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주유(周瑜): 그를 폄훼한 것은 나관중이 아니다.

중은우시 2020. 9. 27. 23:37

글: 채휘(蔡輝)

 

"주유는 분노가 가슴에 가득 찼고, 말에서 떨어진다. 좌우는 급히 그를 구해서 배로 돌아온다. 그때 병사가 와서 전하기를 현덕, 공명이 산꼭대기에서 술을 마시면서 음악을 즐기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주유는) 장탄식을 하고, 좌우에게 붓과 종이를 가져오게 하여 오후(吳侯)에게 글을 쓴다. 그리고 여러 장수를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진충보국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나에게 준 명이 다했다. 그대들은 오후를 잘 모셔서 대업을 함께 이루도록 하라!" 말을 마치고 혼절한다. 그리고 서서히 깨어나더니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하며 말한다: "어찌 나 주유를 낳고, 다시 제갈량을 낳으셨습니까' 몇번 소리를 지르고는 사망한다. 나이 36세이다."

 

<삼국연의> 제36회 <시상구와룡조상(柴桑口臥龍弔喪), 뇌양현봉추이사(耒陽縣鳳雛理事)>에 이 묘사는 너무나 생생하다. 문학성을 따진다면 주유는 소설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는 편협하고, 질투심강하며, 자존심강하여 결국 제갈량과 유비로 인하여 홧병으로 죽게 된다. 

 

기실 정사의 주유는 "성격과 도량이 넓고, 솔직하여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일찌기 노장 정보(程普)와 사이가 나빴는데, "정보가 자신이 나이가 많다는 것을 가지고 여러번 주유를 모욕했다." 주유는 그러나 계속 피하고 양보하여 결국은 정보까지도 그에게 탄복하여, "주공근(주유의 자가 공근)과 사귀는 것은 좋은 술을 마시는 것같아서, 스스로 취하는 줄도 모르게 된다"고 말하게 된다.

 

주유는 무장이고, 적벽대전에서 군대를 이끌고 대첩을 거두었으나, 돌연 병으로 사망한다 나이 겨우 35살이었다(삼국연의에서는 36세라고 하였으나, 만(滿)나이가 아닌 세는 나이(虛歲)일 것이다). 역대이래로 그의 죽음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손권이 암살했다.

둘째, 주유는 심혈관질병을 앓고 있었다.

셋째, 결핵 혹은 독감으로 죽었다.

넷째, 흡혈충병에 죽었다.

다섯째, 주유는 가족유전병을 앓았다.

 

<삼국지>에는 주유가 병사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삼국연의>에는 주유가 홧병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다. 주유를 이렇게까지 좋지 않게 묘사한 것에 대하여 나관중을 욕할 것만은 아니다.

 

주씨집안은 백년간 고관을 지낸다.

 

주유는 175년에 태어났고, 여강서(廬江舒) 사람이다(현재의 안휘성 합비시).

 

주씨집안은 관료가문이다. 고조부인 주영(周榮)은 한장제때 관직에 나가 상서령을 지낸다. 동한은 한성제(기원전51-기원전7년)때부터, 정무는 모두 상서대에 귀속된다. 상서령은 상서대의 총책임자이고, 직접 황제에 책임진다. 한나라때 조회가 열리면 각 관료가 좌석을 이어서 앉는데, 오직 상서령, 사례교위, 어사중승만이 따로 좌석을 깔고 앉는다. 이를 통해 황제의 총애가 깊은 것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삼독좌(三獨坐)"로 불리웠다. 다만 행정서열상으로 상서령은 소부(少府, 황실재무, 생활을 책임지는 기구)에 속하여 연봉이 겨우 천석(千石)이다. 나중에 관료사회의 부침으로 주영은 여러번 좌천된다. 사망할 때, 한화제는 20만전을 하사하고, 아들 주흥(周興)에게 낭중(郎中, 상서령의 속관)을 음서로 내린다.

 

주영의 손자 주경(周景), 증손자 주충(周忠)은 태위(太尉)를 지냈다. 태위는 진,한때 최고의 무관직위이다. 삼공(三公)중 한 명이었고, 감찰을 책임지고, 군대를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다.

 

주씨집안은 고관이 대를 이어 나왔고, 전후로 백년에 이른다.

 

주경, 주충은 모두 주유의 백증조부 일맥이다. 주유의 증조부의 일맥은 좀 약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심지어 주유의 할아버지와 증조부는 이름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다. 주유의 부친 주이(周異)는 낙양령(洛陽令)을 지낸다. 비교적 일찍 사망해서, 주유는 '십여세'때 가장이 된다. 기실 주유에게는 형이 한 명있었다. 아마도 서출일 것이다. 역사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주유는 손책과 같은 나이이고, 어려서부터 교분이 있었다. 15살때, 주유는 자신의 집을 손책에게 주어서 거주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주유는 그때 이미 집안 일을 주재했던 것이다.

