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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미월(羋月)이 중국최초의 여황(女皇)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by 중은우시 2020. 11. 20.

글: 산화해진인(山和海眞人)

 

진경원(陳景元)은 미월이 중국 최초의 여황이라고 주장했다.

진선생이 무지한건지 아니면 사람을 속이려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르겠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중국고대에 황(皇)과 왕(王)은 등급이 다르다.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황(皇)은 천자(天子)라 칭할 수 있지만, 왕(王)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진나라말기 중국을 통일할 때, 진(秦)의 국왕은 단지 왕(王)을 칭했을 뿐이다. 그때 황제라는 칭호도 없었다. 진나라는 주(周)나라의 아래에 있는 여러 제후국중 하나였다. 비록 주왕조는 이미 명존실망(名存實亡)했지만, 각 제후국들 사이에 아직 강히 황제(천자)를 칭하는 국가는 없었다.

주왕조의 천자도 왕(王)이라 칭했다. 그는 여러 제후왕들을 봉한다. 그리고 등급도 다르다.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작위가 있다.

 

예를 들어, 우(虞), 괵(虢), 송(宋)등의 국가는 공작이다; 제(齊), 노(魯), 진(晋), 고구려(高句麗)등의 나라는 후작이다; 연(燕), 위(魏), 조(曹)등의 국가는 백작이다; 초(楚), 오(吳), 거(莒)등의 국가는 자작이다; 허(許)등의 국가는 남작이다.

 

진(秦)은 초기에 융적(戎狄)의 여러 부락이 모여서 이룬 국가였다. 그 국군은 주천자가 봉한 왕이 아니었다. 자칭 왕이었다. 나중에 진이 강성해지면서, 주천자가 비로소 백작의 작위를 내렸다.

 

이들 작위는 자신의 봉지에서는 왕을 칭할 수 있었다. 다만 각등급 작위의 왕은 평등하지 않았다. 그들 간에 서로 만날 때는 작위를 가지고 급을 나누었다. 하급작위는 상급작위에 인사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부존(不尊)으로 보았다. 부존은 징벌을 받게 된다. 엄중한 경우에는 토벌당하고 멸국당할 수도 있다.

 

이들 제후왕과 주천자의 왕은 서로 다르다. 엄격히 말해서, 공, 후는 왕에 상당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백, 자, 남의 작위는 자신의 봉지에서는 역시 최고권력자였다. 특히 백성들은 그를 왕이라 부른다. 이들 왕은 주왕의 앞에서 모두 왕이라 칭하지 못한다. 그저 작위로 불리게 된다.

 

고대 왕(王)자의 형성은 일통삼재(一統三才)이다. 즉, 천, 지, 인을 통일하여야 왕이라 불리는 것이다.

 

황(皇)과 제(帝)는 원고시대부터 있었다. 삼황오제는 중국고대 제왕의 칭호이다. 다만 구분은 있다. 신격화된 왕은 황이라 부르고, 왕중의 왕은 제라고 불렀다. 황은 하늘의 아들이고, 제는 초범한 사람, 즉 인간세상을 벗어난 사람이다. 왕은 인간세상을 벗어나지 않은 사람이다.

 

전국시대후기에 이르러, 각 제후국은 자립하여 모두 주천자의 말을 듣지 않게 된다. 특히 진(秦)는 심지어 주왕조를 멸망시킨다. 그후 화하대지에는 전국칠웅을 위주로 하는 할거국면이 이어진다. 진(秦)도 날로 강성해지며 다른 나라들보다 강해진다. 다만 진나라의 국왕은 계속 황이나 제로 칭하지 못한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나서야 비로소 황제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까지 황제라는 칭호는 나타날 수가 없다. 더더구나 여황이라는 지위는 있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중국의 여황으로 최초의 인물을 꼽자면, 여와(女媧)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와는 삼황오제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먼처 '짐(朕)'이라 칭하고, '폐하(陛下)'라 불리며 황권을 장악한 사람은 북위(北魏) 영태후(靈太后)이다. 이들은 무측천보다 앞선 여중호걸들이다. 한(漢)왕조만 하더라도 십여명의 여인들이 황권을 행사했다. 어찌 무측천 한명만을 가지고 미월과 시간을 따진단 말인가. 이들 여인들은 모두 중국정규역사서에 나오는 황권을 장악했던 여인들이다. 중국역사에 모두 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수준도 되지 않고, 소설에 나오는 진왕의 모친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웃기는 소리이다.

