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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삼국시대 제갈량의 가족들....

by 중은우시 2018. 11. 15.

글: 육기(陸棄)


자고이래로 모만세(謀萬世)하지 않으면 모일시(謀一時)할 수 없고, 모전국(謀全局)하지 않으면 모일성(謀一城)할 수 없다. 강태공은 낚사를 하다가 주문왕을 낚아서, 주왕조 800년강산을 도모했고, 귀곡자는 도리만천하(桃李滿天下)로 칠국이 칭웅하게 돕고, 최종적으로 진시황이 육국을 통일하게 만든다; 유방은 장량의 계책으로 진을 멸하고 항우를 멸하여, 400년 한왕조를 연다. 이들은 모두 모만세, 모전국의 인걸들이다. 후한때 삼국이 나타나서 군웅이 축록하여, 조조, 손권, 유비가 삼분천하했는데, 마지막에는 숨어있던 '총호(冢虎)' 사마의의 후손이 천하를 통일한다. '총호'는 사마의를 말하고, '와룡(臥龍)'은 제갈량을 말한다. 조조, 손권, 유비도 일세의 영웅이지만, '와룡', '총호'의 두 가족이야말로 '모만세', '모전국'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최종의 승리자가 된다.


사마가족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삼국이 진으로 통일되고, 진왕조 150년의 강산을 연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제갈가족은 제갈량이 죽은 후 영광이 끝났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제갈가족은 제갈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 제갈가족은 후한 삼국에 뿌리깊게 퍼져 있었고, 널리 퍼져 있었다.


제갈가족의 용호구(龍虎狗)


전삼국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제갈량이다. 공명은 모옥에서 나오기도 전에 삼분천하를 정했고, 산을 내려오기 전에는 농사짓는 농부였지만, 하산후에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와룡'이라는 별명에 부끄럽지 않았다. 군사적으로는 '화공'의 비조라고 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이다. 화소박망파(火燒博望坡), 화소신야(火燒新野), 화소적벽(火燒赤壁) 조조에게 세번의 '화공'을 날렸다; 칠종칠금때는 '화소등갑군(火燒藤甲軍)', 사마의와 싸울 때는 '화소상방곡(火燒上方谷), 각각 맹획과 사마의에게 화공을 한방씩 날린다.


정치, 경제적으로 제갈량은 더욱 뛰어났다. 촉한이 건립된 후, 제갈량은 승상, 무향후가 되어 백성을 다독이고, 의궤를 보이며, 관직을 다잡으며, 권력과 제도를 만들고, 진심을 보여주며, 정의를 널리 펼친다. 축한을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잘 다스렸다. 그의 지위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었다. 유방은 그를 가리켜, "물만난 고기같다'고 했고, 유선은 그를 '상보(相父)'로 모신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그를 "치지양재(治之良才), 관소지아필(管蕭之亞匹)"이라고 했다. 관소는 관중과 소하를 가리킨다. 시성 두보도 <촉상>이라는 시를 지어 제갈량을 추도한다:


승상사당하처심(丞相祠堂何處尋), 금관성외백삼삼(錦官城外柏森森)

영계벽초자춘색(映階碧草自春色), 격엽황리공호음(隔葉黃鸝空好音)

삼고빈번천하계(三顧頻煩天下計), 양조개제노신심(兩朝開濟老臣心)

출사미첩신선사(出師未捷身先死), 장사영웅누만금(長使英雄淚萬襟)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諸葛瑾)은 동오에서의 정치적 지위가 아주 높았다. 손권이 칭제한 후 관직이 대장군, 영예주목에 이른다. 제갈량형제들은 비록 '형제'이지만, 공사를 분명히 해서 각각 서로 다른 주군을 모신다. 유비가 오나라를 토벌할 때, 제갈근은 유비에게 서신을 보내어, 유비가 곤우의 복수를 하려는 것은 "소인의 마음으로 큰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질책한다.


