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중국의 군사

상장낙마기(上將落馬記): 팡펑후이(房峰輝)와 장양(張陽)

중은우시 2020. 9. 12. 23:00

글: 유하(幼河)

 

1951년 4월, 섬서성 셴양(咸陽)의 마궈쉔(馬國選)은 아버지가 되었다. 마궈쉔은 셴양군분구의 군인이었다. 그는 출생지를 이름으로 삼아 아들에게 마셴양(馬咸陽)이라고 이름을 지어준다. 그 해, 마궈쉔은 딱 30살이었다. 군인은 생활이 안정되지 못했다. 셴양군분구에서 시베이군구(西北軍區)로 가고 다시 우한군구(武漢軍區)로 갔다. 마궈쉔의 업무는 계속 바뀐다. 자신을 따라다니며 고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마궈쉔은 처에게 아이를 데리고 고향인 샨시(陝西) 슌읍(旬邑) 상관장촌(上官莊村)으로 돌아가서 생활했다.

 

상관장촌은 전형적인 서북의 농촌이다. 빈곤하고 구석진 곳이다. 마셴양은 여기서 그의 동년생활을 보낸다. 9년후, 후베이 우창으로 간 마궈쉔은 후베이성 문화국장을 지내다가 병사한다. 나이 겨우 39살때였고, 관직은 정청급(正廳級)이다. 

 

그 해에 아들 마셴양은 9살이었다. 소학교에 다닐 때였고, 여전히 모친과 함께 서북의 작은 마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혼자서 시골에서 아들을 키우는 것은 원래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 마흔도 되지 않아 과부가 되었다. 그러니 서북에 사는 모친은 아주 힘들었다. 마궈쉔이 죽은 후, 마셴양의 모친은 두번 개가한다. 한번은 마셴양이 소학교에 다닐 때, 슌읍 현성으로 개가했고, 다음 번은 마셴양이 고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다시 옆의 빈현(彬縣)으로 개가했다.

 

모친이 두번째 개가했을 때, 마셴양은 모친을 따라 빈현으로 가서 고중을 다닌다. 이때, 마셴양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모친의 성인 "팡(房)"을 쓰고, 이름을 "펑후이(峰輝)"로 고친다. 그가 바로 나주에 총참모장, 상장이 되는 팡펑후이이다.

 

팡펑후이가 태어난 같은 해, 멀리 허베이(河北) 우창현(武强縣)의 장씨성의 집안에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팡펑후이의 부친은 군인이었는데, 이 아이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팡펑후이의 부친은 39살때 병사한 후 모친이 개가했는데, 이 사내아이의 부친은 40살때 처와 이혼하고 다른 가정을 꾸린다. 두 사람의 동년은 모두 모친을 따라 시골에서 살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인생에서의 전환점이 모두 군대에 들어가고 부터라는 것이다. 이 사내아이는 나중에 군위정치부주임, 상장이 되는 장양이다. 역사는 이렇게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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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펑후이는 상관장촌에서 어린 시절을 모두 보낸다. 다만 그는 그 곳의 환경을 좋아하지 않았다. 낡고 궁벽졌다. 곳곳에서 먼지가 휘날렸다. 마궈쉔은 일에 바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부친에 대하여 어린 팡펑후이는 인상이 그다지 깊지 않았다. 비록 모친을 따라 2번 개가했지만, 어려서부터 팡펑후이는 공부를 아주 잘했다. 아마도 절반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일 것이고, 절반은 그가 공부를 통해서 현상을 벗어나고 싶어서 죽어라 공부해서일 것이다.

 

9살때부터 길지 않은 시간내에 팡펑후이는 연이어 2명의 계부를 맞는다. 그렇게 남의 집에서 살아가는 맛은 다른 사람들이 알기 힘들 것이다. 어린 팡펑후이는 자신의 거취를 결정할 수가 없었고, 그저 모친을 따라 이사다녔다. 다만 어른이 된 팡펑후이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날이 결국 도래했다. 16살때, 팡펑후이는 고중을 졸업한다. 다음 해, 즉시 군대에 들어간다. 그 시대에 군인이 되는 것은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해에 멀리 허베이에 사는 장양도 부대에 들어간다. 문약했던 팡펑후이와는 달리 어렸을 때 장양은 몸이 탄탄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소장(小壯)이라 불렀다. 비록 부친과 멀리 떨어져, 모친과 함께 농촌에서 생활했지만, 어렸을 때의 장양은 즐겁게 자란다. 열정이 넘쳤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좋아했다.

