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정(丁丁)
만일 삼국의 역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남자가 한 명 있다. 그는 절대로 삼국시대의 핵심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한때 국가의 영혼이었고, 그의 존재는 하나의 왕조의 존재를 의미했다. 비록 그저 상징일 뿐이지만, 그리고 허수아비로 불리웠지만, 또한 살아있으면서 항상 겁에 질려서 살아야 했지만, 그는 정상적으로 수종정침(壽終正寢)했다. 그가 물러나기 전에, 동한앙조는 최소한 표면적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물러난 후 국가는 신속히 분열되고, 삼국정립이 신속히 형성된다. 그리고 그는 일생동안 여인의 보호를 받는다. 여인들은 그와 진퇴를 함께 했고, 영욕을 함께 했으며 심지어 그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다. 그리고 이들 여인들은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전부후계(前赴後繼)했다. 그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동한의 마지막 황제 한헌제 유협(劉協)이다.
한헌제 유협을 얘기하자면, 그는 동한말기에서 삼국정립시기까지 하나의 기적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정통왕조의 후대이지만, 그가 이 세상에 온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의 모친은 왕영(王榮) 왕미인이다. 비록 명문출신이지만, 한영제에게 시집간 후에 도부출신인 하황후의 질투가 무서워 유협을 임신했을 때, 몰래 낙태약을 먹었다. 아이를 낳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안타깝게도 먹은 낙태약이 가짜약이었던지, 유협은 기적처럼 이 세상에 태어난다. 하황후는 왕미인이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난 후, 질투심이 폭발하여 왕미인을 독살한다. 아직 한달도 되지 않은 유협은 한영제가 안고서 영락궁으로 가서 동태후에게 길러달라고 하게 된다. 유협은 이렇게 하여 죽음을 면한다. 한영제가 189년 붕어한 후, 원래 황위를 승계한 사람은 본래 태자인 유변(劉辯)이었다. 그가 한소제(漢少帝)이다. 이때 유협은 겨우 8살이고, 발해왕에 봉해진다. 그러나 이때의 동한은 이미 기세가 기울었다. 환관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한소제와 유협을 끼고 밖으로 도망친다. 하진은 동탁을 맞이하여 궁으로 들어가 난을 평정한다. 성공한 후에 다시 한소제와 유협을 궁안으로 모셔온다. 한소제는 당시에 놀라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입으로 말을 못할 정도였다. 겨우 8살된 유협은 그러나 잘 견뎌냈다. 그리고 나서서 따지기도 하였다. 동탁이 국면을 장악한 후, 한편으로 자신이 동태후와 동족이고, 다른 한편으로 유협이 확실히 한소제 유변보다는 재능이 뛰어나므로, 한소제를 폐위시키고, 겨우 9살된 유협을 황제로 옹립한다. 그가 바로 역사에서 칭하는 한헌제이다. 유협은 이때부터 인생고난의 역정을 시작하게 된다.
유협이 등극한 후, 동한왕조는 더욱 혼란에 빠진다. 동탁부터 시작하여 유협은 시종일관 괴뢰황제였다. 동탁 다음에는 왕윤이 조정을 좌지우지하고, 그 후에 다시 이각과 곽사가 통제하였고, 그후에는 동승(董承)과 함께 천신만고끝에 장안을 빠져나간다. 후에는 다시 조조가 허창으로 모셔간다. 유협은 조조가 "광부한실(匡扶漢室)"을 소임으로 생각한다고 여겼다. 조조가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조조는 이렇게 힘을 키워간다. 200년, 한헌제 유협은 마침내 조조의 야심을 알고난 후, 괴뢰로 더 이상 남아있지 않고자, 암중으로 의대조(衣帶詔, 옷과 허리띠에 써서 몰래 내리는 조서)를 내린다. 여자들은 한헌제를 보호하기 시작한다. 한헌제의 귀인인 동귀인(董貴人)은 부친이 바로 그를 목숨으로 보호하여 장안을 빠져나가게 한 동승이다. 이때 동승은 거기장군(車騎將軍)이었다. 그는 좌장군 유비, 장수교위 종집, 장군 오자란, 왕자복등과 함께 모의하여, 조조를 주살하고자 한다. 그런데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동승은 조조에게 피살당한다. 때마침 임신하고 있던 동귀인도 마찬가지로 교살당한다. 한헌제를 보호하고자 했던 첫번째 여인이 이렇게 목숨으로 그녀의 사명을 완성한다.
