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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대외관계

블라디보스톡 할양160주년: 극동화인소망사(極東華人消亡史)

by 중은우시 2020. 9. 2.

글: 독서시간(讀書時間)

 

2020년 7월 1일은 블라디보스톡 도시건설 160주년 기념일이다(실제 할양시기는 1860년 11월임). 이는 우수리강 동쪽의 토지가 중국에서 벗어난지 160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이 토지의 중국인은 영토할양으로 바로 소실되지 않았다. 1938년 소련이 각종 수단을 써서 중국인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 글에서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살았던 중국인의 생활유적과 경력을 알아보고자 한다.

 

1. 성황(盛況)

 

현재 갈수록 많은 중국관광객들이 블라디보스톡으로 여행을 온다. 모두 이곳의 해산물을 맛보고, 교회앞에서 앞다투어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1세기전에, 이 번화한 상업거리를 만들고 가졌던 사람들이 중국인이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들은 또 얼마나 처량하고 피비린내나는 방식으로 이 토지를 떠나야 했던가?

 

러시아는 1858년 <아이훈조약>과 1860년 <베이징조약>을 통하여, 마침내 2백여년간 꿈에도 그리던 흑룡강유역의 토지를 차지한다. 비록 17세기중엽이후, 러시아가 시베리아토지를 점령했지만, 이들 토지는 극도의 추위뿐아니라, 태평양의 바다로 나가는 항구가 없었다. 그래서 개발가치가 거의 없었다. 새로 얻은 100여만킬로미터의 간척개발이 가능한 토지로 인하여 러시아는 진정 동서양에 걸치는 국가가 된다. 오늘날 러시아의 바이칼호 이동의 70%이상의 인구는 외흥안령이남, 우수리강이동의 옛 중국영토에 살고 있다. 이를 보아도 이 지역이 러사이에 얼마나 큰 전략적가치를 지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제정러시아정부는 새로운 영토에 두 개의 대도시를 건설한다. 하나는 하바로프스크이고 중국인들이 얘기하는 백력(伯力)이다. 17세기 최초로 흑룡강유역을 식민화했고, 토착주민인 다오르인, 어원크인을 도살한 식민두목 하바로프를 기념해서 도시 이름을 지었다; 또 하나는 바로 블라디보스톡인데, '동방을 지킨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두 개의 이름은 중국인과 다른 아시아인들에게 모두 아주 강력한 식민침략의 색채를 느끼게 반든다.

 

중국과 러시아가 <베이징조약>을 체결하기 전에, 우수리강동쪽에 한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때 청나라정부는 성경(盛京), 개원(開原), 유변(柳邊)이외의 동북지방을 만주족의 지역으로 보아 한인의 출입을 금지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측의 통계에 따르면, 1860년 이곳에는 겨우 200여명의 유동성이 아주 강한 한인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인삼채취, 물고기잡이등에 종사했고, 도망쳐온 범죄자들도 많았다.

 

새로 점령한 토지를 개발하기 위하여, 제정러시아정부는 한편으로 유럽영토에서 이민을 조직한다. 그러나 유럽과의 거리가 너무 멀다보니 도보로 걸어서는 1,2년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민효과가 그다지 두드러지지 못했다. 1861년부터 1881년까지 겨우 1.1만명의 유럽인들이 극동지역으로 이민왔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노동자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상당한 수량의 조선노동자들도 받아들인다. 중국이민은 대량으로 러시아의 극동지역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들 중국이민은 대부분이 산둥(山東) 사람들이었다. 육로를 통해서 수분하에서 러시아영토로 진입하기도 하고, 산동반도에서 배를 타고 직접 블라디보스톡으로 가기도 했다.

 

1886년, 극동의 중국인수량은 2.75만명에 이른다. 1897년에는 4.1만명으로 늘어난다. 1911년에는 11.1만명이 된다. 1차대전전에, 극동지구 중국인은 이미 20만명가량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 시기 중국인은 러시아극동인구의 약 10-15%를 차지했다. 러시아인의 다수는 군인이나 개간농민이었기 때문에, 블라디보스톡같은 대도시에는 중국인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예를 들어, 1897년 인구조사때 블라디보스톡의 인구는 28,993명인데, 그중 중국인의 수량이 12,577명이다. 만일 대량의 철새같은 중국계 유동인구까지 포함하면 중국인은 블라디보스톡인구의 절반을 넘었을 것이다.

