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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초기)

<애신각라종보(愛新覺羅宗譜)>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by 중은우시 2019. 2. 11.

글: 성경관첩(盛京關捷)





<애신각라종보>는 청나라에서 만든 대형 족보이다. 또한 현재 중국에서 가장 완비된 황실족보이기도 하다. 전체 족보에서 전혀 단절된 곳은 없다.


청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옥첩(玉牒)을 개정한 것은 광서33년(1907년)이다. 1915년, 황제에서 물러난 청나라조정은 다시 각지의 종실, 각라에게 통보하여 호구를 보고하게 한다. 다시 한번 종보를 개정하기 위함이다. 이는 1921년 6월에 마무리된다.


1935년, 종실 희흡(熙洽)이 동북에서 부의(溥儀)에게 상소를 올려 <애신각라가족종보>를 개정할 것을 청한다. 다음해 8월, 부의는 '성지'를 내려, 족보개정에 필요한 비용은 '은사관(恩賜款)'항목에서 지출하도록 한다. 부족한 부분은 동족들이 출연하여 메우게 한다. 이번 족보개정은 박후(朴厚), 종계(鍾繼), 부영(溥瀛), 빈선(斌碹), 금송교(今松喬), 경후(慶厚)가 책임지고 진행한다. 자료를 모으고 일제조사를 하는 외에, 각 종지(宗支)의 권래 가보도 충분히 이용한다. 관내의 경진(京津)방면은 부의의 숙부인 재도(載濤), 재윤(載潤)이 책임지고 각 부(府)의 가보정본을 동북으로 보낸다. 이번 족보개정은 새로운 인구정보를 일제조사하는 외에, 기본적으로 역대 옥첩을 모은 것이다.


첫권은 <청조통지>에서 "애신각라원류"를 전재한 외에, 예언(例言), 세계도(世系圖), 세계보(록)(世系譜)(錄)의 3부분만 포함하여, 보통의 민간족보와 약간 다르다.


<종보>의 수책(首冊)은 "성원길경(星源吉慶)"이다. 제계도(帝系圖), 및 역대의 제후대사(帝后大事), 비빈 및 황자녀를 부록으로 붙였다. 그 외에 7책은 세계표이다; 갑책은 문종, 선종, 인종, 고종, 세종, 성조, 세조, 태종위하의 세계자손이고; 을, 병책은 태조 위하의 세계자손이며; 정책은 현조위하의 세계자손이고; 무, 기, 경책은 경조, 흥조위하의 세계자손이다.


<종보>의 기록은 정확하고, 1935년 이전에 출생한 애신각라씨는 일반적으로 모두 올라갔다.


그렇다면, 이 명나라중엽부터 20세기 30년대까지 500년의 황족정보를 기록한 종보는 어떤 비밀을 알려주고 있을까?


첫째, <종보>는 애신각라가족이 엘리트가족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500년간, 가족에서는 많은 정치가, 군사가와 시인, 화가, 서예가 및 문학가를 배출했다. 휘황찬란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종보>는 정치의 청우표(晴雨表)이다. 모두 <홍루몽>에 비주류인물을 '부책'과 '우부책'에 넣은 것을 기억할 것이다. <애신각라종보>에도 이런 상황이 있다. 정치적 문제가 있는 사람은 전체 족보의 말미에 즉 '옥첩지말(玉牒之末)'에 있다. 이들은 본인 혹은 선조가 죄를 지어서 이름을 이런 별볼일 없는 곳에 넣었을 뿐아니라, 생활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그들은 작위도 없고, 직위도 없으며, 권력도 없다. 어느 정도 물질적인 대우를 받는 외에, 더 이상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반대로 부담이 없어서 편하게 지냈다. 어떤 사람은 백살을 넘기기도 했다.


셋째, 이름을 짓는 문제에서도 같다. 만주족의 천연적이고 솔직한 성격이 드러난다. 동시에 중원과 서방을 겸허하게 배운 특징도 나타난다.  처음에 이름을 지을 때는 산야의 맑고 새로운 기운이 넘쳤다. 예를 들어, "대력(大力)", "이희(二喜)", "석두(石頭)", "팔십삼(八十三)"등이다. 오랫동안 중원에서 생활하고나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중원문화를 받아들인다. 대다수의 이름은 길상(吉祥)한 내용이 된다. 예를 들어, "항복(恒福)", "부귀(富貴)", 나중에 서양종교를 접촉하고나서 "관음보(觀音保)", "피득(彼得, 피터)"등이 나타난다.


넷째, 종보는 당시의 건강수준을 보여준다. 갑책에 청태종 홍타이시(皇太極)의 후예중 60세이상은 300여명이고, 80세이상은 비교적 적다. 반대로 원지(遠支)의 종실은 8.9십세가 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는 정치적인 압력과 관련이 있지 않을가? 연구가 필요한 사항이다.


다섯째, 종보는 황족이 북경에서 고향 성경으로 인구가 이주한 현상을 보여준다. 북경의 애신각라씨는 정치적으로 실패하거나 죄를 지으면 주로 동북으로 보내어졌다. 그외에 대량이 생활력이 없는 황족들도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았다. 건륭44년부터 가경20년까지, 모두 120호의 사람들이 성경으로 돌아간다. 가경제는 별도로 돈을 내어 이들이 심양에서 종실영(宗室營)을 지어서 살게 해준다. 가경17년, 70호가 이주한다. 황제는 그들을 배웅하며, 훈화도 한다. 그들이 성경에 도착하여 잘 살고 조상에 부끄럽지 않게 하라고 말한다.


여섯째, 종보는 전체일족의 인친권(姻親圈)을 보여준다. 그 중에는 풍부한 정치적 정보도 있다. 누가 누구와 결혼했는지. 기본적으로는 쌍방의 정치적 배경과 지위에 근거한다.


<애신각라종보>는 편찬이 엄격하여 일반적으로 거짓은 없다. 그러므로 진실성이 아주 강하다. 왕왕 <청실록>과 <청사고>와 대조하여 보면, 우리는 거기에서 많은 비밀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