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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한헌제)

한헌제(漢獻帝) 유협(劉協): 중국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망국황제

by 중은우시 2011. 9. 6.

글: 유병광(劉秉光)

 

파소지하기완란(破巢之下幾完卵)

망국지군다비참(亡國之君多悲慘)

 

새집이 부서지면 온전한 새알이 남아있겠는가

나라가 망한 군주는 대부분 비참했다.

 

역사적으로, 망국황제는 독살당하거나 암살당하거나, 목이 잘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구차하게 생명을 부지한 경우도 있다. 이들 망국황제와 비교하자면 한헌제 유협은 천륜을 누렸을 뿐아니라, 천수를 누렸고, 죽은 후에도 천자의 규격과 예의로 매장되었으며, 살아있을 때도 좁은 지방이지만 인자로운 정치를 펼치고, 의술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는 중국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망국황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유협(181-234)은 한영제(漢靈帝)의 아들이며, 동한(東漢)의 마지막 황제이다. 황권이 약했고, 신하들이 발호하여, 유협은 즉위초기부터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그는 차례로 동탁(董卓)의 위세에 눌리고, 이각(李傕), 곽사(郭)의 무례를 목격하고, 조조(曹操) 부자의 패도를 맛보았다. 그는 매번 사람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견제를 받았다. 그는 운명이 기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건안25년(220년) 정월, 조조가 병사하고, 조비(曹丕)는 같은 해 십월에 유협을 핍박하여 황제위를 선양하게 한다. 이리하여 위나라가 건립되고 한나라는 소멸된다. 유협은 망국황제가 된 것이다.

 

조비는 황제를 칭한 후에 유협을 산양공(山陽公)으로 격하시킨다. "식읍을 1만호 주고, 지위는 여러 제후들의 윗자리로 하였다. 황제에게 보고할 때도 신하로 칭하지 않아도 되며, 황제의 조서를 받을 때도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된다. 천자의 가마와 의복을 입고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수 있고, 종묘등 모든 제도는 한나라의 것을 쓰도록 했다. 도읍은 산양의 탁록성(濁鹿城)으로 했다."(후한서). 그리고 조비는 "천하의 진귀한 것은 내가 산양과 함께 하겠다"(삼국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유협을 잘 대해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유협은 피비린내나고 권력과 사기가 춤추며, 그에게 영광보다는 굴욕만 가져다준 황궁을 떠나게 된다.

 

조비는 왜 유협을 죽이지 않았을까? 필자는 주로 두 가지 이유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유협이 오랫동안 허수아비로 지내서, 가까운 신하는 모두 죽었고, 명망이나 세력이 조위정권에 전혀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조비는 그를 신경쓰지 않은 것이다. 둘째, 조조는 3명의 딸을 유협에게 시집보낸다. 그중 뚤째딸 조절(曹節)이 유협의 황후이다. 그녀는 성격이 강인하고 남편을 충심으로 보호했다. 조비는 조절을 경외하여, 유협에게 감히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조비는 절충적인 방안을 선택하는데, 유협을 조위의 수도인 낙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산양으로 보내어 감시에 편하게 한 것이다.

 

산양성(하북성 초작)은 산양공아문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유협은 대부분의 시간을 탁록성(하남 수무)에서 보냈다. 유협이 산양공으로 있을 때의 행적을 정사에는 기록해놓지 않았다. 그러나, 수무 일대에는 지금까지도 그가 널리 인자한 정치를 베풀고, 백성들을 사랑하였다는 것들이 전해지고 있다. 유협이 탁록성에 온 후, 사방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살피러 다녔고, 백성들이 살기힘든 것을 보면, 사람을 보내어 사방에 포고를 내렸다. 모든 세금과 부역을 절반으로 깍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곡식을 심으면 3년간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주었다. 이 소식이 나오자, 힘들어 하던 산양이 백성들은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요역과 세금을 낮춰주는 외에, 유협은 자신의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죽어가는 자를 살리고, 상처입은 자를 치료해주었다. 동한말기, 매년 전투가 벌어지다보니, 백성들 중에는 전염병이 유행하였다. 장중경, 화타등 일대의 명의도 이때 나타난다. 유협이 황제로 있을 때, 화타를 스승으로 모시고 의술을 배운 적이 있었다. 화타로부터,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침구, 정골(正骨)등 의술을 익힌 것이다. 유협은 원래 총명한데다가 궁중에 보관되어 있던 의술서적도 많아서, 그는 일반인들보다 훨씬 많은 의학지식을 갖출 수 있었다.

