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아시삼갑제사명(我是三甲第四名)
1. "본제생가(本諸生家), 전례래구(傳禮來久)"
진무제 사마염은 즉위후에 조서를 내려 자신의 가족이, "본제생가, 전례래구"라고 말했다. 이것은 과장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마씨가족은 명문거족이기 때문이다.
중국고대의 개국황제는 자신의 칠대조까지 추봉(追封)한다. 즉 자신의 7대조상(자신을 빼면 6대가 된다)까지이다. 진무제 사마염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자신의 칠대조를 추봉한다. 여기에서는 그의 조부의 고조부인 사마균(司馬鈞)을 제1대로 하고, 사마의의 증조부인 사마량(司馬量)을 제2대로 하며, 사마의의 조부인 사마준(司馬隽)를 제3대로 하고, 사마의의 부친인 사마방(司馬防)을 제5대로 하며, 부친과 백부 사마소(司馬昭)와 사마사(司馬師)를 제6대로 하며, 자신을 제7대로 한다.
이렇게 한 것은 주로, 그들 사마가족이 역사에서 고증가능한 관직에 있던 사람은 사마의의 고조부인 사마균이기 때문이다. 그는 일찌기 정서장군(征西將軍)을 지낸다. 제2대 사마량은 일찌기 예장태수(豫章太守)를 지낸다. 제3대 사마준은 일찌기 영천태수(潁川太守)를 지냈으며, 제4대 사마방은 일찌기 경조윤(京兆尹)을 지낸다.
사마씨가족은 대대로 장관급 관료를 지낸 명문거족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사마팔달(司馬八達)"
사마씨가족이 사마의의 부친 사마방의 대에 이르러 인정흥왕(人丁興旺)하게 된다. 사마방은 모두 8명의 아들을 낳아서 기른다. 그들의 "자(字)"에 모두 "달(達)"자가 들어 있어, "사마팔달"이라 부른다. 그들은 각각 다음과 같다:
한(漢)나라의 연주자사 사마랑(司馬朗), 자가 백달(伯達)
위(魏)나라 태위(太尉) 즉, 진선제(晋宣帝) 사마의(司馬懿) 자는 중달(仲達)
위나라 태재(太宰) 진나라 안평왕(安平王) 사마부(司馬孚) 자는 숙달(叔達)
위나라 동무후(東武侯) 사마규(司馬馗) 자는 계달(季達)
위나라 홍려승(鴻臚丞) 사마순(司馬恂) 자는 현달(顯達)
위나라 중랑(中郞) 사마진(司馬進) 자는 혜달(惠達)
위나라 안성정후(安城亭侯) 사마통(司馬通) 자는 아달(雅達)
위나라 안평정후(安平亭侯) 사마민(司馬敏) 자는 유달(幼達)
3. 소년시기의 사마의는 일찌기 "기재(奇才)"였다.
사마의가 20살 전까지는 표준적인 '분청(憤靑, 분노한 청년)'이었다. "항상 천하를 걱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주 당시의 폐해를 지적했다. 그런 사실을 남양태수 양준소가 알게 된다. 양준소는 사람을 잘 알아보고 잘 기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마의를 본 후에, 그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상서 최염(崔琰)과 사마의의 형인 사마랑은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고 사마랑에게 말한다: "너의 동생은 총명하고 철이 들었다. 일처리가 과감하고 영웅적인 자태가 비범하니 너와 비교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4. 사마의는 심시도세(審時度勢)하여 조조에 의탁하였다. 그러나 용모로 인하여 중용되지 못한다.
사마의의 대에 이르러 한황실은 쇠퇴하고 천하는 대란에 빠진다. 사마의는 심시도세하여 조조가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는 인물이라고 여긴다. 그리하여 한황실에서 관료로 있지 않고, 조조의 진영에 가담하여 처음에는 주부(主簿)라는 직위를 받는다. 이는 승상부의 서기원에 해당한다. 다만 조조는 비록 사마의의 재주와 학문을 알았지만, 사마의를 중용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모두 사마의의 용모때문이다.
