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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제갈량의 무덤은 어디에 있을까?

by 중은우시 2018. 12. 28.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제갈량의 북벌은 삼국시기 촉한승상 제갈량이 광부한실(匡扶漢室), 천하통일을 위하여 228년 봄부터 234년 겨울까지 전후로 한중을 출발하여 조위에 일으킨 5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그러나, 제갈량의 북벌에 대하여 결국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마침내 피로가 누적되어 병이 되었고, 촉 건흥12년(234년) 오장원(지금의 섬서성 보계 기산경내)에서 병사한다. 향년 54세이다. <삼국지>등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제갈량은 유언으로 부하에게 자신을 한중의 정군산(定軍山)에 묻으라고 했다고 한다. 거기에 산사에 의존하여 분묘를 만들고, 묘혈은 단지 관을 넣을 정도로만 만들라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나온다. 제갈량의 가족은 모두 촉한의 수도인 성도에 있었다. 왜 제갈량은 사후에 정군산에 묻어달라고 했을까? 촉한의 도성인 성도가 아니라.


먼저, <삼국지.촉지.제갈량전>의 기록을 보자. 제갈량이 유언으로 "한중 정군산에 묻으라(葬漢中定軍山)"고 했고, 그래서 정군산에 무후묘(武侯墓)를 만들었다고 한다. 제갈량에 있어서, 서주 낭야의 양도(지금의 산동성 임기시 기남현) 사람이다. 다만, 삼국시대에 서주 냥야 양도는 이미 조위의 강역이다. 제갈량이 자신의 고향에 묻힐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족이 있는 성도가 제갈량의 안장지로 선택될 만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한중지역의 정군산에 묻어달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필자의 생각으로 제갈량이 이렇게 한 것은 기실 이유가 간단하다.


한편으로, 제갈량이 정군산에 묻어달라고 한 것은 정군산이 한중에 있기 때문이다. 촉한이 조위를 북발하는 최전선이다. 이 기초 위에서 제갈량이 사후에 이곳에 안장되기를 원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생전에 시종 중원북벌을 명심하고 있었고, 한실을 부흥시키고자 하였으며, 심지어 이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았다는 것을 즉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했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동시에 제갈량의 이런 조치는 후인들에게 알리고 격려하려는 의도도 있다. 예를 들어 촉한의 후주 유선과 강유, 비위, 장완등 문신무장들에게 한실을 광복하고, 조위를 북벌해야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더더욱 제갈량의 필생의 바램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것은 제갈량이 만일 사후에 성도 혹은 촉한의 다른 지방에 안장되었다면, 확실히 그런 효과는 발생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군산은 대파산맥(大巴山脈)에 속한다. 그 맥은 고묘자(高廟子)에서 평지로 들어가며, 빼어난 봉우리가 12봉이 있다. 석산자(石山子)에서 원산자(元山子)까지 "십이연봉(十二連峰)"이라고 불린다. 다시 동쪽으로 가면 당구사고봉(當口寺孤峰)이 있다. 서에서 동으로 10여킬로미터가 이어진다. 즉 정군산은 병가의 필쟁지지일뿐아니라, 여러 산봉우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제갈량이 사망하기 전에 후주 유선에게 유언을 남겨서 4명에게 그의 관을 매고 계속 남으로 가다가, 밧줄이 끊어지면 그곳에 자신을 묻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4명이 밧줄에 관을 매고 가다가 밧줄이 끊어지기도 전에 이미 기진맥진하여, 정군산의 아무 곳이나 한 곳을 선택하여 묻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주 분명하다. 정군산의 복잡한 지형에 제갈량의 유언까지 더해져서, 제갈량이 묻힌 구체적인 장소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에 상응하는 것은, 만일 제갈량이 사후에 촉한의 도성 성도에 안장되었더라면, 그의 묘는 쉽게 찾아질 것이다. 촉한의 실력이 조위보다 명백히 약한 상황하에서 언제 조위의 대군이 촉한의 도성 성도를 함락시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여러번 조위를 북벌하였으므로, 자신의 묘가 도굴당하고 파괴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래서 제갈량은 사후에 정군산에 안장되기를 원했고, 정군산의 복잡한 지형을 이용하여 그리고 비교적 은밀한 매장방법으로 도굴의 위험을 피한 것이다. 이것은 제갈량의 또 다른 총명한 점이다. 이에 대하여 북위의 지리학자 역도원은 <수경주>에서 이렇게 적었다: "그 산에 묻었으나, 지세를 따라서 묻었고, 분묘를 만들지 않았다." 분묘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면 제갈량은 확실히 남들이 자신이 묻힌 곳을 알기 원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