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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선진)

상주왕(商紂王): 3천년만에 억울하게 덧씌워진 오명을 벗다.

by 중은우시 2021. 12. 14.

글: 대랑도사(大浪淘沙)

 

주왕(紂王)은 상(商)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제신(帝辛)이다. 그는 지금까지 혼군(昏君), 폭군(暴君)의 대명사였다. 달기(妲己)를 총애하고, 충신을 해치고, 주지육림(酒池肉林), 포락혹형(炮烙酷刑)을 쓰고, 처와 자식을 해치고 배를 갈라서 태아를 꺼내는 등...그가 저질렀다는 이런 것들은 모두 오랫동안 사람들이 제왕으로서의 반면교사로 거론하는 사례였다. 특히 <봉신연의(封神演義)>라는 영향력이 아주 큰 통속소설로 인하여 주왕의 이런 이미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졌다. 그러나, 진실한 역사는 어떠했을까?

 

그럼 최초의 역사문헌을 살펴보기로 하자. 무왕벌주(武王伐紂). 즉 주무왕이 주왕을 토벌할 때, 주왕을 공격하는 두 편의 격문이 있다. <태서(泰誓)>와 <목서(牧誓)>. 여기에서 주왕에게 붙여진 죄상은 이러하다: 후주(酗酒), 신유명재천(信有命在天), 불용귀척구신(不用貴戚舊臣), 임용소인(任用小人), 청신부인지언(聽信婦人之言), 불유심제사(不留心祭祀). (술주정을 부리고, 하늘의 명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으며 귀족, 인척, 구신을 기용하지 않고, 소인을 기용했으며, 부인의 말을 들어 제사를 신경쓰지 않았다)

 

역사학자 고힐강(顧頡剛)은 상세하게 고증한 글 <주악칠십사발생적차제(紂惡七十事發生的次第)>라는 글에서 주왕의 나쁜 짓에 대한 것을 통계냈다. 가장 먼저 <상서(尙書)>에는 6가지가 나온다. 전국시대에 20가지 죄악이 추가되고, 한나라때 21가지가 추가되며, 양진시대에 13가지가 추가된다.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나쁜 짓은 실제로 계속 중첩되어 쌓이면서 발전한 것이다. 시대가 현대에 가까울수록 주왕의 죄악은 더 많아진다. 그리고 갈수록 믿기가 어려워진다.

 

'층층이 겹쳐졌다'는 사례를 보자. 가장 먼저 <상서>에 기록된 내용은 주왕이 술을 좋아하여 "흥이 일어나면 술주정을 부렸다'는 것이다.

 

<한비자>에 이르러 이에 대한 묘사는 이러하다. "연못을 깊이 파고, 백성들을 쫓아내고, 호화스러운 재화를 놔두었다" 여기서 연못은 술을 보관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재물을 보관하기 위한 것인지는 명확히 말하지 않았다.

 

<여씨춘추>에는 정식으로 '주지(酒池)'라는 개념이 나온다. "이조위구(以糟爲丘), 이주위지(以酒爲池), 육포위격(肉圃爲格)" 여기에는 술도 있고 고기도 있다. 아쉽게도 훠궈(火鍋)만 빠졌다.

 

서한초기의 <사기>에는 이런 내용으로 바뀐다: "술로 연못을 만들고(以酒爲池), 고기를 걸어 숲을 만들었으며(懸肉爲林), 남녀들이 벌거벗고 그 사이를 쫓아다니게 했으며 밤을 새워 마셨다." 사마천은 정말 대단하다. 요 몇 글자로 생생한 화면이 그려지도록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주지육림'이라는 말이 나왔을 뿐아니라, '남녀가 벌거벗고 그 사이를 쫓아다닌다'라고 강조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문과목에서 배우는 '구체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동한시기의 <논형(論衡)>에 이르면, 이제 수량화된다. <주왕은 술에 빠져서, 술지게미로 언덕을 만들고, 술로 연못을 만들었다. 마시는 자가 삼천명이다. 긴 밤내내 즐겨서 갑자도 잊을 정도이다. 수레로 술을 옮기고, 말로 구이를 옮긴다. 백이십일이 하룻밤이다." 이를 보면 주왕에 대하여 정성분석으로는 부족하니 정량분석으로 넘어간 것이다. 데이타가 있어야 사실로 보인다.