 

진경원은 당당하게 <사기>등 전적을 열거하면서, 억지로 미월이 40년간 진나라의 국왕이었다고 말한다. 사실이 과연 그가 말한 것과 같을까? 그렇지 않다:

 

기원전307년, 영직(嬴稷)이 즉위한다. 그가 진소양왕(秦昭襄王, 秦昭王)이다. 

기원전305년(소양왕3년), "3년(三年), 왕관(王冠)". 아주 명확하게, 진소양왕이 정식으로 집정한다. 모친이 그를 도와 집정했던 기간은 겨우 앞의 2년정도일 뿐이다.

기원전284년(소양왕24년), 미월의 동생 위염(魏冉)이 면직당한다.

기원전267년(소양왕42년), "십월(十月), 선태후훙(宣太后薨), 장어지양여산(葬於芷陽酈山)" 미월에 대하여 기재된 글자는 30자가량이다. 진경원은 자신의 상상력으로 사기에 적혀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웃기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기원전257년(소양왕52년), "주민동망(周民東亡), 기기구정입진(其器九鼎入秦), 주초망(周初亡)"

기원전253년(소양왕56년), 가을 진나라의 소양왕이 죽는다. 진경원은 소양왕이 60년간 집정했다고 했는데, 그것도 틀린 말이다.

 

<사기.주본기제4>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나라가 진나라에 멸망한 후, 주나라백성들은 동으로 도망친다. "7년후, 진장양왕(秦莊襄王)이 동주(東周)를 멸망시키니, 동, 서주가 모두 진나라에 들어온다. 주나라는 이제 제사가 끊어진다." 이것은 진소양왕이후의 일이다.

 

주나라가 망한 것은 미월이 죽은 이후이다. 이전에 나라가 황제를 칭할 수 있었을까? 누가 인정해준단 말인가?

 

<사기.위세가>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8년(위소왕8년, 즉 기원전290년), 진소왕은 서제(西帝)가 되고, 제민왕(齊愍王)이 동제(東帝)가 되다. 한달여만에, 모두 왕으로 칭호를 되돌렸다." 확실히 '제(帝)'는 함부로 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 제가 제를 칭한지 한달만에, 진경원이 말하는 것처럼 '3개월'이 아니라, 되돌렸다. 그리고 사기에는 명백하게 말하고 잇다. '진소왕이 서제가 되다' 어찌 1달가량 허황된 '제'를 가지고 미월에게 얘기한단 말인가.

 

그외에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미월은 직(稷), 현(顯), 리(悝)의 세 아들을 낳았다. 영직은 진소양왕이고, 영현은 고릉군(高陵君)이며, 영리는 경양군(涇陽君)이다.

 

이상을 보면 진경원이 말하는 것처럼 미월이 40년간 집정하고, 칭제했다는 것은 전혀 사료에 부합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진경원은 혼자만의 상상력으로 미팔자(羋八子, 팔자는 후궁의 등급임)를 중국최초의 여황이라 불렀다. 이는 분명히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다. 소설이면 자기 마음대로 쓸 수가 있다. 그러나 소설을 역사라고 하면 안된다. 우리는 <미월전>이라는 문학작품에 대하여는 포용적이고 관대한 태도이지만, 그 안에 나오는 내용들 중에는 엉터리인 것들도 많다. 예를 들어, 북방 한(韓)의 예의를 진의 예의로 가져다 쓴 것이라든지, 진왕에게 제후를 봉할 특권이 있다고 한 것이라든지(진왕 자신이 백작의 작위밖에 없었다), 제후왕의 세자를 태자(太子)라고 부른다든지, 왕비(王妃)를 황후(皇后)로 한다든지. 이런 것들까지 가혹하게 따질 생각은 없다.

 

연예인은 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진경원처럼 학자의 기치를 내걸고 기망하면서 다른 생각을 품은 사람은 용인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