 

황제위를 물러난 후, 유협은 정치에는 뜻이 없었고, 민간에 들어가서,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한다. 그는 의술을 업으로 삼아서 백성들을 치료해주었다. 유협은 황제로서는 무능했지만, 황제위를 물러난 후에는 시골의사로서, 백성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백성들을 그를 부모처럼 존경했다. 유협은 산양이 백성들에게 무료로 치료를 해준다. 그는 가는 곳마다 환자들의 병을 보살폈다. 유협의 의술로 목숨을 구한 백성들은 감격해 마지 않았고, 산양의 여러 곳에는 그를 위한 비석이 세워진다.

 

유협은 산양에 있는 동안 여러번 운태산에 약을 캐러 간다. 지금의 백가암 위에 있는 혜산정에는 석각화상이 있는데, "산양공행의도(山陽公行醫圖)"이다. 운태산에서 캐낸 약초를 가지고 유협은 항상 무료로 침을 놓고, 뜸을 놓았다. 단지, 구매해온 약재에 한해서는 원가에 해당하는 비용을 받았다. 유협의 이런 의술을 베푸는 방식은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농촌에서 "중약은 돈을 내지 않고, 침구는 돈을 받지 않는다"는 민속은 바로 유협이 천년간 뿌리내린 습속이다.

 

유협이 산양으로 간 후 황후 조절은 죽어라 우겨서 유협의 곁으로 간다. 유협과 조절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운태산으로 가서 약초를 캤고, 백성들에게 의술을 베풀었다. 궁중생활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도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백성들은 이들 두 사람에게 감사한 뜻으로 이들을 "용봉의가(龍鳳醫家)"라 불렀다. 그외에 유협의 자손들은 산양에 사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부인이 곁에서 지켜주고 있고, 친척과 가족들의 정과 백성의 정도 느끼며 살았다. 이는 유협에게는 불행중 다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는 의학(義學)을 열었다. 이것도 유협이 산양에 남긴 큰 공헌이다. 황초5년(224년) 유협, 조절부부는 산양의 옛 학교가 낡아서 무너진 것을 보고는 자신들의 재산을 털어서 학교건물을 새로 고치교, 명망과 학문이 있는 복상(卜商)을 모셔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한다. 가난한 집안의 자식이거나 부잣집 자식이거나 가리지 않고 모두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유협이 산양공으로 있던 시기는 산양에 있어서 위문후가 산양읍교(山陽邑校)를 건립한 이래 다시한번 번영기를 맞이한 셈이다.

 

황제로서 유협은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가 없었다. 산양공으로서는 그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10여년동안 그가 잘 다스리는 바람에, 산양의 인민들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고, 여러가지 산업이 흥성했다. 할 일이 없을 때면, 유협은 탁록성 북쪽의 작은 산에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한여름에 그는 자주 북쪽의 백가암으로 놀러갔다. 피서도 하면서, 천문폭포를 감상하기도 했다. 거기에 "피서대"라는 유적지를 남긴다. 지금도 그곳에는 송나라때 사람이 돌에 새긴 "한헌제피서대"라는 여섯 글자가 남아 있다.

 

유협이 죽어서 묻힐 때, 산양의 백성들은 속속 눈물을 흘리며 장례행렬을 따랐다. 옷과 모자를 이용해서 흙을 날라서, 묘지에 높은 산이 형성된다. 이를 통하여 유협이 산양에서 베푼 은덕을 기렸다. 산양의 백성들은 고한산촌에 산양공묘를 만들어 제사지냇다. 청명절에는 오는 사람이 더욱 많아진다. 26년후인 감로5년(260년)에 조절이 사망하여, 한헌제와 함께 선릉(禪陵)에 합장된다. 백성들이 이 무덤을 잘 보호했기 때문에, 하남성북부에서 유일하게 잘 보존된 황제능이 된다.

 

아홉살에 등극하여, 사십세에 물러났다. 삼십이년간 유협은 권신들의 기세에 눌러 멍청하게 보낸다. 황제위를 양보한 후, 유협은 다른 망명황제들처럼 모든 희망을 잃고, 스스로 타락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가다듬어, 산양공의 지위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한다. 그리고, 산양의 백성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남을 여러 업적을 남기게 된다. 다른 망국황제들과 비교하자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유협이 죽은 후 그의 후손인 유강, 유근, 유추는 차례로 산양공의 작위를 승계받는다. 일본사서 <일본서기>, <고어습유>, <속일본기>등의 기록에 따르면 유추가 산양공으로 있을 때, 유협의 후손인 유아지(劉阿知)가 이천여명의 친족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일본에서 지위가 높은 귀족이 되었다. 일본의 사카우에(坂上), 오쿠라(大藏), 하라다(原田)의 세 성씨는 모두 수무에서 왔고, 유협의 후손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