 

초기의 중국인은 블라디보스톡에서 공사건설과 관련한 업종에 종사했다. 부유한 중국인은 대형공사를 도급받았고, 그후에 빈곤한 중국노동자들을 모아서 건축공사를 했다. 중국인은 시베리아철도 극동구간과 저명한 블라디보스톡 기차역을 만들었다. 이 기차역은 시베리아대철도의 종착역이다. 블라디보스톡의 다른 대표적인 건축물인 연해주이사회건물은 중국상인 류쿠이모(劉寇默)이 건축했고, 전보빌딩은 쌍신윈(桑新雲)이 만들었으며, 개선문은 슈체롄(舒徹聯)이 만들었다. 여러 러시아 군영도 중국계 건설회사가 만들었다.

 

블라디보스톡 도시가 건설된 후, 중국계는 상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1878년, 블라디보스톡의 114개 기업중 57개가 중국인의 것이었다. 1895년 화상기업의 수량은 126개로 늘어난다. 러시아인이 연 기업은 겨우 58개였다. 다른 외국인들이 개설한 기업은 16개였다. 시베리아철도가 개통되면서 블라디보스톡의 규모는 급격히 확대된다. 중국계기업도 갈수록 많아졌다. 1912년 블라디보스톡에 등기된 중국계기업은 1089개로 늘어난다. 블라디보스톡 최대의 은행인 쿤스터 & 알리빌스의 파트너인 아도프 바시리에프스키는 그의 <아무르연안상업역사수필>에서 이렇게 적었다:

 

"중국인은 일찌감치 한 골목에서 또 다른 골목으로 나아가 전체 도시로 발전해 나갔다...전후좌우의 다른 점포들을 밀어냈다....전체 구역을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했다. 의문의 여지없이, 중국인은 경제적으로 아주 강대하다. 점점 노동력과 상품시장도 장악했다."

 

필자가 블라디보스톡을 고찰한 바에 따르면 20세기초, 블라디보스톡의 가장 주요한 상업거리와 가장 번화한 도심구역에 상당한 부분을 중국인이 소유하고 있었다. 오늘날 블라디보스톡의 가장 중요한 상업거리인 아레우츠크가, 스베트란나가, 해군원수푸진가의 대량의 상업건물은 차이씨(蔡氏), 타이차이링(邰彩玲), 리리하고(李立浩)등 실력있는 중국상인들이 소유했다.

 

또 다른 전설적인 중국상인은 지펑타이(紀鳳臺)이다. 1901년 20만루블을 투자하여 블라디보스톡 최대의 상행중 하나인 K상행을 만든다. 러일전쟁때 그는 1,500대의 차량, 6,000마리의 당나귀의 운수대를 조직하여 러시아군의 후방물자조달을 했다. 이를 보면 그가 보유한 재산이 어느 정도일지 알 수 있다.

 

그외에 중국인은 극동의 근해운수와 흑룡강내하항운을 장악했다. 1910년을 전후하여 블라디보스톡에 등기된 600여대의 상선중에서 다수는 중국인이 소유했다. 이들 상선은 크기가 크지는 않았고, 일반적으로 50톤가량이다. 다만 중국인은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러시아기업가들이 이 업종에 끼어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제정러시아 국가두마가 외국인의 극동에서의 근해운수업을 금지할 때까지.

 

종합적으로 말해서, 제정러시아시기 중국인과 러시아인은 공동으로 극동지역을 개발했다. 러시아인은 통치자이고, 군정대권과 금융, 광산등 핵심산업을 장악했다. 중국인이 일반적인 업종에서 우세를 보였다. 이는 남양지구에서 유럽식민자들과 중국인이 합작한 방식과 아주 유사하다. 중국인은 인구에서 방대한 비율을 점하고, 영국령의 동남아지역의 인구구조와 비슷했다. 만일 제1차세계대전과 10월혁명으로 역사가 바뀌지 않았다면, 중국인은 아마도 계속 이 지역에 이민가고 이후 이 토지에서 생활하는 주요한 민족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은 아마도 동북아의 싱가포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2 시월혁명을 전후하여

 

1917년의 시월혁명은 중국인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볼세비키는 사람은 평등하고, 모든 압제를 없애겠다고 했다. 중국인은 극동에서 살아가는 것은 괜찮았다. 국내의 동포들보다 잘 살았다. 다만 지위는 확실히 그곳의 유럽인들만 못했다. 중국인은 적극적으로 혁명에 참가한다. 볼세비키와 함께 반동통치를 전복시키고자 했다. 자신의 노력으로 새 삶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바로 상우진스크 중국인대표대회에서 소비에트정권에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썼던 것처럼:

 

"우리는 러시아노동자농민의 이익을 자신의 사업으로 보고, 혁명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승리과실을 우리도 반드시 보위할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전체 러시아경내에 최소 5만의 중국인노동자들이 시월혁명과 그후에 국내혁명전쟁에 참가했다. 각지에는 여러 '중국단', '중국영', '중국지대'가 나타났다. 극동지구의 가장 유명한 것은 중국인 신계무(辛繼武)가 조직한 유격대였다. 인원규모는 3,300명에 달했다. 우수리강유역에서 활약했고, 백군에 큰 타격을 입힌다. 백군이 블라디보스톡을 점령한 후, 극동철로의 중국인노동자들은 대파업에 참가하여 백군의 공급과 군사배치를 크게 교란시켰다.

 

시월혁명은 확실히 어떤 측면에서는 중국인의 처지를 개선시켰다. 예를 들어 중국노동자의 대우는 제정러시아시대보다 훨씬 좋아졌다. 더 이상 감독관의 채찍을 맞지 않아도 되었다. 노동시간도 크게 단축된다. 소련당국은 중국인클럽을 만들게 해주었고, 중국어학교도 개설했다. 다만 중국인은 그들이 기대한 자유와 평등은 얻어내지 못한다. 중국인은 극동의 '상업민족'이고 자연히 신정권의 사유재산을 소멸시키려는 목적과 충돌했다. 1921년부터, 소련당국은 계속하여 중국상회를 압류했고, 중국상인들에게 국가공채를 구매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중국인의 해외송금도 엄격히 통제한다. 그리하여 중국상인은 극동에서 살아가기가 계속 힘들어진다. 이때 블라디보스톡이 국내에 보고한 내용은 이러했다:

 

"소련정부가 성립된 후, 화교의 손실은 화은1천여만원, 화교피해는 20명이상의 목숨을 잃었다. 이 두 가지는 단지 블라디보스톡 한 도시의 것이다. 모두 확인가능한 것이다. 확인하지 못한 사건이나 다른 지역의 금전, 생명 손실은 얼마나 될지 알 수가 없다."

 

신정부는 호구등기와 일상용품배급제도를 실행한다. 절대다수의 중국인은 국적이 없으므로 배급을 받을 수 없었다. 생활은 갈수록 힘들어진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소련이 점점 혁명시기의 민족정책을 버리고, 점점 대러시아주의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비러시아민족, 특히 비유럽인인 역량이 비교적 강대한 아시아민족에 대하여 배척, 동화 심지어 소멸정책을 쓰게 된다. 솔녀정부는 이들 민족에 대하여 안심하지 못했다. 그래서 국토안전의 위협으로 보았다. 그후 연이어 전체민족이 축출당하고 진압당하거나(중국인), 강제이주당했다(조선인, 체첸인, 칼마크인).

 

그러나 이때 소련은 '15계획'을 추진했다. 노동력이 부족한 극등은 중국인이 필요했다. 그렇게 하여 대량의 중국노동자들이 국영기업에 흡수된다. 그리하여 국가에서 고용한 노동자가 된다. 통계에 따르면, 이때, 전체 연해주의 노동자중에서 중국인노동자의 비율이 40%에 이르렀다. 주로 중공업, 광업, 벌목업과 어업등이다. 중국인은 비록 상업에서 배척되고 축출당했지만, 노동력시장에서는 여전히 참여하고 있었다.

 

1926년, 극동의 중국인수량은 6.3만으로 줄어든다. 전쟁전에 비하여 절반이상이 줄어든 것이다. 다만 이곳의 중국인은 정착하기 시작하고, 점점 이 국가의 문화를 받아들인다. 중국인은 교민으로 거추하고 소수민족이 되어갔다.

 

3. 피비린내나는 최후

 

그러나, 1929년이후 중동로사건이 일어난 후 중소관계가 악화된다. 소련의 중국인에 대한 탄압은 점점 공개적이 된다. '마음대로 중국상인의 가게를 닫고, 마음대로 화교의 재물을 몰수하며, 강제로 기부받고 잡세를 거두었다." '9.18사건'이후 소련은 더욱 중국인을 극동의 평화를 위협하는 불리한 요소라고 인식한다. 중국인에 대한 진압과 축출정책이 점점 수면위로 떠오른다. 1934년, 극동지구의 중국인은 3.1만명으로 감소한다. 이는 1926년보다도 절반이상 줄어든 것이다.