 

생산력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에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호화사치스러운 장면은 바로 '주지육림', '남녀가 벌거벗고 서로 쫓아다니는' 것이었다. 다만, 고기류는 쉽게 부패한다. 사람들이 아무리 옷을 벗고 뛰어다닌다는 것은 날씨가 온화하다는 것이므로 육류는 '육림'의 방식으로 보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는 확실히 과학적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까지 사마천이 광세의 기재이고 전문적인 소양이 있다는 것을 존중하지만, 여기에 그가 쓴 내용은 검증을 통과할 수가 없다. 우리는 그저 '벌거벗고 서로 쫓아다닌다'는 류는 문학적인 성분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역시 주왕의 호화사치스러운 생활을 상징하는 녹대(鹿臺)이다. <사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세금을 많이 거두어, 녹대를 돈으로 가득채우고 거교(鉅橋)를 양식으로 넘치게 했다." 이를 보면 녹대는 주왕이 재물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유향이 편찬한 <신서(新序)>에 이르러 녹대는 "크기가 3리이고, 높이가 천자(尺)이다" 상나라때 3천미터 길이에 2백미터높이의 건축물을 만들다니. 에펠탑이 겨우 삼백미터가량이다. 이를 보면 우리는 상고시대의 기술력은 너무 낮게 평가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서진시대에 편찬된 <제왕세기>를 보자. 주왕의 녹대는 일거에 높이가 천장(丈)에 이른다. 우리가 주나라때의 도량형으로 계산하면 1장은 1.8ㅋㅣ터가량이다. 주왕의 녹대는 태산보다 해발고도가 높다. 주왕이 매일 놀기 위해서 태산보다 높은 곳을 올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그의 신체는 아마도 아주 튼튼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의 문인, 사대부들이 쓴 많은 것들은 생활상식도 없고, 과학상식도 없다. 더더구나 엄격하게 고증하려는 태도도 없다. 완전히 개인의 호오에 따라 그리고 현실목적에 따라 창작했을 뿐이다. 이는 우리 현대인들이 역사를 읽을 때 경계해야할 점이다.

 

간단히 말하면, 최초의 자료인 <상서>에는 주왕의 가장 큰 죄가 '술주정'을 하고 '소인'을 기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진의 <제왕세기>에 이르서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나쁜 짓을 그가 벌인 것으로 쓰여 있다.

 

주왕의 이런 죄행에 대하여 많은 고대인들도 믿을 수 없다고 여겼던 것같다. <논어>에서 자공(子貢)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주왕의 나쁜 점은 그가 그런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여 나쁘게 말하는 바람에 세상의 모든 나쁜 짓을 그가 한 것으로 되어 버렸다.

 

송나라때의 나필(羅泌)은 <걸주사다실실론(桀紂事多失實論)>에서 고증을 한 바 있다: 주임금이 궁실을 크게 만들고, 주지육림을 건설하고, 여색을 가가이 하고, 현인을 가두고 해쳤다는 등은 하(夏)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이 한 죄악과 완전히 일치한다. 특히 포락지형은 처음에 걸이 그렇게 사람을 해쳤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주가 한 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래서 '걸주'는 하나로 묶였고, 폭군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래서 나필은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이들 죄행은 모두 너무나 비슷하다 대체로 후인이 '발명'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고고학이 발달했고, 상나라때의 갑골문도 많이 출토되었다. 우리는 그 당시의 역사에 대하여 더욱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금 알고 있다. 주왕은 일찌기 동이(東夷)를 정벌하러 나서서 승리를 거둔 바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국력이 피폐해졌고, 주무왕이 그 틈을 타서 상나라를 공격한다. 주왕은 황급히 죄수와 노예를 조직하여 응전했고, 왕족들 중에서 미자(微子)와 기자(箕子)는 주무왕의 편에 서서 양로로 병력을 이끌고 왔다. 최종적으로 목야(牧野)에서 결전을 치렀으나 주왕이 패배하여 상왕조가 멸망한다.