제갈근과 손권의 관계는 제갈량과 유비의 관계보다 못하지 않았다. 손권은 일찌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유(子瑜, 제갈근)와 고(孤, 본인)는 같이 일한지 오래 되어서 골육과도 같아 서로를 깊이 잘 알고 있다. 그의 사람됨은 도가 아니면 행하지 않고, 의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고와 자유는 신교(神交)라 할 수 있다. 바깥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고와 자유는 생사로도 가를 수 없는 맹세가 있다. 자유도 고를 배신하지 않고, 고도 자유를 배신하지 않는다." 제왕이 신하와의 관계를 '골육과 같다', '생사로도 가를 수 없다'라고 표현하였으니 지음지교(知音之交)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갈근이 사망한 후, 아들 제갈각(諸葛恪)은 손권에게 수석탁고대신으로 임명되고, 전후로 오주 손량이 집권한 시기에 대장군, 승상, 태부의 직위를 받고, 양도후에 봉해진다. 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동흥대첩을 거둔다. 그의 지위는 하늘에 뜬 해와 같았고, 제갈량의 촉에서의 지위와 비교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제갈량의 동생 제갈탄(諸葛誕)은 자가 공휴(公休)이고, 조위에서 잘 나갔다. 위나라에서의 관직이 정동대장군, 고평후에 이른다. 일찌기 사마사(司馬師)와 함께 관구검(毌丘儉), 문흠(文欽)의 반란을 토벌하여 혁혁한 공헌을 세운다. 제갈량, 제갈근과 마찬가지로, 제갈탄은 위나라에 충성하는 장군이다. 각각 다른 주군을 모셨으므로 제갈탄은 일찌기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사의 지휘하여 병력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한다. 동오에서 권력의 중추에 있던 조카 제갈각과 격전을 벌인다. 역사에서 '동흥전투'라고 부르는 전투이다. 제갈각은 친히 4만의 오나라병력을 이끌고 숙부인 제갈탄과 대진한다. 대장 정봉(丁奉)이 눈오는 밤에 습격하여 위나라에 대승을 거둔다. 위나라의 전부독 한종(韓綜) 낙안태수 환가(桓嘉)는 익사하고, 위나라 대장 관구검, 왕창(王昶)은 군영을 불태우고 도망친다. 제갈숙질의 교전에서는 조카가 대승을 거둔다. 전투전에 제갈탄은 사마사에게 정확한 전법을 제시했지만, 사마사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동흥전투후에 사마사는 스스로 나서서 모든 책임을 부담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공휴(제갈탄)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여러 장수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삼국무대에서 제갈가족은 빛나는 별이 많았다. 당시에는 제갈근, 제갈량, 제갈탄이 모두 이름을 떨치고 각각 다른 나라에 있었다. 그래서, "촉에서는 용(龍)을 얻고, 오에서는 호랑이(虎)를 얻고, 위에서는 개(狗)를 얻었다."라는 말이 있었다.


평생의 적에서 자손의 혼인까지.


제갈량, 제갈근, 제갈탄의 세 명이 죽은 후, 후삼국시대에 제갈가족은 어떠했는가?


촉한에서 등애가 음평을 기습하여 성공한 후, 병력이 밀려오자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諸葛瞻), 손자 제갈상(諸葛尙)은 전투에 나섰다가 전사한다; 동오에서 손준(孫峻)이 제갈각과 권력다툼을 벌이게 되어, 손준은 제갈각을 죽이고 삼족을 멸한다; 조위에서 제갈탄은 위나라에 충성하여, 사마씨형제가 권력을 농단하는데 불만을 품고, 위나라를 버리고 동오로 간다. 그 결과 사마소와의 수춘혈전에서 패배하여 피살된다. 사마소는 제갈탄의 삼족을 멸한다. 제갈탄의 휘하에 있던 수백명은 포로로 잡혀서 아무도 항복하지 않고 참살된다. 이때부터 제갈가족은 삼국무대에서 막을 내린 듯하다. 그러나, 제갈가족의 또 다른 영웅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제갈서(諸葛緖)이다.


