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청나라에는 왜 왜구(倭寇)가 없었을까?

by 중은우시 2020. 3. 25.

글: 지역사(知歷史)


원나라 중후기부터 왜환(倭患)"은 3세기여동안 지속되었다. 특히 명나라 가정(嘉靖)연간에 40년동안 지속되고, 전화가 동남연해에 미친 '가정대왜란(嘉靖大倭亂)'이 가장 심했다. 그러나 아편전쟁이전의 청나라때 '왜환'은 조용했다. 비록 1990년대 홍콩, 대만에서 만든 드라마에서 '불로남신'과 '불로여신'이 일본왜구를 무찌르는 내용으로 만든 바 있지만, 진실한 역사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바다 건너편의 일본은 200여년간 조용했던 것이다.


당연히 일본이 조용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다. 먼저,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일본 국정(國情)의 변화이다.


청나라때의 일본은 원,명시기에 군웅할거하던 '전국시대'가 아니었고, 토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영파(寧波)로 천도'하는 것을 꿈꾸던 미친 야수의 시대도 아니었다. 도쿠가와막부가 일본을 통치하기 시작한 후,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키려는 생각에서, 대외적으로 '쇄국'정책을 펼치게 된다. 나카사키 이외에 일본이 대외항구는 모조리 폐쇄된다. 일본선박은 바다로 나가서 무역하는 것이 불허되었을 뿐아니라, 해외와 교류하는 것도 금지했다. 밀항은 사형에 처해지는 대죄였다. 단지 중국, 네덜란드등 소수국가의 선박들만이 나카사키에서 무역을 진해할 수 있었다. 물론 엄격한 감시감독을 받으면서.


나라를 나가면 사형에 처한다고? 이처럼 엄밀한 쇄국체제하에서, 왜구가 설칠 토양은 없어지게 된 것이다. 원,명때의 왜구가 마음대로 배를 몰고 나가서 '먹거리'를 찾고, 강탈하고 싶으면 강탈하던 '좋은 시절'은 이제 아예 없어진 것이다.


그러나 죽어라 쇄국을 하던 일본과 바다건너편의 대청과의 사이에는 마치 '우물물은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다(井水不犯河水)"는 것과 같이 서로 신경쓰지 않았던 것같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공동의 이익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중일평화'의 중요한 원인중 다른 하나인 쌍방에게 아주 중요했던 "양동무역(洋銅貿易)"이 있었다.


청왕조가 천하를 통일한 후, 국가는 장기간의 평화시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한 가지 대사는 국가의 안정과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동전(銅錢)이다. 동전을 만드려면 대량의 구리(銅)가 필요하다. 청왕조의 구리생산지는 운남, 귀주, 사천등의 성에 집중되어 있다. 생산량이 많지 않은 것은 제외하고서라도, 운송이 아주 불편했다. 구리를 제대로 운송하지 못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이 일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치명적인 '전황(錢荒, 돈가뭄)'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도 다행히, 일본에 구리가 있었다.


지대물박(地大物博)하나 구리가 부족했던 대청과 달리, 일본은 비록 가난하기 그지없었고, 일용품은 모조리 부족했지만, 금,은,동등 귀금속의 생산량은 풍부했다. 그리고 비록 나라를 걸어닫았지만, 중국의 각종 화물에 대한 일본내에서의 수요량은 매우 컸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구리를 주고 바꿔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1683년부터, 청왕조가 대만의 남명정권을 토벌한 후, 청일 쌍방은 1세기반에 이르는 '양동무역'을 시작하게 된다. 매년 많은 중국선박에 영파, 광주등지에서 출발해서 비단등 화물을 가득 싣고 일본으로 향했다. 그리고 대량의 품질이 뛰어난 구리로 바꿔서 돌아왔다. 여기서 언급해야할 점은 비록 '강건성세'때라고 하덜도 대청왕조의 해외무역은 아주 제한받았고, 건륭연간에는 오직 1개의 통상항구만을 남겨두었다. 다만, '일본구리'와의 거래에 대하여 청왕조는 정책을 느슨하게 운영했다. 일본에 가서 구리만 바꾸어 온다면, 중국상선은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대량의 중요한 화물을 싣고 갈 수 있었다.