 

사료를 대비해보면, 우리는 최초에 주왕에게 덧씌워진 6가지 죄상은 '죄'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술주정을 하고, 여자의 말을 들었다는 것은 기껏해야 개인의 기호이고, 여자의 말을 가볍게 믿는 것과 같은 문제는 출토된 갑골문을 보면 주왕은 정치혼인이었고, 후궁의 생육과 질병상황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녀들에게 봉지를 내주었다.

 

그리고 이런 비빈은 달기가 아니었다. 현재학자들은 보편적으로 달기는 동이부락에서 주왕에 보내온 '전쟁배상'이라는 것이다. 무왕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주왕은 황급히 조가로 되돌아갔으므로 달기는 나중에 포로로 잡히고 노예가 된다. 아마도 주왕이 죽을 때까지 그들은 얼굴조차 한번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수천년간 간부음부(奸夫淫婦)로 악명을 짊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이중기준은 무엇인가? 주왕에게는 매일 여자들과 놀아나서 황음무도했다고 하는데, 주문왕은 99명의 아들을 두었고, 다자다복(多子多福)으로 현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주왕의 다른 죄상들도 어떤 것은 심지어 '역사의 공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예를 들어, 귀족, 인척, 구신을 기용하지 않고 소인을 기용했다는 것인데, 비간(比干), 미자(微子), 기자(箕子)같은 사람들은 모두 상왕조의 귀족들이다. 그러나 주왕은 귀족세력을 탄압했고, 결국 비간은 피살되고, 기자는 구금되며, 미자는 주무왕의 편에 서서 길을 안내한다. "기자는 주왕의 친척이다....유배를 가서 미치고 노예가 된다. 그리하여 숨어서 북과 금을 연주하며 스스로 슬퍼했다. 그래서 전해기기를 기자조(箕子操)라고 전해진다. 왕자인 비간도 역시 주왕의 친척이다. 기자가 간언해도 듣지를 않고 노예로 삼는 것을 보고.....그리하여 왕자 비간을 죽이고 그의 심장을 꺼내보았다." 그외에 여기의 '소인'은 출사표에 나오는 그런 뜻에서의 소인이 아니라, 출신이 한미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주왕이 혈통과 가족의 한계를 벗어나서 자신과 혈통적으로 가까운 사람만 기용하지 않고, 평민을 발탁했다는 것인데, 이는 시대를 초월한 이념이다. 그리고 주왕이 발탁한 인재들 중에서 유명한 사람은 비렴(飛廉), 악래(惡來), 비중(費仲), 좌강(左疆)등이 있다. 이들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후세의 기록에서 모두 간신이라고 칭한다. 재물을 탐하고 혹리이고 법을 무시하는 등등. 우리는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들의 죄행도 주왕과 마찬가지로 나중에 '층층이 겹쳐진' 결과라는 것을.

