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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왕망)

왕망(王莽)의 화폐개혁

by 중은우시 2018. 11. 28.

글: 서준기(徐俊琦)


"육천십포(六泉十布)"는 왕망의 신나라에서 발행한 화폐중 주요한 16가지를 가리킨다. 왕망은 5차에 걸쳐 화폐제도를 개혁하는데, 이로 인하여, "농상업이 실업되고, 무역이 모두 폐지되어" 경제에 심각한 혼란을 가져다 준다. 그리하여 정권의 멸망을 가속화시켰다. 다만 그는 중국화폐주조의 최고봉을 열었다. 그가 주조한 화폐는 종류가 다양하고, 형태가 정교하고, 글자도 아름다워서 실로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역사는 모두 후세인들이 쓰는 것이다. 후왕조가 전왕조를 쓴다. 개명한 군주를 만나면, 조금 좋게 적어주지만, 가끔 속좁은 군주를 만나면, 어떻게 쓰게될 지는 알 수가 없다. 새로 정권을 장악한 유씨에 있어서, 왕망을 영웅으로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황위를 찬탈한 것은 사실이니까. 아무리 가볍게 쓰고 지나간다고 하더라도, 유가의 정통관념으로 보자면 그는 '난신적자'이다. 당대의 역사교과서에서 당연히 왕망은 음모가나 야심가로 쓰여질 수밖에 없었다. 개혁을 하려는 것은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다. 곽말약이 주재하여 편찬한 <중국사고>에 그렇게 쓰여 있다.


왕망의 정치적 배경은 좋은 편이다. 고모인 왕정군은 황후, 황태후, 태황태후가 된다. 숙백도 한나라의 정치중심에 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몰락하여 왕씨일족이 혁혁할 때도 그의 일문은 조용했다. 다만 왕씨자제들 중에서 제대로 된 인재를 배출하지 못할 때, 이 한문에서 뛰어난 영재를 배출한다. 왕망은 어려서부터 아주 뛰어난 활약을 보인다. 총명하고 박학다식하며 겸손했다. 그리고 대사마인 숙부 왕봉(王鳳)에 아주 효성스러웠다. 왕봉이 죽기 전에, 한성제에게 이 조카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왕망은 황문랑이 된다. 그후에 고모인 왕정군의 곁을 떠나지 않음녀서, 고모의 도움으로 평보청운하여 일약 대사마에 올라 점점 한나라조정을 장악한다. '주공공구유언일(周公恐懼流言日), 왕망겸공미찬시(王莽謙恭未簒時)" 대다수의 사람들은 과정을 신경쓰지 않고 결과만 본다. 주공은 이름을 청사에 남겼다. 원인은 그가 보정을 하고 스스로 왕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공이 한 모든 행위는 모범이 된다. 왕망이 대사마의 자리에서 죽었더라면, 아마도 역사는 다르게 쓰였을 것이다. 아쉽게도 왕망은 황제를 칭했고, 그가 이전에 한 모든 것은 쇼가 되고, 음모가 된다.


