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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원)

원명종(元明宗) 화세랄(和世瓎): 서역으로 망명했던 단명황제

by 중은우시 2018. 12. 25.

글: 화운초(和運超)


역사상 절대다수의 황제는 궁정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호의호식하면서 곁에는 시종들이 많이 따르고 항상 보호를 받고, 계속 사람이 따른다. 전란을 겪는 경우나 개국황제가 아니면, 중간의 소위 승평(承平)시대의 황제라면, 백성을 접촉하고싶으도 기회가 아주 적을 것이다. 당연히 세상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다. 극소수의 망명생활을 한 황제가 있다. 그들은 비교적 유명한데, 앞에는 한선제(漢宣帝)가 있고, 뒤에는 당선종(唐宣宗)이 있다. 둘은 명호가 유사할 뿐아니라, 민간의 질곡을 경험했고, 그리하여 비교적 우수한 황제가 된 인물들이다. 그러나 본문의 주인공은 예외중의 예외이다. 그의 일생은 비참하고 무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바로 원나라의 제9대황제 원명종 화세랄(허스라)이다.


필자는 일찌기 <모살당한 중국황제>라는 글에서 원명종을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단명'황제이다. 황위에 등극한지 겨우 8개월만에 내란으로 죽는다. 나이 겨우 30살 가량이다. 이는 그가 황제가 된 후의 비참한 결말이고, 그가 황제에 오르기 전에도 아주 비참했다. 일찌기 국외에서 12년간 떠돌아다닌 바 있다. 대부분의 기간동안 머나면 서역의 금산(金山) 일대에서 숨어지냈다. 그때 차카타이한국에서 그를 받아주었다. 몽골역사상, 만일 몇대칸국의 분봉자가 없었더라면, 서역으로 망명한 사람은 황위쟁탈전의 실패자이다. 예를 들면 오고타이가족이 그러하다. 비록 친왕이더라도, 도망범이나 추방자와 큰 차이가 없다. 어떤 때는 양과 말을 방목하는 것도 편안하지 못했다. 전체 몽골원나라때, 황위계승제도가 확립되어 있지 않아서, 대란이 일어난 경우가 많다. 징기스칸 사후부터 원순제까지 계속하여 혼란이 있었다. 이는 원나라의 기틀을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황조존속기간이 길지 않은 원인중 하나이다. 원명종의 일생은 아주 전형적으로 이 심각한 역사현상을 증명해주고 있다.


원명종 허스라는 원나라 중엽에 생활했고, 원성종(元成宗)부터 원혜종(元惠宗)이 등극할 때까지 합쳐서 20여년간 주마등처럼 6명의 황제가 교체된다. 평균재위기간은 4년이고, 가장 짧은 원녕종(元寧宗) 의린질반(懿璘質班), 즉 허스라의 차남은 겨우 1개월여동안 황위에 앉아 있다가 나이 겨우 7살때 세상을 떠난다. 이를 보면 원명종의 운명은 그의 일가 및 전체 원나라의 운명에 부대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한다.


망명하게 된 배경


1328년 8월, 원나라 치화원년, 태정제(泰定帝) 야손철목아(也孫鐵木兒)는 주색에 빠져서 상도(上都, 지금의 내몽고자치구 시린궈러맹 정남기 두륜현 상도진 동섬전하북안)에서 사망하니 향년 36세이다.(사서 기록이 이러하다. 이는 분명 '부르는 나이'일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연구자들은 태정제의 생년에 논쟁이 있다. 종합해보면 서사기재의 신뢰도가 여전히 높은 편이다). 그의 사망은 원나라 역사상가장 피비린내나는 황위쟁탈전을 불러온다. 그 결과 황위는 다시 원무종(元武宗) 해산(海山)의 후손의 손에 넘어가고, 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야손철목아가 죽은 후, 4년전에 황태자로 봉해진 그의 막내아들 아속길팔(阿速吉八, 역시 1328년에 사망하고, 천순제(天順帝)라 불린다. 당연히 더 많은 주장은 그가 실종되었다고 말한다)이 10월에 상도에서 즉위한다. 그를 옹립한 것은 중서우승상 도랄사(倒剌沙), 요왕 탈탈(脫脫)과 야손철목아의 조카이자 양왕(梁王)에 봉해진 왕선(王禪, 운남에 있다)이다.


