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투규역사(偸窺歷史)
사마의(司馬懿)는 삼국시대의 모든 모사(謀士)중에서 재지로 따져서 탑5안에 드는 인물이다. 그리고 사마의는 삼국시대에 마지막에 웃은 사람이기도 하다. 이전의 모든 모사들이 다 죽었는데도 그는 살아남았다. 사마의는 끝까지 살아남아서 상대방을 지쳐 죽게 만드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마의의 일생을 살펴보면, 가장 무서워했던 사람이 세 명이 있다.
1. 조조(曹操)
사마의의 조상은 대대로 관직에 있었다. 그는 명문집안 출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마의의 조장은 대부분 장군이거나 태수를 지냈다. 태수는 하나의 군을 지키니,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시장인 셈이다. 사마의의 부친은 더욱 대단했다. 경조윤의 지위까지 오른다. 경조윤은 지금으로 말하면 수도의 대소사무를 관리하는 자링이니 특별시장인 셈이다. 사마의는 소년때부터 이름을 날렸다. 당나라때 시인 방현령은 사마의를 이렇게 평가했다: "소녈기절(少年奇節), 총명다대략(聰明多大略), 박학흡문(博學洽聞), 복응유교(伏膺儒敎)" 그리고 사마의는 기개가 비범하지 않았다. 삼국지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마의는 "항상 천하를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렇게 총명하고 재능있는 사람이 왜 조조를 무서워했을까?
당시 조조는 수도에서 관리로 있었고 관직은 사공(司空)에 이르렀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건설부장관정도에 해당한다. 재상의 아래에서는 가장 높은 직위이다. 누군가 조조에게 사마의를 상계연(上計掾)으로 삼으라고 추천한다. 이는 현재의 재무부 과장급의 간부이다. 사료와 통계수치등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사마의는 일찌감치 조조의 사람됨을 들었다. 환관세가출신으로 조조의 양부는 당시 유명한 태감의 양자였다. 그리고 조조는 일찌기 동탁의 곁에서 일한 바 있고, 세상사람들은 모두 조조를 간신, 조적(曹賊)이라 칭한다. 사마의는 조조를 위해 일하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그가 주려는 것은 하급관직이었다. 그래서 병을 핑계로 조조의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한다. 조조는 성격상 의심이 많아서, 여러번 사람을 보내어 사마의가 정말 병들었는지 확인한다. 나중에 조조는 상국(相國)이 되고, 사마의는 다시 조조의 요청을 거절한다. 조조은 강제적인 수단을 써서, 사마의를 붙잡아 와서 관직에 앉힌다. 그리고 이때도 그저 글이나 쓰는 하급관직이었다. 나중에 조조의 아들 조홍(曹洪)이 스스로 학문이 부족하다고 여겨 여러번 사마의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한다. 그러나 사마의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조홍은 그리하여 조조에게 이 사실을 보고한다. 사마의는 피살당할까봐 겁이 나서 이때부터 진정으로 조조를 위해 일한다. 다만, 조조가 누구인가? 일대효웅이다. 조조는 일찌감치 사마의를 관찰했고, 그가 "웅심장지'를 지닌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늑대의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승상부에서 삼십년간 있으면서 사마의는 계속 조조에게 중용되지 못하고, 계속 견제받는다. 심지어 자신의 장남 조비(曹丕)에게ㅔ "사마의는 남의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니니, 반드시 우리 가족의 일에 간여하려 할 것이다."
2. 제갈량(諸葛亮)
조조가 죽은 후 조비가 황제에 오른다. 사마의는 조비와의 관계가 부자지간 같이 가까웠다. 그래서 사마의는 하진정후(河津亭侯)에 봉해지고, 승상장사(丞相長史)가 된다. 다만 얼마지나지 않아 사마의는 일생 최대의 적수를 만난다. 바로 제갈량이다.
사마의가 제갈량과 싸우면서 와룡이 99를 이기고, 중달이 1을 이겼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 직접 부딛친 것은 제갈량이 군대를 이끌고 기산을 공격했을 때이다. 당시의 사마의는 군대를 이끌고 출정한지 여러 해가 되었고, 자신이 이끄는 부대가 제갈량을 만나면, 반드시 대패하여 돌아오곤 했다. 조진의 병이 중할 때 제갈량이 공격한다. 양식을 준비하기 위하여 와룡은 일찌기 상규에서 보리를 베는데, 소식을 들은 사마의는 제갈량을 여성까지 추격하지만 감히 더 나아가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제갈량이 매복을 준비했을지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중에 사람들은 "제갈량을 무서워하는 것이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것과 같다"고 놀림을 받기도 한다. 제갈량의 가장 유명한 계책인 "공성계'"도 성안에 칠팔명의 노인과 서너명의 서동만 데리고, 제갈량은 금을 한 곡 타서 사마의의 대군을 기다린다. 성문은 활짝 열려 있고, 중달을 환영한다는 표시였지만, 사마의는 제갈량을 무서워하는 것이 극단에 달해서, 성문아래까지 갔다가 감히 성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군대를 되돌려 돌아간다. 그래서 더욱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3. 장춘화(張春華)
그러나 사마의가 가장 무서워한 사람은 와룡 제갈량도 아니고, 간웅 조조도 아니다. 그의 부인인 장춘화이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사마의가 꾀병을 앓고 있을 때, 한번은 비가 내렸다. 사마의는 급히 뛰어나가 책을 걷었는데, 한 시녀가 이를 보았다. 장춘화는 시녀가 소문을 내면, 자신의 남편에게 불측의 화가 닥칠까 우려하여, 친히 그 시녀를 죽여버린다.
사마의가 중년이 되자 장춘화의 미색도 에전같지 않았다. 사마중달이 '백부인(柏夫人)이라는 첩을 들이자, 장춘화는 사마의를 만나기도 어렵게 되었다. 한번은 사마의의 병이 중하자 장춘화는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위로하러 갔다. 그러나 사마의로부터 욕을 얻어 먹는다: "늙은 것이 정말 귀찮다. 뭐 하러 왔느냐?" 장춘화는 이때 상심하여 자신이 낳은 삼남일녀를 데리고 단식으로 항거한다. 사마의는 부득이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이때부터 더욱 공경한다.
필자의 생각으로, 사마의는 지혜가 뛰어났지만, 그는 유명한 겁쟁이이다. 젊었을 때는 조조를 겁냈고, 중년이 되어서는 제갈량을 겁냈고, 평생동안 자신의 처를 겁냈다. 그는 삼국시대 최대의 겁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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