 

그 결과 이전에는 비교적 부드러운 경제수단으로 중국인을 제한하여 축출하려는 목적을 달성했다면, 1935년이후 소련은 비인간적인 수단으로 중국인을 진압 소멸시킨다. 1936년 4월17일 소련공산당 볼세비키청치국은 결의를 통과시켜 연말전까지 블라디보스톡 백만가의 중국인을 정리하도록 명령한다. 집행기구는 지방정부가 아니라, 내무인민위원회 극동변강구관리국이었다.

 

중국의 항의를 우려하여 소련공산당 볼세비키정치국은 6월 17일, 다시 극동변강지구에 지령을 내린다:

 

"금후 행동을 더욱 조심하고, 구실을 주지 말라. 행동은 중국인에 대한 것이며, 축출과정에서 외교인민위원회와 협조하고 금년이 넘기 전에 백만가처리를 완성하라."

 

이해에 모두 4천여명의 블라디보스톡 중국인들이 귀국당한다.

 

1937년 6월, 소련 내무인민위원회는 간첩, 파괴분자를 진입하는 결의를 반포한다. 12월 22일,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예조프는 기밀명령을 내린다.

 

"모든 중국인은 소속국적을 불문하고, 도발행위, 테러의도가 있으면 즉시 체포하라."

 

12월 29일 밤, 극동에서 제1차 대규모중국인체포활동이 전개된다. 내무인민위원회는 '중국행동'이라고 명명한다. 이번에 1,100여명의 중국인이 체포되었다.

 

1938년 2월 1일 소련공산당 볼세비키정치국은 <내무인민위원회 극동상관문제>의 결의를 통과시킨다. 모든 외국인을 극동과 후바이칼지역에서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간첩과 반소행동의 혐의자를 모두 체포하며 국적을 불문하고 진압한다.

 

이 결의로 인하여 1938년 2월하순 소련극동당국은 다시 중국인에 제2차대규모체포활동을 벌인다. 중국의 주블라디보스톡과 하바로프스크영사관이 국내에 보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정관리국이 밤에 사람을 보내어 큰 차량으로 선량한 화교를 다시 백여명 체포해갔다. 그 기세는 흉흉하여 마치 도적을 체포하는 것같았다. 갈수록 심해진다. 아마도 다 잡아넣어야 끝날 것같다. 지난번에 체포된 중국인은 듣기로 변방의 추운 지방으로 보내어져서 강제노동을 시키고 있다고 한다."

 

이번에 중국인을 대하는 것은 개돼지만도 못하게 다루었고, 생사도 마음대로 처리했다. 교민을 밤새워 체포했다. 업무시간에도 체포했다. 소련측은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았다.

 

내무부인원은 화교집안을 하나하나 수색했고, 도망친 화교들이 영사관 문앞으로 와서 피난하게 해달라고 하는 자들이 1천여명에 이르렀다. 모두 밤새도록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겁을 먹어서, 그 모습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번에 체포된 중국인은 2,005명이었다.

 

그후 중국 주소대사관은 소련에 엄중한 항의를 제기한다. 소련외교인민위원회는 화인의 다수가 일만(日滿)의 간첩이라고 변명했다. 그리고 강경한 성명을 발표한다. 3월하순, 다시 중국인에 대한 제3차체포활동을 진행한다. 이번에는 더욱 철저했다. 내무인민위원회는 직접 길거리에서 체포했다. 많은 화교는 시내버스에서 붙잡혀 갔다. 체포대상은 더 이상 성인남자에 한하지 않았고, 부녀자와 아동들까지도 포함되었다. 많은 교민은 영사관으로 도망와서 피난하려 했지만, 중간에 붙잡혀 끌려갔다. 이번 체포행동으로 3,082명이 끌려간다.

 

1937년부터 1938년 3월까지, 연해주에서만 체포된 사람이 최소 6천여명이다. 이전 1년간은 영사관 통계에 따르면 중국인은 모두 11,000명이다. 반수이상의 중국인이 체포된 것이다. 전체 극동지구에서 체포된 중국인의 수가 11,000여명에 이르렀고, 전체 중국인총수의 약 60%에 달한다. 이를 보면 이는 간첩이나 테러분자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다. 적나라한 중국인에 대한 인종청소이다.