동시에 대도(大都)궁중의 중첨추밀원사 연첩목아(燕帖木兒)는 선발제인으로 백관을 흥성궁(興聖宮)에 모아서 국사를 논의할 때, 아랄철목아(阿剌鐵木兒), 발륜적(孛倫赤)등 17명을 이끌고 신하들에게 호소한다: "무종황제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천하의 정통은 마땅히 그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감히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죽음뿐이다." 해도(海都)와 도와(都哇)는 여러왕의 전쟁과정에서 전공이 혁혁한 킵차크가족이다. 조부는 일대명장인 토토합(土土哈)이다. 부친 상올아(床兀兒, 1260-1322)돠 그 본인은 모두 해산(海山)이 반란을 진압할 때의 총사령관과 해산이 즉위할 때의 옹립자이다. 원무종 재위때 연찹목아가족의 지위는 최고조에 달한다. 다만 그후 두 황제때 이 가족은 일락천장한다. 태정제가 사망할 때, 연첩목아는 직급이 높지는 않지만 주로 주요업무를 담당하는 추밀원 첨원이라는 직위를 갖고 있었다. 아마도 해산에 대한 충성과 가족의 지위를 하루빨리 회복하려는 바램때문에 연찹목아는 태정제의 아들이 승계하는데반대한다. 그리하여 이때는 대도와 상도가 상호 대립하는 두 세력으로 남는다.


대도와 상도는 각각의 궁정제도가 갖추어져 있었다. 전체 원나라가 양도제(兩都制)를 시행하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우리는 대도가 원나라의 수도이고, 상도는 행궁이라고 여긴다. 기실 대도와 상도의 정치적 지위는 같았다. 쿠빌라이는 바로 상도에서 황위에 등극했다(당시에는 개평(開平)이라고 불리웠고, 금나라때 금련천(金蓮川)이며 행궁으로, 황제가 초원부락의 우두머리를 접견하거나 피서 사냥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원나라황제는 초원의 습속에 따라 순행했다. 상도는 여름가을에 계속하여 수도로 조정의 사무를 보았다. 그리고 각각 절반의 시간을 보낸다. 지위에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태정제는 대부분의 시간을 계속하여 상도에서 보낸다. 그러나 그는 입추후에 병이 들면서 대도가 비게 되고, 연첩목아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역량을 축적한다. 태정제가 죽은 후, 앞장서서 대도의 적대관리를 제거하고, 신속히 원무종의 아들로 하여금 황위를 승계하도록 옹립한다.


원무종 해산은 두 아들을 남겼다. 장남은 화세랄로 당시에 주왕(周王)이었고, 멀리 서역에 있었다; 차남 도첩목이(圖帖睦爾)는 회왕(懷王)으로 강릉에 있었다. 연첩목아는 속전속결을 원했고, 자연히 차남 도첩목이에게 눈길을 돌린다. 대도를 통제한 후, 연첩목아는 사람을 강릉의 도첩목이와 하남에서 하남평장정사(河南平章政事)로 있던 메르키트부의 백안(伯顔)에게 보낸다. 백안은 이번 황위쟁탈전에서 주요한 인물이다. 그는 해산이 여러 왕들의 반란을 진압할 때 수하의 하급막료였다. 백안이 현지의 군대와 물자를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친히 도첩목이를 호송하여 대도로 간다. 그해 늦가을, 도첩목이는 즉위하고 원문종(元文宗)이 된다. 그리고 그의 형인 화세랄이 대막에서 돌아온 후에 즉시 황제위를 양보하겠다고 선언한다. "형님이 돌아오시는 때에 짐의 양위하려는 뜻을 완수하겠다." 당시 원문종이 이 말을 할 때는 아마 8할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도의 여러왕의 세력이 강하고, 여러 행성의 적지 않은 사람들도 대도에서 반역을 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은 관망하고 있었다. 원문종은 스스로 자신이 없었고, 그는 원무종의 적장자도 아니다. 그저 먼저 즉위한 후 '형님'카드를 내미는 것으로 인심을 안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니 문제가 생겼다. 왜 화세랄이라는 원무종의 적장자는 멀리 서역에 있었을까?


