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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한헌제)

한헌제(漢獻帝) 유협(劉協)은 어떻게 황위에 올랐는가?

by 중은우시 2019. 1. 17.

글: 강산사(江山社)


우리는 알고 있다. 권력을 가진 대신이 황제를 세울 때는 모두 말을 잘 들을 만한 사람, 딴 생각이 없는 사람을 고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동탁(董卓)은 이런 길을 가지 않고, 총명하고 영리한 유협을 황제에 앉혔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스스로 골치거리를 만드는 일을 하다니. 일단 황제가 자라고 나면, 권세를 가질 것인데, 어찌 그의 말을 들을 것인가?


기실, 그들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하면 이해를 잘 못할 것이다. 왜 그럴까?


기실, 유협이 어렸을 때의 경력은 손조롭지 못했다. 하마터면 그는 죽을 뻔했다. 왜 이렇게 얘기하는가? 왜냐하면 그의 생모인 왕영(王榮)은 궁내에서 지위가 낮아서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권세있고 총애받던 하황후(何皇后)를 겁냈다. 심지어 임신한 후에도 감히 아이를 낳을 생각을 못한다. 하황후가 해칠까봐 겁이 나서.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왕영은 약을 사서, 아이를 낙태시키려 한다. 그러나, 생각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가짜약을 산 것이다. 그래서 아이를 순조롭게 낳을 수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후, 질투심이 많은 하황후는 유협의 생모가 아이를 낳고 나면 자신의 지위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여 기회를 노려 유협이 생모 왕영을 죽여버린다.


그후, 그녀가 유협마저 죽여버리려 할 때, 당시의 황제 한영제(漢靈帝) 유굉(劉宏)이 이 일을 알게 된다. 유굉은 화를 벌컥 낸다. 비록 황후의 권세가 아주 컸지만, 이 사건에서는 그도 그냥 넘어가려 하지 않고, 황후를 폐위시키려 한다. 그리고 왕영이 죽은 후, 한영제 유굉은 <추덕부(追德賦)>, <영의송(令儀頌)>을 지어서 왕영을 애도한다.


그러나, 황후는 권세있던 태감 조절(曹節)등과 사이가 좋았고, 황후의 위치도 태감들이 도와서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한 목적은 이후 황제가 죽더라도, 황후가 자신들을 보살펴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은 평생 영화부귀를 누릴 수 있다. 지금 후궁에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만일 황후가 이 일로 쫓겨난다면, 이후 그들은 궁내에 믿고 의지할 산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건 안될 말이다. 그래서 태감들이 속속 상소를 올리고, 긁어모은 금은보화를 모두 한영제에게 바치면서 황제에게 사정한다. 당시의 황제는 환관들과 아주 친했기 때문에, 그리고 많은 금은보화도 받다보니 마음이 약해져서, 태감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황후를 용서한다.


그러면, 아이는 어떡할 것인가? 생모가 죽었고, 황후의 성격으로 봐서, 분명 그를 해칠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그를 세력있는 사람에게 맡겨서 보호하게 해야 했다. 당시의 후궁에서, 동태후(董太后)만이 그를 보호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동태후는 원래 사나운 여인이었다. 이때부터 유협은 동씨를 외가로 의탁한다.


동태후는 재물을 욕심내어, 자주 황제와 함께 재물을 긁어모을 뿐아니라, 수시로 조정에 간여했다. 게다가 그의 조카는 현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이다. 이처럼 강대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 황후가 아무리 기고만장하더라도, 반드시 동태후는 꺼릴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유협은 동태후의 곁으로 보내어진다. 그리고 동태후가 기른다.


한영제 유굉의 말년에 황태자를 선택하는 문제에 부닥친다. 하황후는 황자(皇子) 유변(劉辯)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민간의 사(史)씨성의 도인의 집에서 자랐다. 유변은 유협보다 나이도 많고, 하황후의 소생이다. 이치대로라면 태자의 자리는 분명히 그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유변은 행동거지가 경박하고, 국군의 위엄이나 기질이 보이지 않았다.


유협이 자라면서 갈수록 기민해지고, 행동거지도 단정하여 황제가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유굉은 유협을 태자로 삼을 생각을 한다. 동태후는 황제의 결정을 적극 지지했다. 어쨌든 유협은 그녀가 키운 것이니가. 그러나 생각은 좋지만, 실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하황후의 오빠인 하진(何進)은 대장군으로 세력이 아주 컸다. 그래서 유협을 태자로 앉히는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황제는 방법을 강구하여 황후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한다. 그는 유협을 동한말기의 환관 상군교위 건석(蹇碩)에게 맡긴다. 상군교위는 권력이 클 뿐아니라, 대장군을 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유협을 보좌하게 한다. 그러나 중평6년 사월, 황제는 병으로 사망한다. 태자를 세우는 일을 마무리하기도 저에. 그래서 유조로 상군교위 건석으로 하여금 그의 뜻에 따라 처리해달라고 한다.


황제가 그에게 부탁한 임무를 완성하려면 반드시 대장군 하진을 죽여야 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대장군에 대항하기에는 약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을 찾아서 대장군을 죽여달라고 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이들은 일찌감치 대장군 하진에 투신했고, 당연히 그를 배신한다. 이렇게 하여 상군교위 건석이 피살당한다.


그래서, 이제 유협을 지지하는 사람은 동태후만 남는다.


황제가 죽은 후, 동태황태후(董太皇太后, 황제의 모친은 황태후, 조모는 태황태후가 된다)는 계속 조정에 관여한다. 이런 거동은 하태후를 화나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녀는 오빠 하진과 상의하여, 동태황태후를 제거할 준비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먼저 병력을 파견하여 동태황태후 조카의 저택을 포위하여 그로 하여금 자살케 만든다. 나중에는 동태황태후도 연금시킨다.


그후, 그들은 유변을 황제로 올린다. 그가 한소제(漢少帝)이다. 그리고 알마 후 동태황태후도 죽는다.


한영제 유굉이 죽은 후, 내궁, 환관과 조정대신간에는 격렬한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먼저 하진이 건석을 죽이고, 이어 환관 장양(張讓), 단규(段珪)등이 하진을 죽인다. 사례교위 원소(袁紹), 호분중랑장 원술(袁術)과 하진의 부장은 병력을 이끌고 반격하여, 일거에 환관 2천명을 죽여버린다.


장양, 단규등은 반격할 힘이 없었다. 유협과 한소제를 납치하여 궁밖으로 도망친다. 그러는 동안에 동탁이 이끌고 오는 섬서철기를 만난다. 동탁은 군대를 이끌고 경성에 들어가고, 조정의 정치를 장악한다. 그는 동태황태후와 성이 같으므로, 유협과 한소제 유변 중에서 유협과 더욱 가까이한다.


이때부터 동탁은 한소제를 폐위시키고, 유협을 황제에 앉힐 생각을 한다. 얼마 후, 그는 정말 당시의 한소제 유변을 폐위시킨다. 대신들은 대경실색했지만, 아무도 감히 나서서 안된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후, 그는 하태후를 죽여서 동태황태후의 복수를 한다. 비록 동탁과 동태후(동태황태후)간에는 직접적인 친척관계가 없었지만, 성씨가 같다는 것만으로 그는 동태후가 친히 기른 아이에게 더욱 친근함을 느낀다. 이렇게 하여, 나이 9살의 유협은 성공적으로 황제에 오른다. 이때부터 유협은 기나긴 괴뢰황제의 생애를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