 

어렸을 때 팡펑후이는 공부성적이 계속 좋았다. 그러나 장양은 달랐다. 겨우 소학교를 마친 후, 모친을 따라 농사일을 하면 했지,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려 하지는 않았다.

 

장양은 팡펑후이가 군대에 들어간 같은 해에 군복을 입는다. 서로 다른 점이라면 팡펑후이는 신장으로 갔고, 장양은 부친이 복역하는 63군이 있는 산시(山西)로 갔다는 것이다. 장양의 부친은 원래 아들이 군대에 입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만 장양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서, 그가 하고 싶어하는대로 놔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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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펑후이의 군대새이는 신장의 가장 하층 전사(戰士)로 시작한다. 겨우 3년만에 그는 배장(排長)으로 발탁된다; 다시 1녀니 지나 다시 21군 62사령부 작전훈련과 과장으로 발탁된다. 겨우 4년만에, 다른 사람들이 10년 걸리는 일을 해낸 것이다. 어렸을 때 공부를 잘했던 팡펑후이는 부대내에서 미친 듯이 돌진한다. 팡펑후이의 급속한 승진은 첫째, 나이의 우세, 둘째, 학습능력이 강했다는 것때문이었다.

 

공부를 팡펑후이는 계속 잘했었다. 모친이 두번째 개가하여 빈현으로 갔을 때, 빈현에서 공부하던 팡펑후이는 여전히 성적이 뛰어났다. 뛰어난 학습능력으로 팡펑후이는 부대내에서 금방 두각을 나타낸다. 다만 최종적으로 팡펑후이의 운명을 바꾼 것은 그가 지휘관과의 관계를 잘 처리하는 능력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남의 밑에서 살다보니, 팡펑후이는 일찌감치 눈치를 살피는데 능했다. 부대에 간 후, 팡펑후이의 이 재능은 바로 발휘된다. 그는 사소한 점만으로도 지휘관이 내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는데 능했다. 그가 작전훈련과 과장으로 있을 때, 팡펑후이는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부대의 나무를 이용하여 부대지휘관에게 가구를 만들어 주었다. 비록 나중에 누군가 고발하였지만, 결과는 흐지부지되었다. 이는 지휘관이 팡펑후이의 행위에 화를 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능력으로, 팡펑후이는 부대내에서 아주 잘 나간다. 20년도안 하층전사에서 한걸음 한걸음 승진하여 신장군구 보병제4사단 사단장의 위치까지 오른다. 농촌에서 온 아이가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어느 업종에 들어갔더라도 모두 잘 해냈을 것이다. 어떤 것은 나중에 배울 수 있는 것이지만 어떤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 나야 한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부러워해도 그대로 따라할 수는 없다.

 

하층의 경력에서 팡펑후이의 대부분 시간은 참모업무였다. 그러나, 장양은 달랐다. 그는 전사에서 반장(班長), 다시 지도원(指導員)에서 교도원(敎導員)까지, 그후에 정치처주임, 단정위, 이렇게 승진하면서 한 일은 모두 정치공작이었다. 소학교졸업밖에 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때 장양이 계속 승진하는데 발목을 잡았다. 이어진 몇년동안 그는 학력을 보완한다. 먼저 국방대학에 들어가고 나중에 중앙당교까지 간다.

 

1996년, 중앙당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장양은 인생이 바뀌게 된다.

 

먼저 포병1사 부정위의 직위에서 광주군구 163사 정위로 간다. 그는 36군에서 42군으로 옴기고, 서북에서 동남연해로 가는 꿈을 이룬다. 이 해에 그의 나이 45살이었다.