사마의는 태어나면서부터 "낭고(狼顧)"상을 지녔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머리를 180도 돌릴 수 있다. 이리(狼)와 같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런 용모를 지닌 인물은 충성스럽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주인을 배반한다고 한다. 그래서 조조는 계속 그를 중용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사마가족은 과연 조조집안을 배신한다. 이것은 도대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인가, 아니면 사마의가 조조의 의심많은 것을 미워해서일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탄식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5. 사마의와 조홍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장군 사마의의 군사연맹>드라마에서 조씨집안사람들은 계속 사마의를 괴롭힌다. 이는 역사사실에 부합한다. 역사적으로 조조의 동생인 조홍과 사마의는 젊었을 때 서로를 좋게 보지 않았다. 조홍은 사마의의 나쁜 점을 몰래 고자질하기도 했다.
<위략>의 기재에 따르면, 사마의는 공부를 좋아했다. 조홍은 칼을 들고 검술을 익히는 것을 좋아했다. 조조는 여러번 조홍에게 글을 읽으라고 권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조홍은 할 수 없이 사마의에게 가르쳐 달라고 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사마의는 조홍과 내왕하는 것을 시덥잖게 여겨서 일부러 지팡이를 집고 가지 않는다. 조홍은 이로 인하여 사마의에게 원한을 품는다. 그래서 조조에게 가서 고자질한다. 조조는 사마의를 불렀고, 사마의는 즉시 지팡이를 버리고 조조에게 가서 명을 받는다. 조조는 가가대소하고 그냥 지나간다. 조홍과 사마의는 서로에게 원한을 품는다.
6. 조비를 보좌하며 그가 내놓은 계책은 반드시 통했다.
사마의는 조조에게 중용되지 못하자, 방향을 조비에게 튼다. 조비를 도와 태자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 이후 조비의 신임을 받는다.위문제
사마의의 재능은 군사분야에서 예측을 할 때 백발백중으로 맞추는 것으로 나타난다.
219년, 사마의는 조조에 건희한다: "형주자사 호수(胡修)와 남향태수 부방(傅方)은 중용할만한 사람들이 아니니, 변방을 지키도록 놔두서는 안됩니다. 국가에 일단 일이 생기면 그들은 분명히 투항할 것입니다." 조조는 그 말을 중시하지 않았다. 그 해 육월, 형주를 치키고 있던 관우는 기회를 잡아 주력군을 이끌고 북으로 형양(荊襄)을 공격한다. 위나라장수 조인을 포위하고, 우금의 칠군을 수장한다. 그리고 방덕을 벤다. 후수, 부방 두 사람은 과연 촉에 투항한다. 일시에 관우이 기세가 전국에 위세를 떨쳤다. 조조는 수도 허창이 번성에서 매우 가까워서 위협을 느꼈다. 한때는 천도까지 준비한다. 사마의는 다시 건의하여 제지한다. "현재 관우가 비록 커졌지만, 손권이 반드시 불쾌해 할 것입니다. 유비는 형주를 빌린지 오래 되었는데 돌려주지 않고 있으니, 손권이 반드시 방법을 써서 관우를 상대할 것입니다. 관우는 지금 아주 오만하니, 곧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그 변고를 기다리면 됩니다. 왜 천도까지 하시려고 합니까?" 이번에는 조조가 그의 말을 들었다. 나중에 손권은 과연 여몽을 보내 공안(公安)을 취하고, 관우는 포로로 잡혀 죽는다.
그후 조조는 형주의 유민과 영천에서 둔전하던 군민이 남방의 오랑캐와 가까워졌다고 보고, 그들을 이주시키려 한다. 그러나 사마의는 생각이 달랐다: "형초는 가볍게 벗어날 수 있는 곳이어서, 움직이기는 쉽고 안주하기는 어려운 곳입니다. 관우가 이제 무너졌으니, 나쁜 짓을 하던 자들은 모두 숨어서 관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선량한 자들을 이주시키면, 그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을 것이고, 떠난 자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조조는 이번에도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강제이주시키지 않았다. 과연 이전에 도망갔던 자들이 모두 돌아와서 귀순한다.
220년, 조조가 죽고, 조비가 위왕에 오른다. 당시 손권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정신하들은 번성, 양양은 식량이 부족하여 오나라군대를 막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수비장수 조인으로 하여금 완성으로 되돌아와서 지키게 해야한다고 보였다. 사마의는 생각이 달랐다. '손권은 금방 관우를 격패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위나라와 우호적으로 지니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감히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양양은 수륙의 교통요지이니 포깃해서는 안됩니다." 조조는 그의 건의를 듣지 않고, 조인으로 하여금 두 성을 불태우도록 한다. 나중에 손권은 과연 침입해 오지 않았고, 조비는 후회막급이었다.
7. 조비가 살아있을 때 그를 복야(僕射, 승상)로 삼았고, 사후에는 유조로 그를 보정으로 삼는다.
