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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왕망)

왕망(王莽)은 어떻게 죽었는가?

by 중은우시 2018. 12. 13.

글: 정호청천(鼎湖聽泉)


사료기재에 따르면, 왕망은 일찌기 당시 각계층 특히 지식인과 빈민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어 많은 사람들의 추대를 받고, 심지어 그가 한애제(漢哀帝)에 의하여 '설장(雪藏)'되었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그가 다시 복귀하도록 시위를 했다. 그러나 당시 그에 반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특히 고집센 명신들과 그에게 배제된 유씨종실자제들이었다. 예를 들어 신도상(新都相) 공휴(孔休)는 그가 내린 국사(國師)의 자리를 받지 않았고, 대사공(大司空) 팽선(彭宣), 왕숭(王崇) 및 광록대부(光祿大夫) 공승(龔勝), 태중대부(太中大夫) 병한(邴漢)등은 모두 사직의 의사를 가졌다.


이에 비추어보면, 왕망은 극력 자신의 심복을 심는 외에 친히 395명을 새로 뽑아 관직을 내린다. 이렇게 유한(劉漢) 세력을 대거 탄압하고, 유씨종실의 제후왕 32명을 폐출시킨다. 후는 더더욱 181명에 달한다. 타격면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유씨 종실은 그 후에 깨닫는다. 왕망에게는 찬탈의 뜻이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더더욱 왕망의 반대편에 선다. 거병하여 왕망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필연적이다.


바로 이때, 안중후(安衆侯) 유숭(劉崇)과 동군태수(東郡太守) 적의(翟義)가 반란을 일으킨다. 그 영향은 아주 컸다. 비록 왕망에 의해 진압되기는 하였지만, 반망(反莽)운동은 계속 이어진다.


거섭3년(기원후8년) 구월, 기문랑(期門郞) 장충(張充)등 6명이 왕망을 납차살해하고 초왕(楚王)을 옹립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발각되어 주살당한다. 설사 왕망의 찬위가 성공한 후에도 반망의 활동은 그치지 않았다. 시건국원년(기원후9년) 사월, 서향후(徐鄕侯) 유쾨(劉快)는 수천명을 모아서 거병한다. 진정(眞定)사람 유도(劉都)도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키나 모두 진압당한다. 이들 반망의거는 나중의 녹림군(綠林軍), 적미군(赤眉軍)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규모도 상대가 되지 않고 또한 금방 진압된다. 그러나, 그 성성지화(星星之火)는 요원(燎原)할 수 있었다. 유수등 남양의 호족들의 반망웅심을 불러일으켰을 뿐아니라, 하층보통백성들의 반항활동이 상태화하도록 만들었다. 이쪽을 진압하면 저쪽이 일어나고, 계속 끊이지 않는 형국이었다. 이는 신조의 통치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


어떤 역사연구자의 주장에 따르면, 만일 왕망이 신조를 건립한 때로부터 죽기까지 15년간, 그렇게 극단적으로 연출을 하고, 큰 일을 벌이지 않고, 천하를 잘 다스려 백성들이 질곡에 관심을 가졌다면 일찌기 군중기초가 튼튼했던 그는(그게 속여서 얻은 것이든 아니든), 좋은 군왕이 될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모든 사람이 욕하는 '대간신'이자, 단명왕조(15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간이다)의 '유성(流星)'이 되어 후세의 욕을 얻어먹는 것이 아니라.


왕망에게는 서한때부터 누적되어 온 너무나 많은 원죄가 있었다. 신조에서 '차시환혼(借屍還魂)'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바램이었을 것이다. 특히 서한말기의 심각한 토지겸병과 유민문제로 사회경제와 사회갈등은 다시 되돌리기 힘들 정도였고, 날로 심각해져서 해결이 되지 않았다. 왕망은 개혁하지 않으면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고, 개혁하면 죽으러 가는 것이다라는 역사의 저주에 빠져버렸다. 왕망은 그저 옛날로 돌아가는 식의 개혁만 했다. 그리하여 '현실과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각종 문제점이 드러나고 신조의 멸망은 가속화된다.