 

유비와 손권이 결맹을 맺을 때, 유비는 주유와의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손권에게 이렇게 말한다: "공근(주유)은 문무책략이 만인지영이다. 그의 그릇과 도량이 큰 것을 보면 오래 남의 신하로 있지는 않을 것같습니다." 확실히 유비는 주씨집안과 손씨집안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몰랐던 것같다.

 

소교는 단지 주유의 첩이다.

 

주유가 손책과 교분을 맺게 된 것은 그가 다시의 참어(讖語) 하나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하늘의 뜻으로 유씨를 대신하는 자는 반드시 동남에서 일어난다" 진나라때부터 이런 설은 싹을 틔웠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은 항상 '동남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 계속 동쪽으로 순유하여 그 기운을 누르려 하였다.

 

참위는 진한시기에는 아주 유행했었다. 특히 동한말기, 참위학이 크게 성행한다.

 

손책이 나중에 원술에게 투신하고, 원술은 그를 보내 강동을 정벌한다. 당시 주유의 숙부인 주상(周尙)은 단양(丹楊, 지금의 안휘 선성시)에서 태수로 있었는데, 주유는 단양군을 이끌고 손책에 의탁한다. 손책은 양초와 병마를 받아들이고, 주유에게 다시 돌려준다. <삼국지>에 "단양은 산이 험준하고, 백성들은 힘이 세다" 민중은 "무술을 좋아하고 싸우기를 즐기며 힘이 있는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당시의 '정예군이 배출되는 지역'이었다.

 

얼마 후, 원술은 사촌동생 원윤(袁胤)을 단양태수로 보낸다. 주유와 숙부는 원술에 의해 수춘(壽春, 지금의 안휘성 회남시 수현)로 보내어진다. 원술은 주유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주유는 그러나 원술을 좋게 보지 않았다. 자청하여 궁벽진 거소(居巢, 일반적으로 지금이 소호시로 본다)로 가서 일한다. 사실상 피한 것이다.

 

건안2년(197년) 손책이 독립한다. 다음 해 23살의 주유가 손책에게로 간다. 손책은 "친히 주유를 맞이했고, 건위중랑장을 수여한다." 노장 정보보다도 높은 직위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에는 갈등이 생긴다.

 

그후 주유는 환성(皖城, 지금의 안휘성 잠산시)을 공격하고, 심양군(尋陽郡, 지금의 호북성 황매현)과 강하군(江夏郡)을 토벌하며, 예장군(豫章郡, 지금의 강서성 남창시)과 여릉군(廬陵郡, 지금의 강서성 길안시)을 평정하여 강동의 국면을 안정시킨다.

 

환성을 공격할 때, "교공(喬公)이 두 딸을 얻는데, 모두 국색(國色)이었다. 손책이 대교를 납(納)하고, 주유가 소교를 납(納)했다" 다만 <삼국지.오서.비빈전>에는 대교가 아예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를 보면 정처(正妻)가 아니라 할 것이다. 당시 주유는 이미 결혼했고, 소교는 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취처납첩(娶妻納妾)의 용어로 보더라도 첩으로 들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거유(巨儒)가 소인(小人)으로 묘사되다.

 

손책이 죽은 후, 주유와 장소(張昭)가 대권을 함께 장악하여 손권을 보좌한다. 손권은 당시 "지위가 장군이어서, 여러 장수들과 빈객(賓客)의 예의로 간략하게 하였는데, 오직 주유만이 공경하며 신하의 예절을 취하였다." 

 

조조의 대군이 남하할 때, 장소는 항복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장소는 강북사람이기 때문이다. 일찌기 한나라조정에서 효령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나중에 전란으로 강동에 피난왔다. 손오정권의 초기에 제갈근(諸葛瑾), 보즐(步騭), 장굉(張紘), 설종(薛綜), 엄준(嚴畯)등이 모두 강북에서 왔다. 그러다보니 중원정권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강동집단이 굴기하면서 특히 노숙(魯肅), 장흠(蔣欽), 주태(周泰), 진무(陳武), 정봉(丁奉)등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모두 여강 부근의 사람으로 손씨집안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진(晋)나라때의 거유 습착치(習鑿齒)는 <한진춘추>에서 이렇게 말했다: "손님이 묻기를: '주유, 노숙이 어떤 사람인가?' 주인이 대답한다: '소인이다'" 이는 사상 처음 주유, 노숙을 소인이라고 칭한 것이다. 두 사람은 "진시황이 오백년후에 금릉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는 말을 믿고 가장 노력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손권이 나중에 칭제하게 된다. 그러나 진시황이 말한 때로부터 430년이 지난 후이고 아직 500년이 되지 않았었다.