220년 십일월, 조비는 건립된지 440년(기원전220년부터 220년까지, 우연일지라도 교묘하긴 하다)의 한왕조를 끝장내고, 스스로 황제에 오른다. 역사에서는 그를 위문제(魏文帝)라 부른다. 조비는 등극한 후, 사마의를 상서(尙書)에 임명하고, 안국향후(安國鄕侯)에 봉한다. 1년후 그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승진시킨다. 복야는 위나라, 진나라때 재상에 상당한다. 사마의는 할아버지와 부친대의 장관급에서 재상급의 간부로 올라선 것이다.
226년 오월, 조비가 붕어한다. 향년 40세이다. 임종때 조서를 내려 사마의와 중군대장군 조진, 진군대장군 진군, 정동대장군 조휴를 공동 보정으로 삼는다. 그리고 태자 조예에게 이렇게 말한다: 삼공은 의심하지 말라.
8. 촉한저격의 하나. 의표를 찔러 맹달을 죽이다.
사마의의 일생에서 가장 휘황한 전적이자 그의 클라이막스는 바로 제갈량과의 제1차, 제4차 및 제5차북벌때 제갈량과 지(智)와 용(勇)을 겨룬 것일 것이다. 결국 그는 혼자의 힘으로 '와룡'이라고 불리던 제갈량의 중원통일의 꿈을 막아낸다. 그리하여 '와룡'은 한을 품고 구천으로 돌아가고, 위나라의 안전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27년 육월, 촉한의 승상이자 대명자자한 '와룡' 제갈공명은 중원북벌을 준비했다. 중원북벌전에, 그는 한 사람을 생각해낸다. 그것은 바로 이미 조위에 투항한 촉장 맹달이었다. 공명은 맹달을 칠 생각을 한다. 그는 이렇게 구상한다. 맹달은 사람됨이 반복무상하니, 만일 그를 핍박하여 모반하게 하면 촉한이 위를 공격하는데 아주 유리할 것이다. 그래서, 제갈량은 암중으로 맹달과 연락하여 그로 하여금 위나라를 배반하게 시킨다. 동시에 곽모를 보내어 맹달과 갈등관계에 있던 신의에게 거짓투항하게 하여 고의로 이 일을 누설한다. 맹달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거병을 준비한다. 생각지도 못하게 신의가 이 일을 사마의에게 밀고한다. 노모심산의 사마의는 맹달이 돌연 반란을 일으킬까 우려하여, 그에게 서신을 보내 신임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맹달을 속여 넘긴다. 그리하여 맹달은 신속하게 거병하려고 준비하지는 않았다. 시간을 번 다음, 사마의는 8일간 급행군하여 맹달의 성을 포위한다. 맹달은 그 모습을 보고,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위나라군대가 성으로 진입하고, 맹달을 붙잡아 목을 벤다. 그리고 수급을 경사로 보내고 만여명을 포로로 잡는다.
이렇게 하여 제갈량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9. 촉한저격의 둘, 견벽청야(堅壁淸野)
231년 봄, 제갈량의 제4차북벌. 이때 조위의 총사령관 조진은 병이 위중했다. 조예는 다시 사마의를 총사령관으로 파견하여 제갈량에 대항하게 한다. 사마의는 자신의 재지가 제갈량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았고, 그리하여 정확하게 "피기봉망(避其鋒芒)"의 방법을 취하여, 촉군이 피곤하여 스스로 물러나도록 하는 계책을 쓴다. 견벽청야하고 나가서 싸우지 않는 전략을 썼다.
어쩔 수 없이 제갈량은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10. 촉한저격의 셋, 인내, 제갈량의 수명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234년 봄, 제갈량의 제5차북벌 즉 최후의 중원북벌이 시작된다. 사마의는 다시 견벽청야를 생각한다. 촉군의 양초가 공급되지 않으면 스스로 퇴각할 것이다. 제갈량은 더 참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어 사마의에게 여자옷도 보내고, 사마의를 여자라고 욕한다. 사마의 본인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관병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출병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사마의는 암중으로 사람을 보내어 황제에게 도움을 구한다. 위명제 조예는 사람을 군영에 보내어 조서를 내린다. 출졍하는 자는 참하겠다. 제갈량의 계획은 다시 물거품이 된다.