왕망이 관직에 나가기 전에 명성은 아주 좋았다. 관직에 나가고서는 더욱 남달랐다. 극기봉공하는 외에, 급여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고 후기에는 요직에 있을 때, 비록 봉지도 많고, 봉록도 높았지만, 여전히 집안에서는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할 정도였다. 재해를 만나면 고기를 먹지 않았다. 대사마가 되었을 때, 한번은 모친이 병들었는데, 당시의 예절에 따르면, 나머지 대신들이 부인을 보내어 위문해야 했다. 이들 부인들이 왕부로 왔을 때, 낡고 거친 베옷을 입고 있는 노비같은 여자가 문앞에서 영접하는 것을 본다. 그녀들은 분노한다. 왕망이 사람을 너무 무시한다고 여긴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조정중신의 부인들인데, 이렇게 우리를 대우하다니. 그러나 그녀들이 이 '하인'이 바로 왕망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고난 후에는 거의 놀라자빠질 뻔한다. 그 자리에서 그 '하인'을 질책하지 않았던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한평제 원시2년에 가뭄과 메뚜기떼의 재해를 만난다. 왕망은 앞장서서 100만전과 땅 30경을 내놓는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귀족들도 땅과 돈, 그리고 양식을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게 이재민을 구제했다. 동시에 황실의 호지원(呼池園)도 없애고 안민현(安民縣)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게 해준다. 가난한 사람들이 금방 옮겨가서 생활도구가 없으니, 정부에서 공급해준다. 장안성에는 수백채의 집을 지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살 수 있게 해준다. 이건 현재의 저가임대추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왕망은 교육을 아주 중시했다. 도처에 학교를 짓고, 학생을 모집한다. 경성에는 1만채의 집을 지어서, 학생들이 쓸 수 있게 해준다. 당시, 왕망의 일련의 애민정책은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선비들을 예의로 대했으며, 검소하고 청렴하게 살았다. 그런 것들이 전해지면서 전체 백성들 마음 속에 그는 좋은 지도자로 이미지를 쌓는다.


서한때 노예현상이 아주 심각했다.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치노비지사시(置奴婢之事市), 여우마동란(與牛馬同欄)" 즉 그때 노비를 마음대로 매매했는데, 가축과 노예를 하나의 우리에 가두어 매매했다는 것이다. 주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노예는 마음대로 죽였다. 왕망은 당시에 명을 내려 노비매매를 금지시킨다. 노비를 '사속(私屬)'으로 고칠 것을 요구한다. 현재 글자대로의 의미를 읽으면 '사인가족'으로 보인다. 그 실질은 노예로 하여금 주인의 집에서 가족구성원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노비를 진정한 사람으로 여기게 한 것이다. 노예해방의 일을 보면 어떤 사람은 왕망이 민심을 얻기 위하여 한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쇼라고 하더라도 역시 인류역사상 큰 진보라고 말한다. 이전에 그렇게 많은 '정인군자'들도 못해낸 일이다. 왕망이 보정할 때, 그의 아들 왕획(王獲)이 가노를 한 명 죽였다. 왕망은 그 사실을 알고 아들에게 자살하도록 명한다. 이는 당시로서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노예와 동일시하던 가노를 죽이면 죽이는 것인데, 특히 그들과 같이 혁혁한 가문에서 신경쓰지 않아도 그만인 것이다. 기껏해야 돈으로 좀 배상하면 된다. 그러나 왕망은 '대의멸친'한다. 이것에 대하여도 어떤 역사학자들은 쇼라고 본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왕망이 정말 노예현상을 개선하기 위하여, 아들을 죽이면서까지 강경한 태도를 보인 것이 아닐가? 왜냐하면 노예신분을 고치라는 정부명령이 당시에는 노예주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진이 쉽지 않았다. 알아야 할 것은 이 조치의 작용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녹립군이 세운 경시제 유현은 원래 황실귀족인데, 바로 가노를 죽이고나서 겁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도망쳤다가 나중에 녹림군에 들어간다. 당연히, 그의 몇몇 아들, 며느리, 손자도 기본적으로 그의 손에 죽는다. 처는 이로 인하여 울다가 눈이 멀고 마지막에는 우울하게 죽는다. 이것은 여기에서 일일이 언급하지 않겠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그가 앞에서 한 모든 것이 쇼라고 한다면, 자녀를 죽인 것은 그의 냉혹하고 잔혹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일 그가 이전에 한 모든 것이 진실한 생각이었다면, 그것은 그저 이 사람이 양면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한평제가 12살이 되었을 때, 황제에게 황후를 구해주어야 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수천수만의 백성들이 황궁 문앞으로 달려와, 황제에게 반드시 왕망의 딸을 취하라고 요구한다. 왕망의 딸만이 국모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왕망은 황제의 장인이 되고, 황제는 1만경의 토지를 하사하나 왕망은 받지 않는다. 2억의 채례를 보내자 단지 6300만만 받고 4300만은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사용한다. 당시의 대신들은 크게 감동받는다. 그리하여 하사품을 더 내리고, 토지를 더 하사하라고 건의한다. 왕망은 받지 않는다. 그러자 백성들이 상소를 올렸다. 전해지는 바로는 48만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왕방이 받아들일 것을 간청한다. 이 숫자는 현재 보더라도 놀랄 정도이다. 조정의 거의 모든 대신들이 왕망에게 재형(宰衡)을 추가해줄 것을 청한다. 이것은 모든 제후왕공보다 높은 직위이다. 동시에 구석(九錫)을 봉하는데, 이것은 9가지 예품이다. 바로 최고구격의 상사(賞賜)이다. 당시 백성들과 대신들의 생각에, 왕망이라는 이런 우수한 인물이 황제가 되지 못하고, 유씨의 쓰레기같은 자들이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여긴다. 왕망이 황제에 올라야한다는 여론이 날로 커져갔다.