 

장양이 42군에 들어간 다음 해, 팡펑후이의 인생궤적에 변화가 발생한다. 란저우군구 제21집단군 부군장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때 팡펑후이의 나이 46살이었다.

 

두 사람은 농촌출신으로 이제 주년이니 되었다. 이미 납만궁현(拉滿弓弦), 축세대발(蓄勢待發)하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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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펑후이가 란저우군구 제21군 부군장으로 옮겨간 같은 해, 한 사람이 난주군구로 와서 군구사령원이 된다. 그가 바로 나주에 항간에서 서북랑(西北狼)으로 불리게 되는 궈보슝(郭伯雄)이다.

 

궈보슝은 란저우군구에서 합쳐서 6년간 일했었다. 이곳은 그가 성공을 거둔 기반이다. 지금 다시 옛 부대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전체 군구를 장악했다. 춘풍득의(春風得意), 금의환향하였다고 할 수 있다. 궈보슝은 팡펑후이보다 6살이 많다. 그가 온 것은 팡펑후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궈보슝의 고향은 샨시(陝西) 리췐(禮泉)이다. 팡펑후이는 샨시 슌읍이다. 같이 셴양에 속한다. 두곳은 서로 100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다. 부대에서 고향사람이라는 관념은 아주 강하다. 궈보슝과 팡펑후이는 모두 고향을 떠나 같은 군구에서 일하는 것이니 자연스럽게 친근감을 가지게 된다. 이때부터 진정 교류가 이루어진다. 항간에서 떠도는 것처럼 팡펑후이가 고향사람인 궈보슝은 자형(姉兄)이라고 불렀다는 것도 바로 이때이다.

 

서북랑의 도움으로, 팡펑후이는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궈보슝이 란저우군구로 돌아온 다음 해, 팡펑후이는 소장(少將)으로 승진한다. 다시 1년후 21군 군장이 된다. 궈보슝을 따르면서 팡펑후이의 군대내에서의 승진은 아주 순조롭게 된다.

 

역사는 기복이 있지만 적당한 때가 있고, 절묘한 안배가 있는 법이다.

 

모두 빠른 승진의 뒤에는 반드시 두터운 뒷산이 있다고 생각한다. 팡펑후이에게는 고향사람인 궈보슝이 있었다. 그렇다면 장양은 어땠을까? 그에게는 쉬차이허우가 있었다.

 

2000년, 쉬차이허우는 이미 중앙군위에 들어갔고, 총정치부 부주임이 된다. 그리하여 전군의 인사, 정법, 기율등 대권을 장악한다. 쉬차이허우의 도움으로 7년만에 장양은 42군 정치부주임에서 일약 광저우군구 정치위원이 된다. 인생은 이런 것이다. 누구는 죽어라 노력하지만, 누구는 쉽게 발탁된다. 이것은 노력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방향을 제대로 고르지 못한 것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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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팡펑후이는 여전히 궈보슝을 따른다. 걸음은 더욱 빨라진다. 2002년, 궈보슝이 부총참모장의 직위에서 일약 승진하여 중앙군위 부주석이 된다. 그리고 이 위치에 10년간 앉아 있는다. 다음 해, 팡펑후이는 천리를 넘어 서북에서 동남으로 간다. 21군군장에서 광주군구 참모장이 된다. 

 

2004년은 샨시, 허베이라는 서로 전혀 만날 일이 없는 곳에서 온 두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가 된다. 이 해에 두 사람은 광저우군구에서 처음 만난다. 그때 팡펑후이는 광저우군구 참모장이고, 장양은 정치부주임이었다. 광저우군구에서 장양, 팡펑페이는 3년반동안 같이 지낸다.

 

장양은 술을 좋아하고, 호쾌하다. 술잔을 들면 바로 비운다. 직위가 높아졌지만, 그렇다고 상투적인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아주 실질적이다. 그리고 광저우에서 10여년간 지내면서 이미 날개가 튼튼해 졌다.