 

노숙은 일찌기 손권에게 이렇게 권한다: "제가 생각해 보건데, 한황실은 부흥할 수 없습니다. 조조를 제거할 수 없으니, 장군께서 강동에 자리를 잡아, 천하를 노리십시오." 손권은 주유, 노숙을 아주 신임했고, 평생 장소는 재상에 오르지 못했다.

 

후대의 어떤 학자들은 이런 의심을 품는다: 유비는 한실종친인데, 손오는 칭제를 할 명분이 없다보니 진시황의 말을 들먹인 것이 아닌가?

 

칭제의 고천문(告天文)에서 손권은 이렇게 말한다: "권(손권)은 동남에서 태어나, 하늘의 기운을 받았다....그 수가 본인에 이르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손권은 천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손권은 칭제한 후 이런 말도 한다: "주유가 아니었다면, 나는 황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를 보면, 주유의 최대 공로는 손권을 황제로 옹립한 것이다.

 

적벽대전후, 주유는 익주로 진공한다. 만일 승리를 거두었다면, 손오는 조위를 협공하는 모양을 갖출 수 있었다. 불행히도 주유는 급사한다. 손권이 비록 "성격에 의심이 많고, 시기심이 강하여 마구 사람을 죽였지만" 그렇다고 이럴 때 주유에게 손을 쓸 리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두목(杜牧)은 그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당나라에 이르러, 주류의 견해는 주유를 칭찬하는 입장이었다. 이백은 <적벽가송별>에서 이렇게 적었다:

 

二龙争战决雌雄,赤壁楼船扫地空。

烈火张天照云海,周瑜于此破曹公。

君去沧江望澄碧,鲸鲵唐突留馀迹。

一一书来报故人,我欲因之壮心魄.

 

독서인은 건공입업을 갈망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좌절하기 마련이다. 두목은 시에서 이렇게 적었다.

 

동풍불여주랑편(東風不與周郞便)

동작춘심쇄이교(銅雀春深鎖二喬)

 

그 뜻은 동풍이 주유를 돕지 않았더라면, 대교, 소교는 조조가 빼앗아 갔을 것이라는 말이다. 

 

기실 적벽대전은 화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조의 부대는 여러 곳에 주둔해 있었다. 손류연합군과 반복하여 격전을 벌였다. 그런데, 두목이후로 사람들은 '주유는 운이 좋았던 것일 뿐, 진정한 명장은 아니다'라고 인식하게 된다.

 

북송초기, 오기(吳起), 손빈(孫臏), 염파(廉頗), 한신(韓信)등이 모두 무성묘(武聖廟) 정전(正殿)에서 쫓겨나, 무하(廡下)로 내려간다. 관우, 장비도 거기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주유는 여전이 대전위에 남아 있었다.

 

북송초기, 정윤지쟁(正潤之爭)이 나타난다. 구양수는 <정통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고로 왕자가 흥하려면, 반드시 덕이 많아 천명을 받거나, 혹은 공로가 커서 백성들을 살리거나, 혹은 대대로 점점 쌓아서 왕업을 이루어야 한다. 어찌 덕 하나만 가지고 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조위가 정통이고, 손오, 촉한은 나라가 아니라고 하게 된다.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쓸 때도 역시 조위를 정통으로 서술한다. 주희에 이르러, '제촉구위(帝蜀寇魏)'의 영향이 점점 커지게 된다.

 

남송은 영토가 한켠에 치우쳐 있으면서 '천명이 소재한다'고 주장해야 했다. 그래서 촉한을 정통으로 세운다. 그후 제갈량의 지위는 점점 주유를 넘어서게 된다.

 

나관중은 기실 주유를 폄하하지 않았다.

 

원나라때 <삼국지평화>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작자는 조조의 군대가 쳐들어 오는데, 주유는 '소교와 매일 놀았다', 손권이 그에게 한배가득 비단과 금은주화를 보냈는데, 주유는 이를 받은 후에도 병력을 움직이지 않았다. 제갈량, 노숙이 계속 요청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제갈량은 할 수 없이 이렇게 말한다. "조조가 동오를 정벌하려는 것은 대교, 소교를 얻기 위함이다" 그러자 동오가 분노하여 출동한다.