나중에, 제갈량은 다시 한번 사신을 보내어 싸울 것을 청한다. 사마의믄 군사에 대하여는 얘기하지 않으면서, 제갈량의 음식기거가 어떠한지만 묻는다. 사신은 이렇게 말한다: "식사량은 개략 3,4되(升)입니다." 그 후에 다시 정치에 관해서 묻는다. 사신은 이렇게 말한다: "20곤장이상의 처벌은 모두 제갈량이 스스로 검토하여 비준합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대화에서 사마의는 이미 추측한다.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하고 신경을 많이 쓰는 제갈량은 곧 죽을 것이라고. 과연, 제갈량은 그달에 오장원에서 병사한다.
이때부터 제갈량의 아들 사마소가 출병하여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수십년간 위,촉,오 간에는 대규모의 전투는 없었다.
11. 사마의가족의 유전적인 악독함
사마의는 아주 악독한 인물이다. 이 점은 가족의 유전인 듯하다. 아들 사마사, 사마소는 모두 악독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사마의는 일찌기 아주 악독한 일을 저지른 적이 있다. 천하인들이 모두 그의 악독함을 보았다. 238년, 요동공 공손연이 위나라를 침범한다. 사마의는 병력을 이끌고 그를 격패시키고 그를 참살한다. 그 후에 요동을 점령한다. 이때 그는 명을 내려 요동남자중 나이 15살이상은 모조리 죽여버리라고 명령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칠천여명을 죽여버린다.
249년, 위나라 정시10년, 사마의는 조상이 위나라황제 조방을 모시고 낙양을 떠나 고평령으로 성묘를 떠난 틈을 타서 정변을 일으킨다. 역사에서 고평령사건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그후 조상, 환범등은 모조리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모조리 삼족을 멸한다. 연루된 자가 오천여명에 달한다.
12. 사마의도 악독하고 부인도 악독했다.
사마의는 악독했고, 그의 두 아들도 악독했다. 이건 희한할 일도 없다. 어쨌든 정치인이니까. 그러나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의 마누라도 악독했다. 정말 일가족이 모조리 악독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마누라는 일찌가 한 가지 일을 벌인 적이 있다. 당시 사마의는 조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집안에서 중풍이 든 것을 가장하고 있었다. 그날 사마의는 집안에서 책을 말리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돌연 폭우가 내렸다. 사마의는 책을 목숨처럼 아꼈다. 본능적으로 스스로 일어나서 책을 걷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 모습을 집안의 한 비녀(婢女)가 보았다. 병이 든 것처럼 가장해서 조조를 속이고 있는데,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그것은 죽을 죄가 될 것이다. 사마의의 부인 장춘화 여사는 이 일이 누설되면 살신지화를 당할까 겁이 나서, 그 비녀를 죽여버린다.
13. 사마의는 마누라를 죽일년이라고 욕했다.
사마의가 어떤 사람인가? 호색한이다. 이 점도 유전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의 손자, 나중에 진무제가 되는 사마염은 비빈이 너무 많았다. 저녁에 어느 비빈에게 시침을 들라고 할지 몰라서 하나의 방법을 생각해냈다. 양으로 하여금 자신의 수레를 끌게 해서, 어느 궁으로 가면 그녀와 잤다. 사마의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조강지처 장춘화가 못생겼다고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루는 사마의가 병이 든다. 장춘화는 겨우 기회를 잡아 사마의를 만난다. 그런데 사마의는 욕을 해댄다: "늙은 년, 누가 너보고 오라고 했느냐?" 장춘화는 부끄럽기도 하고, 삼심도 되고, 원망도 들도 화도 나서 금식하여 자살하고자 한다. 이는 원래 사마의가 원하던 바이다. 그러나 생각지보 못하게 그가 아끼는 아들 사마사, 사마소는 항의대에 참가하여 집단으로 금식한다. 사마의는 그 말을 들은 후 대경실색한다. 급히 자신의 희신염구(喜新厭舊)한 잘못에 대하여 부인에게 정식으로 사죄하고 깊이 반성한다. 그리고 확실하게 보증한다. 비록 다른 첩을 들이더라도 장춘화의 본부인 지위는 절대로 흔들지 않겠다고.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고 보는가? 절대 아니다. 한번은 사마의가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실 우리집의 못생긴 마누라가 굶어죽더라도 전혀 아까울 것이 없다. 나는 그저 나의 두 아들이 굶어죽을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옛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조강지처불하당. 자기의 조강지처에 대하여 이렇게 악독한 말을 내뱉다니, 사마의는 정말 악독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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