당시 원무종 해산이 반란을 일으킨 여러 왕들을 진압하고 용상에 앉은 후, 동생인 원인종(元仁宗) 애육려발력팔달(愛育黎拔力八達)과 관계가 친밀했고, 형이 죽으면 동생에게 황위를 넘기겠다(兄終弟及)고 말했었다. 그러나 다시 약속하기를 장래 원인종이 죽으면 황제위를 다시 그의 아들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신하 삼보노(三寶奴)는 일찌기 원무종이 살아있을 때 일찌기 대신회의를 소집하여 원무종의 장남 화세랄을 황태자로 세우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형종제급의 맹세를 뒤집으려는 뜻을 보인다. 대신인 강리탈탈(康里脫脫)이 반대한다: '황태제는 종사를 보좌한 큰 공이 있고, 이미 동구에 있은지 오래 되었으며, 형제숙질이 황제위를 잇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는데, 어찌 돌연 말을 바꾼단 말입니까!" 삼보노는 묻는다: "오늘 형이 후계자의 자리를 동생에게 넘겨주어 앉게 했는데, 나중에 숙부가 황제의 자리를 조카에게 물려준다고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강리탈탈의 대답은 아주 명쾌했다: "나 개인은 맹세를 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만일 누군가가 약속을 어긴다면, 하늘이 위에 있으니 반드시 보응을 받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하게 원인종이 즉위한 후, 모후와 대신 철목질아(鐵木迭兒)의 종용으로 과연 맹세를 배반하고, 황태자의 자리를 자시의 아들인 석덕팔랄(碩德八剌) 즉 원영종(元英宗)에게 준다. 그는 화세랄을 주왕으로 봉하여 멀리 운남으로 보냈다. 이는 확실히 변방의 황량한 곳으로 유배를 보낸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조치는 당연히 비난을 받았다. 연우3년(1316년), 주왕 화세랄은 운남으로 가는 도중에 연안에 도착한다. 수하인 교화(敎化)등은 모두 원무종의 노신이고, 계속 불만이 가득했다. 당시 섬서행성의 승상이던 아사한(阿思罕)과 비밀리에 연락하여, 화세랄을 대도로 모셔가서 황제위를 다투겠다고 선포한다. 아사한은 원래 조정에서 태사(太師)의 직에 있던 사람으로 명망이 상당했다. 그런데 권신 철목질아에 의해 지방으로 쫓겨나 있었던 것이다. 보복을 위하여 그는 병력을 일으켜 주왕을 옹립한다. 그러나 기밀이 누설되어, 섬서행성의 평장정사 탑찰아(塔察兒)가 아사한과 교화등을 죽여버린다. 상황이 위급해지자, 주왕 화세랄은 기회를 틈타 새외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계속 서북으로 도망친다. 이 사건에 대하여는 원인종도 마음 속으로 미안한 감정이 있어서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지나간다. 그후 석덕팔랄이 황제위에 오른 후, 철목질아는 포기않고 계속 추궁한다. 화세랄을 하는 수 없이 서역으로 도망간다. 그러나 도첩목이는 아직 중원에 있었고, 계속하여 경주 해남도로 유배보낸다. 태정제가 즉위한 후에 비로소 도첩목이를 중원으로 불러 회왕으로 봉해 강릉에 안치한다. 처지가 호전된 것이다.


서역망명생활


서역에 망명한 화세랄은 황위쟁탈전에서 멀어졌다고 할 수 있다. 차카타이한국의 군군신은 이 어려운 처지에 빠진 황자를 받아준다.


화세랄은 한차례 겁난을 겪은 후, 많은 것을 느낀 것같다. 그는 스스로의 혈통이 고귀하다는 것을 내세우지 않고, 차카타이종왕과 약속을 한다. 겨울에는 찰안에 지내고, 여름에는 알라알찰산에서 지내며, 봄여름에는 따르는 자들과 금산에서 함께 농사를 짓기로 한다. 그리고 현지의 여러 부락들과도 평화롭게 공존하기로 한다. 이를 위하여 그는 화합랄로부(和哈剌魯部)와 정략결혼까지 한다. 화합랄로부는 몽골인부락이 아니라, 돌궐 철륵등이 결합한 후에이다. 당나라때로부터 요,송에 이르기까지 갈라록(葛邏祿)이라 불리웠으며, 서역의 고산초원지대에서 생활했다. 그 명칭은 고돌궐어의 '설산(雪山)'이라는 뜻을 지니공 ㅣㅆ다고 한다. 나중에 카라칸국과 서요(西遼)왕조에 귀순하여, 중앙아시아에 퍼져 있었다. 나중에 우즈베키스탄의 선조중 하나가 된다. 그리도 다시 왕비 매래적(邁來迪)을 취하고 아주 총애한다. 그녀는 나중에 원혜종(元惠宗)이 되는 타환첩목아(妥歡帖木兒)를 낳는다. 그러나 아쉽게도, 매래적은 아이를 낳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이전의 왕비 팔불사(八不沙)는 그와 함께 환난을 여러해동안 같이 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했었다. 팔불사의 아들 의린질반(懿璘質班)은 1326년에 태어난다.