왕망의 찬위과정은 상세히 얘기하지 않겠다. 그가 황제를 칭한 후, 일련의 중대개혁을 실행한다. 가장 주요한 두 가지는 바로 토지국유화와 노예제개혁이다. 서한때, 토지의 겸병은 미친 수준에 이른다. 토지는 기본적으로 왕실귀족과 부호의 손에 들어간다. 농민은 유리걸식한다. <한서>에는 "배고파서 죽고, 죽어도 묻히지 못했으며, 개와 돼지들에게 먹혔고, 사람이 사람을 서로 먹었다." 살아남은 농민은 기본적으로 모두 노예로 전락한다. 왕망이 토지개혁은 바로 토지를 국유로 하고, 그 후에 관련기준에 따라 농민들에게 나눠주어 경작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정한 세금을 납부하게 하며, 토지매매는 허용하지 않는다. 노예제개혁은 바로 노예매매를 허용하지 않고, 노예를 '사속'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가장 민심을 얻은 것처럼 보이나. 근본적으로 실행할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호족들의 저항에 부닥치고, 다른 한편으로 농민들이 토지를 나눠받은 후, 상응한 생산도구가 없어서 경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대지주는 토지를 경작할 고용농이 없어져서 일거에 많은 토지가 황무지로 바뀐다. 이 두가지 제도는 겨우 3년간 시행하다가 폐지된다. 이는 제1차개혁의 실패를 의미한다. 다음으로, '오균육관법(五均六管法)'을 시행한다. '오균'은 바로 물가를 억제하고, 시장에서 어떤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국가가 일정가격으로 매수해주고, 시장에서 어떤 물건이 부족하면, 정부가 일정가격으로 매각한다. 그리고 정부는 대출을 해주어서 백성들이 제사, 장례지내는 돈에는 이자를 받지 않았고, 사업용인 경우에는 10%의 이자를 받았다. 이것은 아마도 최초의 은행시스템일 것이다. '육관'은 6가지 화물의 국가전매이다. 주로 이하 몇 가지 물품이다: 소금, 술, 쇠등을 국가전매로 하는 것이다. 광산자원은 국가소유로 하고, 사적으로 채굴하는 것을 금지한다. 일체의 공상업은 10%의 소득세를 거둔다. 국가는 통일적으로 화폐를 주조하여, 이전에는 봉국과 부호들도 돈을 주조할 수 있었다. 왕망의 개혁은 호적의 말에 따르면, "1900년전의 사회주의"이다. 그래서 개혁 자체로 보면, 왕망은 시대를 뛰어넘은 천재이다. 그의 이런 개혁은 획기적인 의미가 있다.