국가재정의 안정과 관련되는 이런 거래에 대한 청왕조의 태도는 다른 대외무역정책과 비교하면 실로 개화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개화된 태도는 후세에 거의 잊혀져 버렸지만, 당시에는 중일무역의 열기가 아주 대단했다. 강건연간에 청왕조가 매년 일본으로 보내는 상선은 항상 백척이상이었고, 매년 일본에 상륙하는 중국상인의 수는 한때 근 만명에 달했다. 1683년부터 1840년까지 중국상선은 일본에서 합계 2.8억근의 구리를 수입했다. 쌍방에 있어서 이는 윈윈의 거래였다.


이런 윈윈의 거래가 있기 때문에 청일 쌍방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따로 있다. 바로 "막시해양(漠視海洋)' '폐관쇄국(閉關鎖國)'의 청왕조는 '강건성세'의 연대에 일찌기 동남아해양을 휩쓸던 해상역량을 지니고 있었던 바가 있다.


강희연간에, 동남부 '남명소조정'과의 작전필요에 따라, '궁마기사(弓馬騎射)'의 청왕조도 한때 해군건설을 중시했었다. 1683년 청일간에 '양동무역'을 시작한 이래, 당시의 청왕조는 해군이 중천에 뜬 태양과 같았고, 주력전함 '조선(鳥船)'은 길이기 50미터이상에 달했다. 장착한 대형화포가 30문이상이었다. 설사 아시아해상에서 유명했던 네덜란드전함과 비교하더라도, 명나라때의 조선기술을 이어받은 청나라의 조선은 1:1로 맞붙을만한 수준이었다. 이런 위력이 거대한 함선을 청나라수군은 60여쳑 보유하고 있었다.


이처럼 강대한 전함은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할 뿐아니라, 강희연간에는 '봉주(封舟)'로 쓰였다. 몇년에 한번씩 유구로 책봉하러 가는데 쓰였고, 위세는 대단했다. 이런 강대한 해상역량을 지니고 있으니, 이웃나라들에서 감히 붙을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탄식이 절로 나오는 일은 비로 이것이다. 청왕조의 통치가 안정되어 가면서, 이렇게 강대한 '조선'이 대부분 청왕조에 의해 버려졌다는 것이고, 거의 해체될 것은 해체되고, 버려질 것은 버려졌다. 건륭년간에 이르러, 청군의 가장 큰 전함은 겨우 '십일장(十一丈)밖에 되지 않았다. 수공업도서가 청나라에게 금서로 되면서, 청나라수군의 선박제조술, 화포제조술도 대거 퇴보하게 된다.


바로 이 건륭말기에 청나라에 '왜환'은 없었지만, 월남해적이 나타났다. 당시 '대사선(大師船)'을 보유한 월남해적의 전함은 왕왕 청군전함보다 3,4배나 컸다. "선대이고(船大而高), 포다이장(砲大而壯)'. 이 강대한 실력으로 건륭말기부터 가경연간에 이르기까지 매년 봄,여름이 되면, 월남의 해적이 몰려왔다. 광동에서 절강에 이르기까지의 해상에서 대거 살인방화약탈을 벌였다. 화가난 건륭, 가경 부자는 여러번 성지를 내려 이들 해적을 몰살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투에서는 어떠했을까? 그들의 배가 크고, 대포가 많다. 청군의 수군은 매번 도망칠수만 있으면 도망쳤다. 약간의 돈을 지닌 연해의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내서 선박과 대포를 만들어 자신의 역량으로 해적과 생사의 결전을 벌이곤 했다. 매번 해적이 몰려오면, 청군의 정규군은 기본적으로 모두 숨어서 관망하면서 싸움구경만 했다. 만일 가경5년, 월남해군이 해상에서 태풍을 만나지 않았고, 월남국내의 형세변화가 발생하여 국왕이 앞장서서 해적세력을 제거하지 않았더라면, 월남해적이 얼마나 더 미친듯이 날뛰었을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해군역량이 부족하면, 왜구가 없고, 월남해적은 운에 의지하여 몰아낼 수 있엇지만, 아편전쟁이 일어나자 영국군의 견고한 전함과 날카로운 대포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대문을 활짝 열게 된 청왕조는 그후 여기저기서 얻어맞는 신세가 되고 만다. 19세기말의 청일전쟁때는 옛날의 '무역파트너'였던 일본의 발아래 짓밟히게 된다.


그래서, 상대국의 상황이 변화하면 공동의 무역경제이익은 평화의 필요조건이지만,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야말로 근본이다. '왜구'가 없던 대청왕조는 해상제패를 중시하지 않다가 결국은 침중한 댓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