 

적벽대전에서 주유는 제갈량을 계속 배척할 뿐아니라, 전쟁후에도 장비와 충돌하여 연전연패한다. 결국 유비에게 길을 빌려 익주를 치려 했으나, 제갈량에게 기습당해서 홧병으로 죽는다.

 

이런 스토리는 아마도 송나라때의 "설삼분(說三分)"의 평서예인들이 만들어낸 것일 것이다. 송나라는 도시가 발전하여, 평민문화와 귀족문화가 서로 나뉘어지게 된다. 엘리트문화에서 위, 촉은 비교적 널리 주목을 받았다. 당시, 송사에서 자주 읊는 대상이 된다. 그러나, 손오에 대하여 쓴 당시, 송사는 비교적 적다. 

 

나관중이 <삼국연의>를 쓸 때, 사료에 근거하여, 여러가지 주유의 오점을 시정한다. 예를 들어, 주유가 제갈량을 죽이려는 동기를 '질투의 사심'에서 주인을 보호하려는 마음으로 바꾼다. 다만 제갈량이 여러번 주유를 놀리는 내용은 그대로 남겨두었다.

 

명나라 가정본 <삼국연의>에 따르면, 주유의 이미지는 비교적 긍정적이다. 청나라 모종강(毛宗崗)의 점평본때 상황은 크게 바뀐다. 관우를 높이고, 주유는 제갈량의 띄우기 위한 조역으로 전락한다. 학자 한방(韓放)의 <주유이미지생성사>의 통계에 따르면, 가정본은 주유의 이름이 들어간 회가 12개이고, 주유를 긍정적으로 그린 것이 5개이다. 모종강은 주유의 이름이 들어간 회가 5회뿐이고, 주유를 긍정적으로 그린 것은 단 1개이다. 모종강은 '봉추' 방통이 일찌기 주유의 수하로 재직했던 경력도 감춰버린다.

 

모종강본이 바로 나중의 통행보니다. 문학성은 더욱 강하다. 주유의 이미지는 이제 더 이상 만회할 수 없게 된다.

 

주씨집안의 3대는 모두 단명했다.

 

주유는 210년에 병사한다. 유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도중에 급병을 맞아, 어제 스스로 치료했다...." 주유는 건강했는데, 병이 들고 난 다음 날 스스로 죽을 줄 알았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 빠르다. 아마도 심혈관계의 질병이 아닐까 한다.

 

주유가 10여세때, 부친 주이가 사망한다. 역시 요절이라 할 수 있다. 주유의 큰아들 주순(周循)도 유장(儒將)의 풍모가 있었고, 손권이 적장녀를 그에게 시집보낸다. 그러나 229년, 주순도 병사한다. 주유의 둘째아들 주윤(周胤)은 죄를 지어 관직에서 파면된다. 239년 사면되는데, 조서가 내려가가도 전에 병사한다. 나이 겨우 30여세였다.

 

주유에게는 딸도 하나 있는데, 손권의 장남 손등(孫登)에게 시집갔다. 손드은 33살까지 살았는데, 주유의 딸은 수명이 어떠했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주씨집안의 3대가 모두 단명했다. 다만 동한말기, 삼국초기에는 전염병이 유행했다. 시간도 길었고, 범위도 넓었으며 사망율도 높았다. 곽가의 수명도 겨우 38세이고, 여몽의 수명은 42세, 제갈교(제갈근의 차남. 제갈량의 양자로 가서 후사를 이음)의 수명은 겨우 25세, 육연(육손의 장남)의 수명은 20살이 되지 않았다...당시 주유가 단명한 것이 그다지 특출난 것도 아니다.

 

주유가 흡혈충병으로 죽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다. 출토된 오간(吳簡)을 보면, '복심병(腹心病)'환자가 천명이 넘는다고 되어 있다. 장강유역에서 발견된 한나라때의 시신중에 대다수는 흡혈충병으로 죽은 사람이다. 다만 흡혈충병으로 인해 급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주유가 결핵, 감기등을 앓았다고 하는데 그것도 모두 급사하는 병은 아니다.

 

<삼국지>에는 주유가 남긴 두 편의 <시국론>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융중대>와 유사하다.

 

주유가 임종때 쓴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사람은 결국 죽는다. 단명하다고 하여 아쉬울 것은 없다. 다만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더 이사 명을 받들 수 없다는 것이 한탄스럽다.....천하의 일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사람이 죽을 때 하는 말은 선하다고 했다. 만일 내 말이 받아들여진다면 유(주유)는 죽어도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