 

그외에 그의 죄명으로 두 가지가 더 있다: '신유명재천, 불유심제사' 이것은 모두 신권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신권을 대표하는 것은 제사집단의 권력이다. '유명재천(有命在天)'을 믿는다는 것은 즉 제사관들이 점복, 신유(神諭), 기복등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더 이상 정무에 간섭할 수가 없다. 불유심제사도 마찬가지이다. 제사의식이 없으면 제사장의 권력도 없다. 동시에 상왕조의 제사는 아주 잔혹한 인순(人殉)이다. 주왕이 제사를 거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좋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전인후과를 정리해보면, 주왕은 한편으로 왕족, 귀족을 탄압하고 지위가 낮은 관리를 발탁했다; 다른 한편으로 신권제사장의 권력을 탄압하고 동시에 동이에 출정하여 중화문명의 전파범위를 확장시킨다. 결국 역사발전을 촉진하는 일들을 했다. 다만 자연히 귀족집단, 신권집단의 반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각도에서 보자면, 주왕이 후세에 각종 '욕'을 얻어먹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가는 주나라를 정통으로 삼고 주공이 '예악을 만들었다고 본다. 공자의 정치이상은 '예악이 붕괴된 세상'에서 주나라제도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왕은 주변의 귀족을 믿지 않았고, 제사에도 열심이지 않았다. 자연히 '예악'의 이념에 배치된다. 후세의 문인, 사대부들이 그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동시에 주나라를 정통으로 삼으면서 유생들은 무왕벌주의 합법성을 찾아야 했다. 주왕이 다른 나라와 전투를 하는 틈을 타서 그 빈틈을 노려 공격했다고 하면 빈집털이를 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반드시 주왕에게 오명을 뒤집어 씌워야 했다. 그가 달기를 총애했다든지, 배를 갈라 심장을 꺼냈다든지, 충신에게 포락형을 가했다든지, 남녀가 벌거벗고 서로 쫓아다녔다든지....

 

근대이래, 고고학적으로 새로운 자료가 계속 발굴됨에 따라, 사람들은 새로운 이념에 찬동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귀족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을. 통치계급의 고착화를 타파하는 행동은 아주 용기있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주왕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려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곽말약(郭沫若) 선생은 주왕은 '중앙집권'을 강화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말한다. 그는 왕족, 귀족을 억누르고, 보통관리를 발탁했으며, 제사집단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이는 역사발전의 추세에 부합한다. 동시에 사방으로 정벌을 나섰는데, 이는 국력을 낭비하여 결국 패망에 이르기는 했지만, 화하문명을 더욱 먼곳까지 전파했고, 민족융합을 촉진했으니 역사의 각도에서 보자면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주왕평반제일인(紂王平反第一人)'은 위대한 지도자 모택동이다. 모든 사람들이 유생의 말을 듣고 통속소설의 영향을 받은 상황에서 모주석은 정곡을 질러 주왕의 높이 평가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실 주왕은 아주 능력있는 인물이다. 문무에 모두 능했다. 그는 동남을 경영하여, 동이와 중원의 통일을 공고히 하여 역사상 공로가 있다. 주왕이 서주의 오랑캐를 정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손실이 아주 크고, 포로가 너무 많아 소화하질 못했다. 주무왕이 그 빈틈을 파고 들어 공격해왔고, 많은 포로들이 창끝을 돌려 반기를 든다. 그리하여 상왕조는 멸망했다." 

 

동시에 그는 강조했다: "주왕은 아주 재능있는 인물이다. 뒤에 그에 대한 나쁜 말들은 주나라사람들이 한 말이다. 들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주왕에 대하여 얘기할 때, 명확하게 '번안(飜案, 사건결과를 뒤집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책을 다 믿는다면 차라리 책이 없는 게 낫다. 주왕을 위해 번안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치이다."

 

1959년 2월 25일, 제남에서 좌담회가 열린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다: "용산문화는 아주 유명하다. 상주왕은 아주 능력있는 인물이다. 주무왕은 그가 아주 나쁘다고 말했다. 그는 포로정책을 제재로 못해서 나중에 실패한다."

