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죽영월강(竹影月江)
청궁(淸宮)드라마에서 자주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대신이 죄를 범하면, 벌을 받아 영고탑에 유배를 가서 피갑인(被甲人)의 노비가 되며, 영원히 산해관을 넘어들어오지 못한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영고탑은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왜 그곳은 범인들이 이름만 들어도 얼굴색이 변하는 곳이 되었을까?
1. 영고탑의 유래
청나라때 영고탑은 기실 두 곳이 있었다. 서로 25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각각 '신성(新城)'과 '구성(舊城)'이라고 불렀다.
구성은 누르하치가 군대를 주둔시켰던 곳이고, 흑룡강성 해림시(海林市) 고성촌(古城村)에 위치하고 있다. 강희5년, 신성을 만들어 흑룡강성 영안시(寧安市)로 옮겨간다. 그리하여, 영고탑은 관외의 광활한 지역을 가리키고, 어떤 탑 하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고탑은 탑과 관계가 없는데 왜 이런 이름을 짓게 되었을까?
이는 영고탑이 처했던 역사시기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청나라때의 국어는 만주어였고, 영고탑은 관외에 있는 만주인들의 고향이었다. 그래서 더욱 만주어로 이름을 지었다.
만주어로 '영고(寧古)'는 '여섯(六)'이라는 뜻이고, '탑(塔)'은 '개(個)'라는 뜻이다. 그래서 영고탑의 원래 의미는 '여섯개'라는 뜻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누르하치의 증조부인 푸만(福滿)이 낳은 여섯 아들이 일찌기 이곳에 거주하면서 각각 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청군이 산해관을 넘어 들어온 후, 이 여섯 형제는 '육조(六祖)'라고 부른다. 현지에는 지금까지도 육조성(六祖城) 유적지가 있다.
2. 영고탑 유배
영고탑에 관한 소문은 사실일까? 지금은 이미 고증할 수가 없다. 다만 청나라때 사람들은 영고탑으로 유배가는 것을 인간지옥으로 가는 것으로 여겼다. 이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영고탑은 도대체 무슨 공포스러운 점이 있을까? 왜 청나라때 사람들은 영고탑으로 가는 것을 그렇게 겁냈을까?
먼저, 영고탑은 관외의 고한지지(苦寒之地)에 위치하고 있다. 청나라때 영고탑으로 유배보내는 사람은 많은 경우 남방인이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계속하여 서재에서 생활하던 문약한 서생이다. 그리고 혹은 반평생을 일한 노령의 관리들이다.
영고탑은 위치가 편벽되어, 범인을 유배보낼 때의 교통도구는 기본적으로 도보였다. 그러므로, 이들 신체적인 조건이 좋지 않은 유배인원들에게 영고탑까지 가는 것은 하늘 끝까지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음으로, 영고탑은 자연환경이 열악했다. 일찌기 영고탑에 유배되었던 오조건(吳兆騫)이 그의 모친에게 보낸 서신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영고탑의 추위는 천하에 없는 것이다. 초봄부터 사월중순까지, 큰 바람이 번개치듯이 불어 지척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이고, 오월에서 칠월까지는 비가 이어진다. 팔월중순에는 큰 눈이 내린다. 구월초에는 강물이 모두 얼어붙는다. 눈은 바닥에 닿으면 바로 얼어서 얼음이 된다. 눈에 보이는 천리는 모두 흰 눈밭이다."
유배를 가는 범인은 대부분 의복이 얇고, 엄동설한에 익숙하지 않다. 영고탑의 겨울기온은 영하 3,4십도에 달한다. 그래서 매년 겨울이면 범인들이 대거 사망한다.
유배가는 방공건(方拱乾)이 이렇게 말한 것도 이해가 된다: "사람들은 모두 황천길을 무서워하지만, 만일 영고탑에 도착하면, 황천 열 개도 무섭지가 않다."