동귀인이 교살된 후, 복황후(伏皇后)는 한헌제를 보호할 계책을 세운다. 그녀는 자신의 부친인 복완(伏完)에게 편지를 써서, 조조의 잔혹하고 불인한 일을 일일이 열거하며, 복완이 동승을 본받아 권신 조조를 제거해줄 것을 부탁한다. 아쉽게도, 복완은 시종 행동에 나서지 못한다. 그리고 214년에 들통이 나서, 조조는 헌제를 핍박하여 복황후를 폐위시킨다. 그리고 한헌제를 대신하여 복황후를 폐위시키는 조서를 쓴다. 이어서, 어사대부 희려를 보내어 조서를 갖고 상서령 화흠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황궁을 포위하여 황후를 수색하여 체포한다. 복황후는 궁안의 협장에 숨어 있다가 화흠에게 끌려나온다. 복황후는 산발한 상태에 맨발로 끌려가며 유협에게 울면서 호소한다. 그러나 유협은 힘없이 말한다: "짐도 내 생명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희려에게 말한다: "희공! 천하에 이런 도리가 있는가?" 복황후는 결국 유폐되어 죽는다. 유협과 그녀 사이에 태어난 두 명의 황자도 역시 독주로 독살당한다. 복씨 집안의 백여명도 처형당한다. 두번째 여인 복황후도 생명으로 한헌제를 보호하는 사명을 완수한다.
이때 조조는 한헌제를 완전히 통제하고자 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는다. 천하를 아직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헌제를 죽이는 것은 조조에게 치명적 타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헌제에 의존하여 키워온 조조의 힘이 와해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조는 다시 투자를 한다. 자신이 세 딸 조헌(曹憲), 조절(曹節), 조화(曹華)를 한헌제에게 시집보낸다. 그리고 조화는 아직도 어린 나이였다. 조조는 이를 통하여 한헌제를 감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조가 아마도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조조의 딸은 한헌제에게 시집간 후, 최종적으로 한헌제를 보호한 것은 바로 그의 딸이었다. 특히 조절은 온갖 수단을 써서 한헌제의 권위를 보호하였고, 한헌제와 진퇴를 함께 하고 영욕을 함께 하여 천고에 명성을 남긴다. 한헌제가 최종적으로 생명을 보전하고, 존엄을 지킨 것은 주로 조절이 한헌제를 극력 보호해준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조가 죽은 후, 조비가 왕을 칭한다. 그리고나서 드러내놓고 한헌제에게 황위를 양보하라고 핍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러 대신들을 시켜서 한헌제에게 선양을 요구한다. 그리고 조비는 스스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여러번 선양의식을 연습하기도 했다. 다만 황후가 된 조절은 옥새를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비록 조비가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내놓으라고 했지만, 매번 조절에게 욕만 얻어먹고 돌아왔다. 이들은 감히 강제로 빼앗으려 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조절은 황후이고 또한 조비의 여동생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조절은 더 이상 옥새를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계속 버티다가는 한헌제의 목숨이 위험하겠다고 여긴다. 조비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보내어 옥새를 내놓으라고 했을 때, 조절은 옥새를 집어든다. 사자가 공손하게 받아들려고 할 때, 조절은 옥새를 계단 아래로 던져 버린다. 그리고는 얼굴을 가리고 통곡한다: "하늘이 너희를 보우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오래 못 살 것이다." 사자들은 그녀를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옥새를 집어서 급히 먼지를 닦은 후 가지고 달아났다. 이 장면은 <후한서>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조비는 마침내 220년 황제를 칭하는데 성공한다. 한헌제는 산양공(山陽公)에 봉해진다. 다만 한헌제의 산양공 대우는 조비와 군신관계가 아니었고, 대등한 관계였다. 그리고 만호의 식읍도 가지고(당시 인구가 많지 안아서 만호식읍의 대우는 그 어떤 대신들보다 높은 대우였다. 그리고 관리하는 지역도 상당히 넓었다), 그리고 지역내는 여전히 한나라의 제도대로 통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천자의 규격으로 제사도 지낼 수 있으며, 황제에게 글을 올릴 때도 신하를 칭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 만났을 때도 절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봉지는 산양현(山陽縣, 지금의 焦作)인데, 산양국(山陽國)으로 개명한다. 왕업(王業)을 산양국상(山陽國相)에 임명하고, 이고(李固)를 산양국독군(督軍)으로 임명한다. 당시 조비는 한헌제에게 시집갔던 세 자매를 산양으로 따라가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조절은 자신이 살아서도 유협의 여자이고, 죽어서도 유협의 귀신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자기가 그의 곁에 있지 않으면 조비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번 싸운 끝에 마침내 유협의 곁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자시은 산양공부인(山陽公夫人)으로 개칭한다.
