 종실까지도 죽여버린다. 목적은 위나라에서 이후 누군가 나와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위나라는 멸망한 나라중에서 비교적 처량한 나라라 할 수 있다.
초(楚)
초나라의 상황은 다른 나라들과 달랐다. 나머지 국가들은 국왕을 붙잡아서 죽여버리면 기본적으로 그 나라는 끝난 것이다. 다만 초나라는 비교적 특수했다. 초나라는 국왕이 죽어도, 그들은 신속히 새로운 국왕을 옹립하여 계속하여 진나라와 싸웠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 진나라는 아주 골치아팠다. 초나라를 멸망시키려면, 강제력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진나라는 60만대군을 보내어 3년의 시간이 걸려서 겨우 초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초왕 부추(負鄒)는 투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행방불명이 된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진나라의 행태로 봐서는 초왕을 죽여버렸을 것이다.
초나라의 특수한 환경을 고려하여, 일단 사람들이 초왕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시 새로운 초왕을 옹립할 수 있고, 그러면 진나라에는 골치거리가 될 것이므로, 진나라에서는 그저 초왕의 행적이 불명하게 되었다고만 말하며 초나라 사람들이 초왕의 생사를 몰라 어떤 결정을 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연(燕)
일찌기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망시킬 때, 진나라는 연나라도 노렸다. 원인은 태자단(太子丹)이 형가(荊軻)를 보내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암살은 성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진시황의 분노만 산다. 당시 진왕은 연나라를 멸망시키겠다고 맹세한다. 연왕희(燕王喜)와 태자단은 위험이 닥친 것을 알고 요동지방으로 도망친다. 그리하여 진나라는 바로 그들을 제거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나중에 진나라는 위나라와 초나라를 멸망시키느라 바빴고, 연나라를 공격할 시간여유가 없었다. 기원전222년, 연나라는 생존을 위하여 먼저 태자단의 수급을 진나라로 보내어 생존을 구걸한다. 나중에 연왕희는 왕전의 아들 왕분에게 생포되고, 그 후에는 행방이 묘연해진다.
위에서 본 분석에서와 같이 연왕희도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가 이미 태자단의 수급까지 바쳤으므로, 진왕이 그를 죽이려면 다시 충분한 이유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진시황은 사람을 아무런 이유없이 함부로 죽인다는 소리를 듣게 될 터였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실종'시켜버리는 것이다.
제(齊)
진나라가 육국중 나머지 5개국가를 멸망시킨 후, 제나라는 당연히 자신에게 남은 날도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어쨌든 자신의 실력으로 진나라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대문을 활짝 열어 진나라를 맞이하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자신이 직접 투항하면, 무고한 백성들은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기원전221년, 왕분이 대군을 이끌고 연나라에서 남하하여 제나라를 친다. 그런데, 제나라는 거의 반항을 하지 않았다. 직접 제나라를 접수하고, 제왕도 투항한다. 그리고 진나라는 제왕건(齊王建)을 공성(共城)에 연금시킨다. 제왕건은 결국 공성에서 굶어죽는다.
결론
육국 이외에 더욱 약한 나라였던 위(衛)나라는 처음에 진나라에 붙었고, 진이세가 즉위한 후에 비로소 멸망한다. 그들은 비교적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육국을 멸망시키는 과정을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의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당시 육국에 삼국시대의 촉, 오와 같은 의식이 있었다면, 그리하여 힘을 합쳐서 진나라와 싸웠다면 아마 진나라가 승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위험이 자신과 가깝지 않으면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각자 자기 문앞의 눈만 쓰는 것이다. 눈만 쓸다가 보면 언젠가 진나라의 군대가 문앞에 들이닥친다. 그때는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나라와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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