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요(子繇)
여러분은 아마도 이천여년전의 진나라때 사람들의 가정생활과 현대인의 가정생활은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절반만 맞힌 것이다. 생활환경이나 시대조건이라는 요소를 배제하고 본다면, 진나라의 가정생활이념은 현대와 비교했을 때,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은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비슷하건 다르건 분명히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1. 진나라의 소가정구조
진나라 대부분의 풍속문화의 근원은 상앙변법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앙변법이전에 진나라사람들은 자유롭고 산만하고 하고싶은대로 했다. 그때 가정의 인구수는 각각 달랐다. 다만, 절대다수의 경우에는 방대하고 복잡한 대가족 거주형태였다.
변법이 시행된 후부터 이 방면에 새로운 규정이 나타난다. "민유이남이상불분이자(民有二男以上不分異者), 배기부(倍其賦)"(백성중에 사내가 2명이상인데 분가하지 않으면 세금을 2배로 부과한다). 국가의 세수를 늘이기 위하여, 저체 국가는 적극적으로 소가정구조를 장려했다. 그리하여 진나라에는 이런 소가정구조가 안정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진나라의 소가정구조는 현대와 아주 유사하다. 일반적으로 남자 1명을 주체로 하여 하나의 소가정이 구성되고, 일부일처제의 원칙을 따른다. 비록 당시에 첩을 들이는 것이 허용되기는 했지만, 그런 여건을 갖춘 가정은 많지 않았다. 그때는 가족계획도 없고, 몇명의 자식을 낳을지는 자기들끼리 정하면 되었다. 그러나 아이가 커서 일정한 나이가 되면 반드시 분가시켰다. 남자는 장가들고, 여자는 시집간다. 그리하여 새로운 소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이렇게 전승되어 내려갔다.
2. 이혼을 등기하지 않으면 벌금을 냈다.
현대에는 결혼과 이혼을 모두 민정국에 등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나라때에도 정규수속을 밟아 관청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위법행위로 취급했고, 엄격한 처벌을 받았다. 이는 요즘 드라마에서 그냥 휴서(休書) 한 장으로 끝내는 것과는 절대 같지 않았다. 진간(秦簡)에는 명확하게 관련 법조문을 규정해놓고 있다: "기처불서(棄妻不書), 자이갑(貲二甲)" 여기서 '이갑'이라 함은 갑옷 두벌을 의미한다. 남편에게 두 벌의 갑옷을 처벌할 뿐아니라, 처도 마찬가지의 처벌을 받았다.
그때의 일갑은 1344전이다. 이렇게 계산하면, 부부 둘을 합치면 5천여전의 벌금을 내는 셈이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큰 금액이다. 비록 진나라정부가 백성의 결혼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결혼과 이혼은 반드시 관부에 정식등기해야 했다. 이는 호적과 세수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3. 기형아를 죽이는 것은 범죄가 아니었다.
진간에는 아주 잔인한 내용의 법조문이 하나 실려 있다. "기자신생이유괴물기신급불전이살지(其子新生而有怪物其身及不全而殺之), 물죄(勿罪)" 이것은 신생아가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거나 기형인 경우에는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늘날이라면 이것은 물론 비인간적인 방법이다. 그렇다면 당시에 왜 이렇게 했을까?
이천여년전에는 물자가 귀했고, 농사를 짓더라도 배부르게 먹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가정에 노동력이 없는 자가 있으면 그것은 큰 부담이 된다. 당시에 임산부들은 보통 영양이 부족하여, 기형아를 낳을 확률이 현재보다 훨씬 높았다. 그래서 이 규정은 진나라에 가정부담을 경감시켜주고, 우생생육을 촉진하기 위하여 내린 부득이한 조치였다. 진나라법은 비록 이러하지만, 이렇게 할 것인지 아닌지는 부모가 결정한다. 옛날이고 지금이고 자신의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도 차마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4. 자녀가 불효하면 관청에서 죽였다.
먼저 진나라의 법률지식 하나를 얘기해야겠다. 진나라는 소송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공실고(公室告)"이고, 다른 하나는 "비공실고(非公室告)"이다. 간간히 말하자면, 관청이 수리하는 것과 수리하지 않는 것의 두 가지 경우이다. 그렇다면 어떤 소송을 관청에서 수리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사건에 관련된 당사자 쌍방이 혈연관계에 있는 경우이다. 이것은 가정의 내부갈등이다. 소위 "청관난단가무사(淸官難斷家務事)"이다. 관청은 이런 사건에는 발을 담그지 않았다.
다만 현재 얘기해야할 것은 아주 특수한 상황이다. 만일 부모가 자녀를 불효하다고 여기면, 심지어 증거나 아무런 이유도 말하지 않고 관청에 소송을 낼 수 있다. 관청에서는 수리할 뿐아니라, '불효자'로 극형에 처했다. "알살(謁殺)" 같은 상황은 주인과 노비간에도 적용된다. 요즘에는 모두 한나라가 효도를 중시했다고 말하지만, 진나라도 효의 분야에서는 극단을 달렸다.
5. 집집마다 '후계자'가 계승했다.
진나라의 군공작(軍功爵) 제도에서는 작위를 계승할 수 있다. 그리고 계승권은 일가의 가장이 선정한 "후(后)"에게 있다. 이 "후"는 황후가 아니라 황실로 말하자면 '태자'에 해당한다. 즉 한 가정의 후대계스자이다. 미래의 가장이다. "후"의 후보자는 가장의 아들들이다. 일반적으로는 적장자인데, 아들이 없으면 범위를 동족의 조카들까지 넓힐 수 있다. "사오갑무자(士伍甲無子), 기제자이위후(其弟子以爲后)" 즉 동생의 아들이 후가 되었다.
계승권을 얘기하자면 재산상속문제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재산의 상속방식도 현대와 아주 비슷하다. 유언의 방법도 있다. 진나라때는 이것을 '선령(先令)'이라고 불렀다. 선령이 있으면 마찬가지로 공증인과 담보인이 있어야 한다. 향,리의 어른을 모셔서 공증인으로 삼는다. 그래야 이 '선령'은 법률효력을 가지고 법률보호를 받는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나라굴기의 배후에 있는 "소금전쟁" (0) | 2018.08.27 |
---|---|
진왕조가 천하통일후 15년만에 멸망한 원인은 폭정이 아니다. (0) | 2018.08.27 |
진시황 병마용은 왜 투구를 쓰지 않았을까? (0) | 2018.02.28 |
거록지전(巨鹿之戰)의 수수께끼 (0) | 2018.02.16 |
산진자투(散陣自鬪)의 진나라군대가 어떻게 육국을 이겼을까? (0) | 2017.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