화세랄 일가는 이렇게 서역의 대막초원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몽골 본토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은 거의 없었다. 이전에 궁정의 권력다툼 소용돌이에 말려 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화세랄은 싫증이 났다. 원래 이 금산에서 평생을 살고자 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변화무쌍하다. 태정제가 돌연 죽고 그는 다시 동귀(東歸)의 소식을 듣는다. 이때 그는 이미 망명한지 12년이 되었다. 사랑하는 왕비 매래적이 죽은 지도 이미 8년이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원무종의 적장자로서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여러 제후들의 추대를 받아 황위쟁탈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만일 그가 부황 해산과 같은 인물이었다면 아마도 운명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정정당당한 수성의 군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질이 너무나 평범했다. 그저 호랑이들이 쫓는 대상일 뿐이고, 참담하게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변화는 서역 차카타이칸국이 화세랄을 받아준 것과도 잠재적인 관계가 있다.


차카타이칸국은 14세기에 거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도와부터 시작하여 원래 오고타이칸국의 종왕 해도에 신복(臣服)하고 있었다. 해도가 철견고산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한 후, 도와는 원나라와의 전쟁을 끝낼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해도의 아들 찰팔아(察八兒)와 함께 원나라와 우호관계를 맺는다. 그리하여, 원성종은 반세기를 끌어온 서역의 전쟁을 억지로 끝내게 된다. 얼마 후, 도와일가는 찰팔아일가를 계략에 빠지게 하고, 차카타이칸국은 점점 오고타이칸국을 잠식한다. 이때부터, 차카타이칸국은 서역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찰팔아는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나중에 막북으로 돌아간다. 다행히 원무종이 거두어주어서, 오고타이일가는 일맥을 남길 수 있었다.


도와는 1306년에 병사한다. 그후 관도(寬闍)가 칸위를 승계하나 금방 급사한다. 몽골의 말자상속 전통에 따라, 도와의 막내아들인 겁별(怯別)이 칸위를 승계한다. 그는 1년간 칸의 자리에 있다가 칸의 자리를 형인 야선불화(也先不花)에게 양보한다. 야선불화는 어려서 대도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아주 용맹하고 호승심이 강하다. 이때 차카타이칸국은 찰팔아를 추격한다는 핑계로 영지를 넓히고 한때는 병력을 이끌고 원나라본토까지 공격한다. 그러나 이익을 보지는 못한다. 나중에 다시 더욱 먼 곳에 있는 일칸국을 공격한다. 연이은 전쟁으로 칸국의 내부가 불안정했고, 특히 하중지구의 여러 돌궐후손들이 분화해 나가는 것이 심각했다. 그리하여 제후들의 힘이 강성해져서 징기스칸 후손들을 무시하는 경우까지 벌어진다. 칸국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겁별과 야선불화는 아력마리(阿力麻里, 이 지역은 원래 징기스칸 생저에 차카타이에게 분봉해준 봉지이다)일대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카차흐부락의 두랍특부(杜拉特部)의 수령을 회유하여, 아력마리에서 쿠빌라이대회를 개최하고, 정식으로 야선불화가 칸을 칭한다. 야선불화의 아장(牙帳)은 여전히 아력마리의 호아사(虎牙思)에 설치되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당시의 차카타이칸국은 원나라의 형제간의 암전(暗戰)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야선불화의 칸 자리는 겁별에게서 받은 것이어서 야선불화는 겁별이 복위하는 것을 겁낸다. 그러므로, 그는 아예 칸국의 동부지구를 명목상 겁별과 두랍특부가 공동관리하도록 넘긴다. 실제로는 두랍특부가 겁별을 감시하고 압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하중의 사마르칸트로 가서, 화폐를 발행하고, 농업을 개선하는등 여러가지 회유수단으로 칸국을 안정시킨다. 이런 조치는 기실 이미 칸국의 분열에 씨를 뿌린 셈이다. 1320년, 야선불화가 죽은 후, 겁별이 다시 복위한다. 그도 개혁과 안정의 책략을 유지한다. 그리고 칸국을 사방으로 순행한다. 그 뜻은 각지의 가족을 회유하는 것이다. 화주(火州), 별실팔리(別失八里)등에는 궁전을 만든다. 그외에 가장 중요한 점은 그가 일칸국 및 원나라와의 관계를 완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사신을 파견하여 원나라에 조공을 바친다. 어쨌든 서역에서 안정적인 국면을 창조한다 1326년 겁별이 사망한다. 그의 형제인 연지태길(燕只台吉), 독래첩목아(篤來帖木兒)가 전후로 칸위를 승계한다.