제갈서는 자가 우명(佑明)이고, 제갈탄과 같이 위나라에서 관직을 지낸다. 관직은 태산군태수, 옹주자사에 이른다. 비록 동족인 제갈량, 제갈근, 제갈탄처럼 높지는 않지만 그대로 동한때의 태수, 자사는 한 지방의 장관이다. 장관급의 고위관직이라고 할 수가 있다. 후삼국시대의 장관급 간부로서 제갈서는 전후로 동오를 공격하는 전투에 참가하여, 제갈각과 대진한 바 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오나라의 대장군 소준등은 십만이라고 부르는 군대를 모아서, 장강을 건넌다. 진동장군 제갈탄은 등애를 보내어 비양을 지키게 하고, 등애는 적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중요한 곳이 아니라 여기고, 부정으로 옮겨서 주둔한다. 그리고 태산태수 제갈서등을 여장을 보내어 맞싸우게 하여 결국 쫓아냈다." 즉, 제갈서는 명장 등애의 지휘하에 동족인 제갈각과 손준을 격패시켰다는 것이다. 또 다른 전투도 등애의 지휘하에 위나라가 촉을 멸망시키는 전투이다. 사마소는 '일석이조'의 게책으로, 등애로 하여금 강유를 견제하게 하고, 제갈서로 하여금 음평교를 끊게 하여 강유의 퇴로를 차단한다. 그리고 종회로 하여금 촉군주력이 배치되지 않은 전략요충지 한중으로 진공하게 한다. 결국 위나라는 촉을 성공적으로 멸망시킨다. 그러나 위나라의 이 몇개 부대는 내분이 발생하여, 제갈서부대가 종회부대에 흡수재편된다.


제갈가족중에서, 제갈서는 비록 제갈량, 제갈근, 제갈탄처럼 빛나지는 않지만, 그의 일맥은 화를 당하지 않고, 서진때 진무제 사마염의 신임과 중용을 받는다. 삼국이 진으로 통일된 후, 제갈서는 공로로 관직이 태상(太常), 위위(衛尉), 낙안정후에 이른다. 태상이라는 관직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다. 천자의 제사, 예의를 관장하는 관직이다. 동시에 박사시험의 주시험관이다. 구경의 으뜸이다. 위위는 궁궐수비를 담당하는 관직이다. 천자가 아주 신임하는 자가 아니라면 맡을 수가 없다. 사마염의 신임을 받았으므로 그의 수려하고 단장한 손녀 제갈완아(諸葛婉兒)는 후궁이 되어 황후의 바로 다음가는 부인(夫人)이 된다. 제갈일족은 이로 인하여 서진 개국황제의 외척이 된다. 제갈서의 아들인 제갈충(諸葛沖)은 황제의 국장(國丈)이 되고, 형옥을 담당하는 정위(廷尉)를 맡고, 평양향후에 봉해진다. 제갈충의 두 아들중 제갈전(諸葛銓)은 산기상시가 되고, 제갈민(諸葛玟)은 시중, 어사중승이 된다. 그 외에 제갈량의 손자 제갈경(諸葛京)은 강주자사가 되고, 제갈탄의 손자 제갈회(諸葛恢)는 상서령이 된다. 제갈일가는 진무제 사마염을 도와서 '태강성세(太康盛世)'를 만들어, 혁혁한 가문이 되어 진왕조의 관료세가로 된다.


동진때, 제갈일족은 명문거족이다. 심지어 삼국시대 제갈량의 명성보다도 높았다. 제갈량의 동생 제갈탄은 비록 위나라를 배반하여 삼족이 멸해졌지만, 그의 장녀는 해를 입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사마의의 다섯째 아들인 사마주(司馬伷)에게 시집을 가서 제갈태비(諸葛太妃)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마주는 보통인물이 아니다. 그는 서진 개국황제인 진무제 사마염의 숙부이고, 전후로 상서우복야, 무군장군, 진동대장군, 동관군왕, 낭야왕, 가개부의동삼사등의 직위를 맡는다. 제갈태비는 사마주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낳는다. 사마근(司馬覲), 사마담(司馬澹), 사마요(司馬繇). 사마근의 아들 사마예(司馬睿)는 바로 동진의 개국황제 진원제(晋元帝)이다. 진원제의 외증조부가 바로 제갈탄이다. 그리고 제갈탄은 제갈량의 당제이다. 그러므로, 제갈일족은 동진의 외척이 된다. 동진의 황제에게는 대대로 제갈가족의 피가 흘렀다. 제갈량은 그리하여 동진황제에게 '무흥왕'에 봉해진다! 와룡, 총호는 평생 적으로 만났는데, 아마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자손이 혼인하여 화하를 백년간이나 주재하게 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