사료를 보면, 왕망의 개혁은 서한말기이래로 누적되어 온 토지겸병과 유민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백성들이 편안하게 쉬면서 인구를 번성하도록 해주지도 못했다. 그와 반대로 그는 기분내키는대로 잘못된 민족정책을 집행한다. 심지어 군대를 일으켜 흉노와 주변소수민족을 정벌한다. 더더욱 국내경제에 부담은 설상가상이 되어 백성의 세금부담 요역부담은 증가한다. 그리하고 믾은 사상자를 낸다. 그리하여 병사들은 굶주리고 역병이 돌며, 토지는 황폐해지고, 물가능 오르는 국면이 벌어진다. 천재와 인재가 겹치면서 백성들은 고향을 등지고 이리저지 떠돌며, 심지어 "인상식(人相食)"의 참상까지 벌어진다. 이때 국고는 왕망이 다 써버려서 비어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은혜를 베푸는 장면을 연출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아예 사람을 관중의 굶주린 백성들에게 보내어 '나무를 끓여서 먹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먹을 것이 없으니, 반란을 일으켜도 죽고 일으키지 않아도 죽게 된 것이다. 그러니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결론적으로, 최초에 개혁은 격렬했지마 효과는 적었고, 게다가 중후기에는 왕망이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정치감시통제를 강화하다보니 더욱 민원이 비등해지게 되고, 결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시건국3년(기원후11년), 각지백성들은 신왕조의 빈번한 요역으로 연이어 도망쳐서 도적이 된 것을 시작으로, 그후 거의 매년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천봉2년(기원후15년), 오원, 대군의 수천명이 반란을 일으킨다; 천봉4년(기원후17년), 천하는 더욱 혼란에 빠졌고,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과전의(瓜田儀)는 회계 장주(지금의 강소성 소주)에서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수년간 지속된다; 같은 해 낭야 해곡(지금의 산동성 일조)에서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여자농민반란지도자 여모(呂母)가 나선다. 아들의 복수를 위해 반란을 일으켰던 그녀는 현재(縣宰)를 죽이고, 세력이 순식간에 수만명으로 늘어난다; 천봉5년(기원후18년), 동해사람 역자도(力子都)가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며 인원이 수만에 이른다.


이때 남방에서도 반란이 일어난다. 남방의 반란군은 인원수가 서로 달랐다. 적으면 수천, 많으면 수만, 수십만에 이른다. 북방에서도 수십 개의 반란군이 일어난다. 그중 비교적 유명한 것은 동마부(銅馬部), 청독부(靑犢部), 성두자로부(城頭子路部)등이다. 심지어 통치중심인 수도부근의 '삼보(三輔)'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난다. 소규모의 반란은 그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어, 왕망을 초조하게 만든다. 이런 국면을 통제하기 위하여 지황2년(기원후21년), 왕망은 부득이 포도도위관(捕盜都尉官)을 설치하여 장안의 치안을 다스리게 한다.


당시 두 갈래의 반란군이 가장 규모가 커서, 반망세력의 주류를 이룬다. 즉 남방의 녹림군과 북방의 적미군이다. 최종적으로, 왕망정권은 녹림군의 손에 멸망한다.


지황4년(기원후23년) 팔월, 기운을 잃은 왕망은 장안의 남교(南郊)에서 곡천대전(哭天大典)을 거행한다. 아마도 하늘에게 자신이 황위를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비는 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는 뛰어난 연기력을 보였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같은 해 십월, 곤양(昆陽) 전투에서 주력군이 무너진 후 녹림군이 장안으로 진입하였고, 왕망은 왕읍(王揖)등 가까운 신하들의 호위하에 황급히 점대(漸臺)로 도망쳐야 했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이때 천여명이 그를 따랐다고 한다. 곤양전투에서 패퇴한 후, 장안으로 물러나 성을 지키던 왕망의 장수 왕읍(王邑)은 반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점대로 패퇴해야 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겠다고 느낀 죽기겁났던 왕읍의 아들인 시중 왕목(王睦)은 도망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의리가 있던 왕읍이 아들을 제지한다. 그리하여 이들 부자는 왕망과 함게 죽는다. 마지막까지 왕망을 따랐던 천여명도 전사하거나 피살된다.


왕망의 죽음은 약간은 극적이다. 당시 혼란과정에서 왕망을 죽인 상인 두오(杜吳)는 자기가 왕망을 죽인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교위(校尉) 공빈(公賓)이 두오에게 상황을 물어본 후에 비로소 왕망의 시신이 '방안 서북쪽 모퉁이'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공명심에 공빈은 왕망의 수급을 베어 완시(宛市, 당시 녹림군 경시정권의 임시도성)의 성에 걸어둔다. 그리고 왕망의 시신은 병사들에게 8조각으로 잘린다.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 원한이 풀리지 않았던지, 백성들은 왕망의 수급을 '때리고 혀를 잘라서 먹었다'


그리고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왕망의 머리는 아주 값어치가 있었다. 그의 '사인두(死人頭)'는 나중에 역대황실에서 진귀한 역사문물로 보관해왔다. 295년 진혜제 사마충때에 이르러, 낙양의 무고에 불이 나면서 불에 타 없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