그렇다면, 주왕의 신분이던 화세랄이 서역에 망명할 때는 바로 야선불화와 겁별이 재위하고 있을 때이다. 특히 겁별이 복위한 후, 원나라와의 관계개선을 주장하여 더욱 큰 지지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이 원무종의 적장자를 비교적 잘 보살펴 주었다. 화세랄은 서역에서 비교적 평안하게 10여년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겁별이 그에게 잘해주었을 뿐아니라, 다른 종왕인 연지태길, 독래첩목아도 화세랄에게 아주 우호적이었다. 대도에서 화세랄이 돌아와서 황제위를 승계하라는 말이 전해져오자, 차카타이일가의 여러 왕들은 화세랄을 아주 종요한 카드라고 여긴다. 특히 연지태길은 칸의 계승자로서 친히 화세랄을 막북으로 돌아가도록 호송한다. 그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이 거동이 결국 화세랄을 죽음으로 몰고갔다는 것이다.


형제은원과 원명종의 죽음


상도와 대도의 두 세력이 대치할 때, 처음에는 상도세력이 우세를 점했다. 그들은 장성의 관구를 점령한 후, 대도를 향해 진격한다. 원나라역사상 '양도지전(兩都之戰)'이라고 불리는 전투이다. 다만, 그들은 대도측의 실력을 저평가했고, 장수집안의 후손인 연첩목아는 절대로 허명만 떨친 것이 아니었다. 친히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하면서 금방 국면을 역전시킨다. 동시에 상도세력에 대하여 치명적인 타격이 동몽골 방면에서 돌연 내습한다. 아마도 연첩목아의 숙부이자 동몽골군 도원수인 불화첩목아(不花帖木阿)의 영향으로 많은 동몽골의 제후들이 대도를 지지한다. 그들의 군대는 불화첩목아와 제왕(齊王) 월로첩목아(月魯帖木兒, 징기스칸 막내동생의 후손)의 지휘하에, 그해 겨울에 상도를 포위한다. 이때 상도의 절대다수의 군대는 여전히 장성일선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상도궁정은 어쩔 수 없이 다음 날 투항한다. 도랄사와 절대다수의 수뇌인물이 모두 체포되고, 처형당한다. 젊은 천순제 아속길팔(阿速吉八)은 재위기간이 1달도 되지 않았는데, 실종되고 만다. 당시 나이 겨우 8살이다. 아속길팔의 최후는 수수께끼이다. 일부 사람들은 확실히 혼란중에 실종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대군이 입궁할 때, 저대다수의 조정신하, 후비, 궁녀가 모두 있었기 때문이다. 유독 어린 황제만 보이지 않았다. 주요정의 <정설원조십오제>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천순제 아속길필은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은 '실종'은 나중에 뿌린 연막탄으로 본다. 혼란중에 죽었거나 혹은 도랄사가 투항하기 위하여 죽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본다.