 

체포된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을 체포한 기관은 고문을 통해서 죄를 자백하도록 했다.

 

중국영사관에서 이들을 만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4월 27일부터 5월 27일까지, 내무관리국은 황급히 사건기록을 만들어 재판을 진행하고 3,123명을 총살한다. 나머지는 노동개조영에 보내어진다. 다수는 노동개조중에 죽었다. 예를 들어, 1938년의 체포때 불법월경되로 270명이 노동개조영에 보내어지는데, 269명이 아사, 동사한다. 남은 1명의 주방장만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들 소수의 살아남은 사람들은 신중국이 성립된 후, 중국정부의 교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설사 소련국적을 이미 취득했거나, 정치적으로 소련공산당을 지지하는 화교도 진압대 전혀 관용이 없었다. 1937년 내무인민위원회는 180명의 레닌학교 교사와 학생을 체포하는데, 중점조사대상은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이었다. 그들중 다수는 졸속재판을 통해 처형되었다.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인원은 학생 왕유청(王維淸)이 있는데, 그는 동북의용군 전사로 나중에 소련의 정보요원이 되어 어러번 만주국으로 가서 임무를 수행했었다. 그런데도 1938년에 총살당한다. 레닌학교 중급부주임교사 양흥순(楊興順)은 골수 볼세비키였다. 역시 체포된 후 실종된다. 1938년 5월, 전체 학교 400여명의 선생과 학생중에서 겨우 89명만이 살아남았다.

 

여러번의 축출과 체포로 남은 중국인 8천여명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국민정부와 소련정부는 여러번 교섭을 진행했고, 이들 교민은 마침내 시베리아철로로 가는 기차를 탔고, 중앙아시아와 신장을 거쳐 중국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1938년 5월 20일, 소련당국은 <극동화주이주방법>을 통하여 7월까지, 극동지구영사관은 모두 8,025명을 귀국시킨다. 1939년에 이르러, 전체 소련 연해주에는 단지 351명의 화교만이 남았다.

 

이제 수만의 화교들이 모여살던 블라디보스톡, 수십만이 모여살던 시베리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1860년 극동은 중국과 정치주권관계가 단절된 후, 이제는 문화적으로도 중국과 단절되게 되었다. 중국은 철저히 소련극동지구의 문화와 경제적 영향력을 상실한다. 냉전이 끝나고 나서 약간 회복되었을 뿐이다.

 

결론

 

 소련은 1937년에서 1938년 극동의 중국인들을 진압, 숙청한다. 수단으로 보면 같은 시기 나치의 유태인에 대한 박해와 아주 유사하다. 심지어 더욱 피비린내난다. 나치는 2차대전전에 유태인데 대한 박해는 단지 축출과 재산몰수였는데, 소련은 재산몰수외에 비인간적으로 육체까지 소멸시켰다. 러시아사회와정치사국가자료관의 기록에 따르면, 8,500여명의 중국인이 '대숙청'기간에 죽임을 당했다. 그중 다수는 극동지구의 중국인이다. 만일 노동개조영에 보내진 중국인까지 계산하면 수량은 1만이 넘을 것이다. 당시 중국인총수의 절반이상이다. 이처럼 높은 사망률은 인종말살이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유태인이 도살된 역사는 역사저작, 영화 및 다큐멘터리로 정리되었고, 기념관이 있어 전세계 인민들에게 그들이 받은 고난을 기억하게 한다. 2만명의 폴란드인이 카틴숲에서 살해당한 사건도 역시 러시아의 사죄를 받아냈다. 그러나 중국인이 당한 박해에 대하여는 조금도 기념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기억조차 하지 않고 있다.

 

역사는 이미 지나갔지만, 러시아의 극단민족주의자들은 중국인을 '황화'로 보는 어두운 그림자는 아직도 시베이라의 상공을 떠돌고 있다. 중국상인은 지금도 여전히 극동에서 여러가지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 정부측에서 중국시장을 파괴하는 행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스킨헤드들은 여러번 중국인을 살해앴다. 중국이 이 역사를 기억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중국은 러시아인에게 이 역사를 기억하도록 일깨워줄 수도 없다. 중국인이 박해받은 비극은 아마 미래에 다시 재연될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끄집어내어 민족간의 원한을 되살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중국러시아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다만 이 모든 것은 역사를 잊어야할 충분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선택적으로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비극과 피눈물만이 아니라, 정의와 양심도 포함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