 

그 때 이미 고위직에 올라 있던 장양은 일찌감치 허베이 농촌의 그런 소박한 모습에서 벗어나 있었다. 젊었을 때의 열정적이던 장양은 일찌감치 대담하고 광망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람이 광망해지면 바로 탐욕스러워진다. 항간에 장양의 별명은 장마대(張麻袋)였다. 그 뜻은 장양이 돈을 받고, 돈을 줄 때 모두 마대자루에 담았다는 말이다.

 

팡펑후이는 어땠는가? 2007년 광저우군구에서 베이징군구사령관으로 이동한다. 처음 대군구의 사령관이 된 것이다. 이때 나이는 겨우 56세이다. 당시 7대군구 사령관 중에서 가장 젊었다. 겨우 4개월만에, 다시 공산당 중앙위원이 된다. 56세의 나이로, 란저우, 광저우, 베이징 3대군구에서 일한 경력을 지니고 있으니, 이때의 팡펑후이는 이미 군대내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장양과 마찬가지로, 농촌출신의 팡펑후이도 높은 지위에 오른 후 신속히 타락한다. 베이징군구의 사령관으로 있을 때, 군대의 토지를 대거 매각한다. 어느 병원의 땅만 해도 47억위안에 매각한다. 그리고 군구의 수십동 건물을 철거한 후 10억위안을 들여 5성급호텔을 건설한다.

 

장양은 술을 좋아했지만, 팡펑후이는 먹는 것을 좋아했다. 특별히 2명의 주방장을 멀리 광저우로 보내어 요리를 배우게 했다. 자신을 위해 요리하게 하기 위하여. 팡펑후이 주변의 사람에 따르면, 그가 돌연 뭔가를 먹고 싶어지면, 주방장은 즉시 만들거나, 사와야 한다, 만일 만들지도 못하고 사오지도 못하면 븍시 젓가락을 집어던지고 쫓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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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양에 있어서 2008년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해이다. 이 해에 그는 항격응동(抗擊凝凍), 원촨대지진지원, 올림픽홍콩지역보안, 미얀마의료지원, 중국-태국공동반테러등 중요 군사행동을 완성했고, 뛰어난 성적을 올린다.

 

팡펑후이는 2009년 10월 1일, 열병총지휘관의 신분으로 60주년 국경절 열병을 지휘한다. 그의 인생에서 최고 정점이 된다. 2010년, 장양, 팡펑후이는 나란히 상장으로 승진한다.

 

같이 입대하고, 같이 광주군구로 가고, 같이 상장으로 승진한 것이다. 당초 농촌소년에서 지금까지 두 사람은 42년이 걸렸다.

 

궈보슝이 수사를 받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던 때, 민족반점의 한 룸에서 팡펑후이는 궈보슝의 가족들의 앞에서 큰소리친다: 누구든지 감히 노수장(老首長)을 건드린다면, 내가 그를 총살해 버리겠습니다. 그때의 팡펑후이는 일찌감치 당초 상관장촌의 그 성적이 뛰어난 소년이 아니다. 그는 기세등등했고 사람들이 준 별호는 "팡일창(房一槍, 창은 총이란 뜻임)"이다. 

 

팡펑후이의 광망함과 비교하면 장양은 전혀 달랐다. 쉬차이허우가 조사를 받은 후, 장양은 최소한 13번이상 쉬차이허우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장양에게는 또 하나의 신분이 있었다. '전군구텐(古田)정치공작회의정신관철실천영도소조'의 조장이었다. 이 소조의 핵심업무는 바로 궈보슝, 쉬차이허우의 유독(流毒)을 숙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전군의 궈보슝, 쉬차이허우 유독을 숙청하는 것을 이끌던 인물이 바로 최대의 유독이었던 것이다. 

 

어떤 일은 진상이 드러날 때, 비로소 그 황당함을 알아차릴 수 있다. 2017년 8월, 장양은 조직과의 면담을 받고, 3개월후 흰 끈을 대들보에 걸고 일생은 끝낸다. 팡펑후이는 어떠했는가? 장양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아마도 그에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고위층이 그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장양이 자살한 1개월후에 팡펑후이는 낙마하고 수사를 받고, 1년후 무기징역에 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