원문종 도첩목이가 순조롭게 등극한 후, 자신이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신하를 여러번 보내어 서북에 여러해동안 망명중인 형에게 대도로 돌아와서 등극하라고 한다. 그러나 여러가지 흔적을 보면, 겨우 생활의 안정을 찾은 화세랄은 이 '의외'의 좋은 일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의문을 품고 있었고, 몸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대, 원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는 차카타이의 여러 왕과 카자흐부락의 수령들은 모두 그에게 돌아갈 것을 권한다. 그외에 그를 따라 동분서주한 수행인원들도 주왕이 황제위를 승계하기를 바랐다. 사람들은 모두 이 기회에 큰 상을 받기를 기대한 것이다. 주위의 반복되는 권유에 화세랄은 어쩔 수 없이 응락한다. 다시 노신 패라(孛羅)를 대도로 보내 예절을 상의하게 한다. 어찌 알았으랴, 상도, 대도의 백성들은 주왕이 정말로 돌아온다는 말을 듣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춤을 추었다. 그리고 일부 왕과 옛신하들도 앞다투어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화세랄를 모시고 돌아온 것은 차카타이칸국의 연지태길이다. 이것들은 충분히 화세랄이 원무종의 장남으로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을 드러내준다. 확실히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이렇게 되자, 원문중과 연첩목아가 의외라고 여기게 된다.


옛날에 원인종, 원무종간에 형제간의 두터운 정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원명종과 원문종은 동모소생이 아니다. 원명종의 모친은 역걸열씨(亦乞烈氏)이다. 원문종의 모친은 당올씨(唐兀氏)이다. 이것만 보아도 분명하다. 원문종의 황위승계할 때 한 말은 그저 어쩔 수 없어서 한 가식이라는 것을 사신을 보내어 형을 영접하겠다고 한 것도 그저 가식일 뿐이라는 것을. 이미 망명한지 십이년이 지난 화세랄이 정말 황제위에 관심을 두고 있을지는 몰랐다. 이는 예상밖이었다. 더더구나 도첩목이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화세랄이 대도로 돌아오지 않고, 막북의 옛수도인 화림(和林)에서 즉위를 선포한 것이다. 그리하여 원나라의 새로운 황제가 된다. 원세조 쿠빌라이이후, 원나라의 수도는 대도 아니면 상도이다. 화림은 몽골칸국시절의 도성이다. 기본적으로 수도의 지위는 잃어버린지 오래이다. 그러나 전체 몽골에 있어서, 여전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화세랄은 천력2년(1329년 2월) 화림에서 등극한다. 자연히 이는 미묘한 신호이다. 그의 이어진 몇 가지 조치는 원문종 도첩목이로 하여금 아주 예민하게 만든다.


그는 사신을 대도에 있는 원문종에게 파견한다: "동생은 정무를 보는 틈에 유가사대부를 가까이 해야 하고, 고금의 치란득실을 배워서 시간을 헛되이 버리지 말아야 한다" 말한 사람은 아마도 아무 생각이 없을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싫다. 도첩목이는 이런 가르치는 투의 말투에 아주 불편했다. 당연히 마음은 불편해도 해야할 일은 해야 했다. 도첩목이는 연첩목아등에게 인마를 이끌고 원명종에게 황제의 옥새를 보내어 황제위를 양위하겠다는 마음을 보인다. 원명종은 마음을 완전히 놓았다. 그리하여 연첩목아에게 태사로 직위를 올려주고 사람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말하라. 무릇 경사의 짐의 동생이 임명한 모든 관리는 짐도 여전히 쓸 것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연첩목아는 거꾸로 원명종을 찔러본다. "폐하는 만반에 군림하시니, 국가대사를 처리하는 것은 중서성, 추밀원, 어사대입니다. 마땅히 사람을 뽑아서 앉혀야할 것입니다." 원명종은 득의망형(得意忘形)했다. 금방 내뱉은 원문종이 임명한 백관을 그대로 쓰겠다는 말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즉시 조서를 내려 부친 원무종의 옛신하와 그를 여러해동안 따른 패라등을 각각 중서성, 추밀원과 어사대의 관직에 임명한다. 연첩목아는 처음에 원무종의 후손을 황제로 앉히려는 진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원명종이 정말 그를 신뢰하고 존중해준다면, 그는 다시 사건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화세랄이라는 원무종의 적장자는 연첩목아가족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그는 원명종이 대거 자신의 사람을 심는 것을 보고, 완전히 그와 도첩목이가 중원에 건립한 질서를 파괴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원명종의 신변에 있는 자들은 자신을 극력 배척했다. 일찌기 연회에서도 불손한 말을 내뱉었다. 연첩목아는 그 자리에서는 당연히 따지지 않았지만, 기실 이미 마음 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자신은 화세랄과 합작할 수 없다. 그에게서 진정한 존중을 받을 수는 없다.


