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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원)

원나라말기 소금장수 장사성(張士誠)은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by 중은우시 2018. 1. 10.

글: 독력견문(讀歷見聞)


매번 어느 왕조가 말기에 이르면, 반드시 재정위기가 오고 재정붕괴가 온다. 원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원나라말기에 정부는 재정곤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식염(食鹽)가격을 인상한다. 소금가격은 1276년에서 1315년까지 16배나 올랐다. 소금인상으로 인한 거액의 수입은 원나라정부 경비의 80%를 차지한다. 그러나 민간의 백성들은 "바닷가에서도 싱겁게 먹고, 심산유곡에서는 소금이 뭔지 모른다"는 상황이 된다.


원나라정부의 식염재정하에, 소금장수를 했던 장사성은 한몫을 챙기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먹고사는데는 지장이 없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상황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비참했다. 원나라말기 장사성이 있던 양회(兩淮)지구는 토지가 관료지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일반백성들은 생활이 빈곤했고, 해일이 덥쳐서 가뭄과 홍수가 이어졌다. 게다가 메뚜기떼의 공격과 전염병까지 돌았다. 그 시대는 하층백성들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갈수록 소금가격을 올린 것은 바로 원나라통치자들에게 다른 세원이 없는 상황하에서 부득이 재정을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소금재정의 밑바닥인 염정(鹽丁)들의 비참한 생활은 <민염정(憫鹽丁)>이라는 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염고(煎鹽苦), 전염고(煎鹽苦). 빈해풍상항불우(濱海風霜恒弗雨), 적로망망초진고(赤鹵茫茫草盡枯), 조저무시공적로(竈底無柴空積鹵), 차대무계생계소(借貸無計生計疏), 십가촌락도망오(十家村落逃亡五). 쇄염고(曬鹽苦), 쇄염고(曬鹽苦), 수창조번탄몰고(水漲潮翻灘沒股), 설화점산불성주(雪花點散不成珠), 지면평포진니토(地面平鋪盡泥土), 상집지패리고문(商執支牌吏敲門), 사부공수경하보(私負公輸竟何補), 아녀오열야불음(兒女嗚咽夜不飮), 옹구초췌의남루(翁嫗憔悴衣襤褸), 고래수한상삼농(古來水旱傷三農), 수지염농동차초(誰知鹽農同此楚)"


천재에 인재까지 그리고 상인과 관리의 착취까지, 염정들은 식염과 마찬가지로, 원나라정부의 입안에 있는 떡이었다. 그저 먹히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라도 더 살면 그것만으로 봉건관리들의 자비로운 마음씨에 감사해야할 정도였다. 만일 돈을 벌겠다는 헛된 망상을 품는다면, 몇번을 다시 태어난다고 하도 염정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장사성은 당시 태주(泰州) 흥화(興化) 백구장(白駒場)의 정호(亭戶)였다. "정호"라는 것은 바로 양사성이 호구있는 염민(鹽民)이라는 뜻이다. 원나라때는 소금을 만드는 곳을 정장이라고 불렀고, 염민호는 정호라고 불렀다. 1323년 장사성은 가난한 염민의 집안에서 태어난다. 그가 성년이 된 후에 동생 장사신(張士信)을 데리고 "배를 몰아 소금을 운반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그 기회에 사염(私鹽)을 팔아서 생계에 보태곤 했다.


당시 소금가격이 비교적 비쌌지만, 시장은 아주 작았다. 왜냐하면 소금과 같이 값비싼 생활필수품은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이미 사치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보통백성이 음식에 소금을 뿌린다면 그 자체만으로 부를 과시하는 것이다. 장사성과 같은 소금장수가 염운사로 가서 비싼 값에 파는 염인(鹽引)을 사려면 차입으로 돈을 마련해야 했다. 그들은 "봄에 빌려서 가을에 갚는데, 소금판 돈으로 이자를 갚기 어려워서 매년 고생은 하면서 먹고살만하지는 못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더 높은 가격으로 식염을 팔아야만 했다. 그래서 팔 수 있는 대상은 그저 부호나 고관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부호나 고관들이 소금을 사면서 빈민인 장사성에게 우호적으로 결제를 해주었을까? 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장사성은 그의 형제들을 데리고 식음을 매고 부호의 집까지 배달하지만 물건을 주면서 바로 돈을 받는 경우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낡은 옷을 입고 힘들게 소금을 매고 집까지 배달해주면, 상대방은 물건은 받으면서 고맙다는 인사도 없었다. 그리고 한바탕 모욕하고 무시한 후에 비로소 대금을 지급한다. 심지어 물건은 다 받고 욕도 다하고나서 그래도 돈을 주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외에 각급 관리의 괴롭힘과 뜯어가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한다면 고리대금업자의 빚에 눌려 죽거나, 굶어 죽는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1353년, 장사성은 장사의, 장사덕, 장사신, 이백승등 18명명을 데리고, 염정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태주를 공격하고, 고우를 점령하여 상당한 강산을 차지한다. 역사에서 "십팔조편담기의(十八條扁擔起義)"라고 부르는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