 

한번은 모택동이 옥황산을 올랐다. 그때 산꼭대기에 도관이 있고 도사가 거기에 살고 있었다. 관내에는 주무왕, 강태공, 나타, 옥황대제등의 조각상이 있었다. 모두 <봉신연의>에 묘사된 주요인물들이다. 모택동안 공봉된 신상을 하나하나 자세히 본 후에 따르던 수행인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봉신연의>를 봤는가?" 상대방이 대답한다: "집에서 중학교때 봤습니다." 모택동이 묻는다. "너는 은주왕(殷紂王)이 왜 주무왕에게 패배했다고 생각하느냐?" 상대방이 대답한다: "주왕은 달기를 총애하고, 조정을 어지럽혔습니다." 모택동이 말한다: "틀렸다. 주왕이 실패한 주요원인은 군사적으로 병력을 나누어 지키게 하며, 소극적으로 방어하는 전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주무왕이 사용한 것은 병력을 집중시켜 우세한 병력으로 각개격파를 했다. 그래서 주왕은 패배하고, 주무왕이 승리한 것이다." 모택동은 추가해서 말한다: "장개석은 <봉신연의>를 보지 않은 것같다. 봤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같다."

 

이상의 몇 가지는 모택동의 주왕에 대한 평가이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하여 우리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이들 역사의 진상은 쉽게 발굴될 수 있다. 다만 유생이 이천년간 세뇌시킨 위력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진시황과 같은 사람은 오랫동안 폭군의 이미지로 존재했다. 명청시기의 제왕은 188명의 황제를 모셨느넫, 심지어 진원제 사마예, 송고종 완안구까지도 끌어들여 수를 채웠다. 그런데 진시황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모주석은 말했다: 권군소매진시황(勸君少罵秦始皇), 분갱사업요상량(焚坑事業要商量), 조룡혼사업유재9祖龍魂死業猶在), 공학명고실비강(孔學名高實秕糠).

 

그리고 조조가 있다. 지금까지 대간신의 이미지였다. 경극에서 백검(白臉, 악인)의 대명사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조조를 욕하는데 그가 성안의 사람들을 도살한 것때문이 아니라, 그가 공융이나 최염같은 명문세가의 인물을 죽였다고 욕한다. 긜고 그가 조정에 불충했다고 욕한다.

 

다만 모주석은 이렇게 말한다: "왕사월천년(往事越千年), 위무휘편(魏武揮鞭), 동림갈석유유편(東臨碣石有遺篇)

 

우리는 모주석이 반드시 '번안'해야 한다고 말한 이들 역사인물을 보았다. 제신(주왕)은 귀족, 제사장에게 밉보였고, 진시황은 유생에게 밉보였으며, 조조는 명문거족에 밉보였다. 이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다. "역사의조불의세(歷史宜粗不宜細)" 이는 바로 역사를 '굵게' 봄으로서 그 배후의 '가는' 진상을 가리려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상주왕이 오명을 얻고 다시 그 오명을 벗은 역사과정을 살펴보았다. 여러분들이 두 가지 점을 명확히 알았으면 좋겠다.

 

첫째, 역사는 현실을 위해 쓰인다.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유생이 주왕에게 오명을 씌운 것이나, 진시황에게 악명을 덧씌운 것이나, 왕안석이 대간신이라고 한다거나, 옹정제는 황위를 부정하게 얻었다거나 모두 현실적인 목적이 있다. 사대부계급의 이익과 발언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유가의 기준'으로 폭군, 간웅을 정의하고, 유생들은 영원히 '출니어이불염(出泥淤而不染)'의 연꽃이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 모든 것은 역사의 일부분이다. 역사와 관련된 결(決)과 의(議)는 모두 역사의 일부분이다. 모주석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수정주의를 내놓고, 손자들이 반대한다. 이것이 바로 변증법중 '부정의 부정'이다. 주왕의 명예회복은 3천년만에 이루어졌다. 이 삼천년간 그는 이미 문학창작에서 폭군의 이미지로 반면교사의 전형이었다. "미네르바의 버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역사는 결국 역사에 의해 다시 정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