셋째로, 영고탑 현지의 피갑인들은 같이 지내기 좋지 않다. 소위 피갑인은 기실 각 민족의 투항해 온 인물이다. 원래 지위가 아주 낮다. 유배가는 범인이 만일 피갑인의 노예가 되면, 그것은 먹이사슬의 최하단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영고탑은 북경에서 4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범인을 학대하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야기가 퍼져나가지 않는다. 이들 유배간 범인의 생활은 아주 힘들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3. 영고탑 적응
비록, 외부환경이 열악하지만, 유배간 범인들은 점점 유배생활에 적응한다.
정유과장안(丁酉科場案)으로 유배를 간 시인 오조건은 영고탑에서 22년간 생활했다.
그는 영고탑에 도착한 후, 자신의 문학적 장기를 발휘하여, 영고탑에서 학관을 열고 제자를 거둔다. 점점 명성을 떨친다. 그리하여 현지관리들의 상객이 된다. 파해(巴海)장군은 오조건을 막료로 청하여, 그를 연회에 불러 같이 먹고 마시며, 시가를 화답했다.
나중에 오조건의 친구가 명주(明珠)를 찾아 도움을 청하여, 오조건은 돈을 내고 속죄를 받아 돌아온다. 오조건은 오히려 이때부터 백산흑수간의 생활을 그리워하고, 남으로 돌아온 후 겨우 3년만에 사망한다. 임종전에 이렇게 말했다: 영고탑의 버섯을 한 입 먹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
소흥(紹興) 사람인 양월(楊越)은 영고탑에 유배된 후 부부가게를 열어, 그와 처는 함께 소흥의 음식을 판다. 현지인들이 언제 강남의 음식을 먹어보았겠는가? 일시에 양월의 가게는 아주 흥성하고, 말그대로 인기있는 식당이 된다.
비지니스마인드가 뛰어났던 양월은 계속 영고탑에서 그의 비지니스제국을 개척해 나간다. 그는 강남의 포백(布帛)과 현지인의 양식을 교환하고, 현지인들에게 인삼, 담비가죽(貂皮)등을 팔도록 한다. 그의 노력하에, 현지는 금방 인기있는 시장이 형성되고, 번성하는 상업은 현지의 경제를 발전시켰고, 양월의 현지에서의 지위도 제고시켰다.
대단했던 죄수는 더 있었다. 예를 들어, 여유량(呂留良)의 손자는 의술의 고수였다. 침구수준이 출신입화(出神入化)였다. 영고탑에 도착한 후 바로 귀한 인재로 여겨진다. 유배범들이 그를 좋아했을 뿐아니라, 현지의 관리들도 자주 그를 찾아서 병치료를 받는다.
여유량의 집안은 원래 유학자 집안이다. 누가 알았으랴, 아무 생각없이 보았던 의서로 인하여 후세자손의 운명이 개선될 줄을.
어떤 때는 공명을 이루는 것과 천리 유배를 가는 것은 아주 멀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가까울 수 있다. 영고탑에 유배된 사람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당시에 사해에 이름을 날린 최고인재들이었다. 예를 들어 불학가(佛學家) 함가(函可), 문인 장진언(張縉彦), 방공건(方拱乾), 정성공(鄭成功)의 부친 정지룡(鄭芝龍) 등등이 있다.
이들 유배된 사람들은 설사 인재가 많이 배출된 중원에서도 인중용봉(人中龍鳳)이었으니, 영고탑에 온 후에는 더욱 우세를 보였다.
현지관리들은 이들 우수한 좌수들에게 깜짝 놀란다. 전혀 망설이지 않고 이들에게 각종 우대조치를 해준다. 과연 재주있는 사람들은 어디를 가더라도 굶어죽지 않는다.
이들 우수한 인재들이 오면서, 유배된 범윈들의 지위도 영고탑에서 날로 올라간다. 동시에 영고탑도 이들 우수한 인재의 건설하에 활발한 생기를 내게 되었다.
원래 잔혹한 유배제도가 이렇게 또 다른 방식으로 역사의 긴 강물에서 현란한 색채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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