조절이 유협을 따라 산양으로 간 후, 산양의 백성들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고, 가난과 병, 그리고 기근에 시달리고, 논밭이 황폐해진 것을 보게 된다. 조절은 유협에게 관복을 벗고 포의로 갈아입고 민간에 들어가, 과거 궁중에서 배웠던 의술을 가지고 병든 사람을 구해군다. 이렇게 하여 유협은 산양에서 시골의사역할을 한다. 조절 부부는 자주 운태산으로 가서 약을 캤고, 백성들을 구해주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용봉의가(龍鳳醫家)"로 불렀다. 지금 백가암 풍경구의 석비에는 "한헌제행의도(漢獻帝行醫圖)"가 그려져 있었다. 그때 재난이 닥치면 조절 부부는 세금을 감면해주고, 산양의 백성들과 함께 입고 먹는 것을 아끼면서 난관을 함께 넘겼다. 몇년이 흐르자 산양의 백성들은 다시 늘어나고, 집안을 다시 일으킨다. 예전의 가난하고 못살던 곳이 많이 바뀐 것이다. 백성들은 조절부부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앞다투어 토산품과 과일등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조절 부부는 왕왕 완곡하게 사양하곤 했다.
그리고 부부는 자신의 아들을 보통학교에 보내어 공부시켰다. 그리고 모든 재산을 쏟아서 학교를 제대로 수선한다. 그리고 선포한다. 부자이든 가낭한 자이건 모든 자제들은 와서 배워도 된다고. 그리고 부부는 친히 복상(卜尙, 공자제자의 후손)이라는 사람을 모셔서 수석교사가 되도록 한다. 228년, 산양국의 도성이 마침내 완공된다. 완공되는 날, 부부는 궁전에서 문을 열고 무료진료를 해준다. 그리고 부부는 친히 운태산으로 가서 약초를 캤다. 또한 자신들이 만든 약은 한번도 돈을 받지 않았다. 침을 놓고, 뜸을 뜨는 경우에도 돈을 받지 않았다. 설사 자신이 돈을 내서 약을 산 경우에도, 원가비용만 받았다. 그리고 외상으로 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부부는 산양에서 백성들과 가깝게 지내서 현지백성들로부터 '부모'라고 존경받는다. 한헌제는 '대대(大大)"라고 부르고, 조절은 "미미(美美)"라고 불렀다. 지금도 초작인들은 자신의 부친을 "대대"라고 부르고, 자신의 모친은 "미미"라고 부른다.
한헌제의 일생을 살펴보면, 파란만장했다고 할 수 있고, 전설적이고 위험도 많았다. 비록 황제로 30여년간 있었지만, 계속하여 허수아비였다. 그러나 그는 이 시기를 잘 넘긴다. 한편으로는 한헌제가 확실히 비범한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시대를 잘못 만났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아마도 역사상 업적을 세운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히 곁에 있던 여인들이 계속하여 그를 보호해준 덕분이다. 그녀들은 그와 영욕을 함께 했고,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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