다시 화폐제도개혁을 얘기해보자. 먼저 황금을 약탈하기 위하여, "대천오십(大泉五十), 계도오백(契刀五百)과 "일도평오천(一刀平五千)"의 3가지 화폐를 발행한다. 민간에서는 황금을 보관하지 못하게 하며, 도폐로 교환하게 한다. 1근의 황금은 10000매의 오수(五銖)이고, '일도평오천'의 액면가치는 바로 '5000매'의 오수이다. 그렇다면 2매의 '일도평오천' 혹은 20매의 '계도오맥'이면 1근의 황금과 바꿀 수 있다. 나중에 왕망이 피살된 후, 궁안에 6,7십만근의 황금이 발견되는데, 이를 보면 그 약탈성을 엿볼 수 있다.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드물게 출토되는 것으로 '국보금궤직만(國寶金匱直萬)' 화폐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일도평오천'과 동시기에 주조된 것으로 본다. 이 몇 가지 화폐는 원래 허치대전(虛値大錢)이다. 직만은 너무 크다. 그래서 사회의 반향이 너무 컸을 것이다. 당시에 아마도 소수를 주조하였고, 주조량도 적었을 것이다. 나중에 갈등이 너무 커지니 더 이상 주조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새로 발행한 화폐의 액면가치가 너무 크고, 약탈성이 너무 강해서, 백성들은 근본적으로 쓰려 하지 않았다. 오수를 금지하지 않았으므로, 모두 계속하여 오수를 쓴다. 왕망은 이 문제를 보고난 후에, 신왕조 둘째 해에 다시 "소천직일(小泉直一)'을 발행한다. 그리고 도폐(刀幣)와 오수의 사용을 금지한다. 단지 '소천직일'과 '대천오십'의 두 가지 화폐만을 사용하도록 한다. 민간에서는 동(銅)과 탄(炭)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고, 사적으로 주조하는 것을 금한다. 동시에 누구든지 오수를 쓰면 변방으로 유배된다고 규정한다. 원리 이렇게 하면 운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왕망의 머리에는 또 문제가 생긴다.


그는 다시 화폐개혁을 시작한다. 아주 번잡한 화폐를 만들어 낸다. "오물육명이십팔품(五物六名二十八品)"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오물'은 금, 은, 동, 귀(龜), 패(貝)의 5종이다. '육명'은 금, 은, 귀, 패, 천(泉), 포(布)의 6가지 시리즈이다. '이십팔품'은 28종류의 화폐이다. 각각 금화일품, 은화일품, 귀화4품, 패화5품, 천화6품. 포화10품. 천화(泉貨)는 '소천직일' '요천일십(幺泉一十)', '유천이십(幼泉二十)', '중천삼십', '장천사십(壯泉四十)', '대천오십'이다. 포화10품은 10가지 포폐(布幣)인데, 소포일백, 요포이백, 유포삼백, 서포사백, 차포오백, 중포육백, 장포칠백, 제포팔백, 차포구백, 대포황천이다. 이처럼 번잡한 화폐종류에 이렇게 천차만별의 화폐가치를 어떻게 교환하고, 계산하는 것도 힘들게 된다. 그런데 백성들에게 사용하게 했다. 역사에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성들이 혼란스러워해서 화폐가 유통되지 않는다." 당시에 유통시키지를 못하자, 백성들에게 문을 나설 때는 반드시 포폐를 가지고 나가게 하고 대신들도 조회에 나올 때 포폐를 가지고 나오게 한다. 이렇게 황당하고 가소로운 방식으로도 신화폐의 광범위한 유통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이번 화폐개혁은 확실히 기묘하다. 의미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저 왕망의 일관된 복고(復古)와 주례(周禮)를 회복하겠다는 사상이 잘못 이끈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문화에 쓰는 것은 좋으나, 경제에서 쓰게 되면 혼란이 온다. 머리가 잘못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두 가지 이야기를 해준 것이 기억난다. 민국때, 집안에서 겨우 반광주리의 계란을 모아서 가지고 나가 기름과 소금으로 살 돈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계란을 판 돈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돌연 대포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그는 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시 돈이 바뀐 줄 알았다고 한다. 당시에 수시로 돈이 바뀌었고, 현성은 대포를 쏘아 돈이 바뀐 것을 알렸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번은 넷째할아버지가 도박에서 이겨서 마대자루에 돈을 담아왔다. 그러나 다음날 대포소리가 들렸다. 그 돈은 그저 휴지로 쓸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화폐의 발행은 경제와 연결된다, 최소한 신화폐를 발행하면 구화폐와 교환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화폐를 바꾸기만 하고, 구화폐를 신화폐로 바꿔주지 않으면, 이것은 백성에 대한 적나라한 착취이다. 나중에 민원이 너무 커지고, 경제가 붕괴하니 아마도 왕망은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화폐개혁을 진행한다. '화포(貨布)'와 '화천(貨泉)'이라는 두 개의 신화폐를 발행한다.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진한때의 화폐는 수량(銖兩)을 중량단위로 했다. '화천'은 오수이고, 실제로는 오수전 화폐로 돌아간 것이다. 그저 이름을 바꾸었을 뿐이다. 자모상권(子母相權)의 고대제도에 따르면 '화포'는 25수이다. 즉 1매의 '화포'는 5매의 '화천'이다. 이렇게 하니 화폐제도는 원래대로 돌아갔지만, 이미 늦었다. 신왕조는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포천(布泉)'이라는 화폐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화포'와 '화천'과 동시대에 주조된 것으로 보인다. 문자가 기본적으로 일치하며, 명칭은 절충한 느낌이다.