그후 원명종은 다시 일련의 조서를 내려 관리들을 대거 임명한다. 중앙으로부터 행성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조리 새 사람으로 바꿔친다. 심한 것은 "잠저의 구신과 호종하던 사람중 명을 받은 자가 85명이고, 6품이하도 26명이나 되었다." 확실하게 자신의 사람을 쓰겠다는 것을 드러낸다. 당연히 도첩목이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그는 대도에 '황태자보(皇太子寶)'를 다시 주조하라고 명한다. 기실 '황태제보(皇太弟寶)'이다. 이전에 원무종이 주조한 '황태자보'를 돌연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중서성의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무릇 국가의 전곡(錢穀), 여러 큰 정사들은 먼저 황태자(황태제)에게 고한 후에 다시 나에게 얘기하라" 도첩목이도 이제 더 이상 태만히 할 수 없었다. 연첩목아의 조언에 따라 대도에서 출발하여 북행하여 형인 원명종을 영접하러 나선다. 팔월 사일, 원문종과 원명종 형제 둘은 상도 부근의 왕홀찰부(旺忽察部, 지금의 하북성 장북현 북쪽)에서 만난다. 다시 만나서 즐거운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4일후, 원명종이 돌연 사망한다. 나이 겨우 서른이었다. 1달후, 원문종 도첩목이다 상도에서 다시 황제위로 복위한다.


원명종 화세랄의 죽음은 확실히 연첩목아가 주모자이다. 그러나 원문종 도첩목이와 공모했을 가능성도 크다. <원사.명종기>에는 화세랄이 "폭졸(暴卒)'했다고 적었다. 역사가들을 추측등을 통해 대다수가 화세랄은 독살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연첩목이가 모살자라고 말한다. 다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연사라고 본다. 1340년, 원명종의 아들 타환첩목이(원혜종, 즉 원순제, 1333-1370)는 도첩목이가 그의 부친을 해쳤다고 질책했고, 보복을 위하여 도첩목이의 패위를 태묘에서 철거하도록 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우리는 다시 화세랄의 일생이 얼마나 불행했는지 알 수 있다. 원래는 원무종의 적장자로서 몽골의 조야에서 모두 아주 높은 신분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고, 게다가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고진감래했으며 이지 용상에 앉았으며, 조정의 국면을 일신하려는 기상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왜 그의 운은 거기에 그치고 말았을까? 확실해 개인적인 원인과 시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관건이다.


화세랄은 그의 부친 원무종과 상황이 전혀 달랐다. 그들은 도성관리의 지지와 군사력의 측면에서 모두 차이가 있다. 일찌기 막북초원 여러 군대의 최고총사령관이던 해산은 원나라 통치계층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궁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위계승위기가 발발하자, 합랄합손(哈剌哈孫)을 위시한 경성의 관리들은 모두 해산이 적합한 황위계승자라고 생각한다. 비록 애육려발렬팔달이 먼저 궁정을 장악했지만, 그저 섭정을 했을 뿐이고, 감히 자신이 즉위하지는 못한다. 반대로 화세랄은 멀리 서역으로 축춮되어 12년간 정치적으로 유배당했었다. '남파지변(南坡之變)'이 발생했을 때, 도첩목이와 연철목아는 이미 중원에 그들의 통치를 건립했고, 화세랄은 실제로 완전히 국외인이었다. 중원으로 돌아오더라도 진정한 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새로운 투쟁만 촉발시킬 뿐이다. 그외에 해산은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즉위때 3만군대를 데려온다. 그러나 화세랄이 중원으로 데려온 것은 겨우 1800명의 위사였다. 실력에서 그의 동생 도첩목이를 누를 수 없었다. 화세랄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했고, 자신이 처한 곤경을 과소평가했다. 그리하여 기나긴 12년의 서역유배생활로 그는 막북과 중원의 정치군사적 지지를 잃었고, 설사 그가 황제위에 앉는다고 하더라도 그저 일시적인 것이 될 수 있을 뿐이었다. 만일 그가 국면을 제대로 보고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인식했더라면, 당초 마음을 굳혀 서역에서 계속 말이나 기르고 있어야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일생이 편안하지 않았을까? 그는 비참하게 독살당하지않았을 것이다. 그의 아들 의린질반도 아마 그렇게 단명하지 않았을 지 모른다. 또 다른 아들 타환첩목아도 30여연후에 대원의 강산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의 손자는 막북으로 망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