왕망의 일련의 개혁은 규모가 너무 크고, 과정이 너무 급진적이었다. 그리하여 귀족과 부호의 저항을 받는다. 동시에 아무 이유없이 소수민족을 차별하고 위협했다. 원래 소수민족과 평화롭게 상당기간 지내왔는데, 아무런 이유없이 전쟁을 벌인다. 왕망은 국호를 신으로 정한 다음 아마도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 싶었던 것같다. 그는 유씨제후왕을 모조리 공(公)으로 강등시킨다. 그리고 소수민족의 왕은 모조리 후(侯)로 강등시킨다. 국내의 일부 도시의 이름도 바꿔버린다. 어떤 사람은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자신의 동네 이름이 바뀌어 있다. 국내에서 바꾸는 것은 그렇다 치고, 가만히 있는 고구려(高句麗)에 대하여 왜 높을 고자를 쓰느냐고 하구려(下句麗)로 바꿔버린다. 그리하여 한왕조에 귀순했던 소수민족정권들이 모조리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한왕조가 흉노에게 내렸던 "흉노선우새(匈奴單于璽)'는 '흉노선우장(匈奴單于章)'으로 바꾼다. 그리하여 흉노와 직접 전쟁을 벌이게 된다. 양국은 여러해동안 서로 싸우지 않았고 모두 싸울 줄 모른다. 전쟁때 서로 '기호난하(騎虎難下)'가 되어 오랫동안 서로 밀고 밀리는 전쟁을 지속하게 된다. 군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백성들에 대한 세금을 올린다. 왕망은 처음에 모든 백성들이 옹립한 좋은 지도자였지만, 일거에 천하인들이 원수로 여기는 대상이 된다. 그는 운도 좋지 못했다. 재해가 겹쳐서 사방에서 기아로 굶주리는 백성들이 나타난다. 결국은 녹림군이 장안으로 쳐들어오고, 상인에게 피살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왕망의 머리를 백성들이 모두 들어서 때리고 그의 혀를 잘라서 먹었다고 한다.


짧은 16년간의 신나라정권은 대한의 역사장하에서 지나가는 과객과 같이, 그저 하나의 점을 남겼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