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왕망)

왕망(王莽)의 진실: 유일한 민선황제

중은우시 2013. 7. 12. 22:44

글: 나철욱(羅哲郁) 

 

한고조 유방이 성덕명군(聖德明君)이라고 하면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왕망을 야심만만한 찬탈자라고 한다면 필자는 역시 동의할 수 없다. 진실한 역사를 환원시키면, 아마도 당신도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왕망은 반면인물이라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폄다포소(貶多褒少)한 인물이다. 어떤 사학자는 그에게도 적극적인 작용이 있다고 말한다. 그의 개혁의도는 긍정할 수 있다. 다만, 음모와 허위는 시종 그에게 덧씌워진 모자이다. 한나라를 찬탈한 야심가는 뒤집을 수 없는 결론이 되었다.

 

왕망의 고모는 한원제의 황후이고, 한성제의 생모이다. 그의 백부인 왕봉(王鳳)이 대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그의 숙백형제는 대부분 교만하고 사치스럽게 생활했다. 오로지 왕망만이 시종일관 허심하고 소박하며, 겸허하고 검약하며, 예현하사(禮賢下士)하는 생활태도를 보인다. 이십사세때 사성교위로 승진하고, 궁중대신의 인정을 받는다. 그들은 속속 태후와 한성제의 앞에서 그를 추천한다. 많은 명사들도 왕망의 품성과 재능을 칭찬한다.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그를 칭찬한다. 기원전16년, 나이 겨우 30살된 왕망은 한성제에 의하여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진다. 그리고 기도위와 광록대부시중이 되어 황제를 모시고, 조정대사에 참여한다. 이 때의 왕망은 권력이 조야를 뒤흔든다. 그러나 조금도 오만하거나 교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겸허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나타내며, 널리 명사를 사귀고, 집안의 재물은 빈한한 선비들에게 나누어준다.

 

곡양후 왕근은 왕망의 숙부이다. 대사마를 여러해동안 맡았다. 여러번 병을 핑계로 은퇴하고자 한다. 왕망의 사촌형이며, 태후의 외조카인 순우장은 구경의 우두머리이다. 관례에 따라, 그는 대사마의 지위를 승계해야 했따. 순우장은 이전에 한성제를 도와 조비연을 황후로 세우게 해준다. 그리하여 한성제는 순우장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를 정릉후(定陵侯)에 봉한다. 순우장의 권력은 팽창하기 시작한다. 이때 순우장은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계속 각 사람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교만하고 사치한다. 한성제가 폐위시킨 허황후도 순우장에게 재물을 보낸다. 그에게 자신이 좌황후로 다시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부탁한 것이다. 왕망은 이런 일을 알고 난 후, 병문안을 가는 것처럼 왕근을 찾아가서 말한다: "순우장은 당신이 병석에 오랫동안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너무 기뻐하고 있다. 분명히 당신을 대신하여 보정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미 적지 않게 약속을 해고, 그들에게 관직과 작위를 올려주겠다고 했다." 왕근은 화가 잔뜩 나서 말한다. 즉시 태후에게 보고한다. 태후는 한성제를 불러서 순우장의 관직을 박탈하게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망의 또 다른 숙부인 왕립(王立)이 순우장이 아들 왕융(王融)을 통해서 보낸 진귀한 보물을 받는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말을 해준다. 한성제는 이 일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왕립은 자신이 연루될까 두려워 왕융을 자살하게 한다. 한성제는 그가 속인 것이라고 더욱 의심한다. 순우장은 낙양의 감옥에 가두고 심문한다. 마침내 그의 죄행을 모조리 조사해내고 그는 옥중에서 죽는다.

 

이 일을 통하여, 왕망은 대의멸친하여 사촌형의 죄행을 고발하는데 공을 세워 대사마에 승진한다.

 

승진한 후에 왕망은 더욱 정무를 열심히 본다. 극기봉공(克己奉公)하며 현명한 자와 능력있는 자를 기용하고, 생활은 근검절약하며, 선비들을 후하게 대우한다. 모친이 병을 앓을 때, 각 공경대신이 부인을 보내어 병문안을 했는데, 아주 형편없는 옷을 입은 여인이 나와서 맞이했다. 여러 귀부인들은 일하는 사람으로 여겼는데, 나중에 그녀가 바로 왕망의 처라는 것을 알고는 크게 놀란다.

 

왕망의 명성은 중천에 뜬 해와 같이 올라간다. 한성제가 붕어한 후, 한애제가 즉위한다. 한성제는 원래 아들이 없었다. 태자는 조카인 유흔이다. 유흔이 즉위하자, 그의 모친은 외척이 된다. 왕씨집안은 침중한 타격을 받는다. 관련된 관리들도 모두 관직에서 면직된다. 왕망은 신도후국으로 돌아간다. 지금의 하남 당하현 서남이다. 그 곳에서 집의 문을 걸어닫고 손님을 만나지 않는다. 더 이상 외부와 연락하지 않았다. 현지 관리들에 대하여도 아주 공경했고 전혀 전직고관의 자세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둘째 아들 왕획(王獲)이 노비를 한 명 죽였는데, 그의 질책을 받고 자살하도록 명령받는다. 왕망은 대사마에서 파직된 후의 3년동안 왕망을 위하여 상소를 올려 억울하다고 말한 대신들이 백명이 넘었다. 마침내 원수원년, 한애제는 태황태후를 모신다는 명목으로 왕망을 불러들인다. 1년후 한애제는 병사하고, 한애제의 심복 동현(董賢)은 면직된 후 자살한다. 태황태후는 다시 한번 황태후가 되고,  왕망은 다시 대사마에 봉해진다. 그들은 9살된 중산왕을 태자로 삼는다.

 

다시 한번 권력을 잡은 왕망은 빠른 시일내에 자신의 심복으로 관직을 채운다. 즉 기원후1년의 정월, 여러 대신들은 왕망이 "정책안종묘(定策安宗廟)"의 공적으로 상을 받기를 건의한다. 왕망은 말한다. 그는 공광, 왕순, 견풍, 견한의 4명과 공동으로 정책을 만들었으니 이들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고. 그리고 이 4명이 상을 받은 후, 왕망은 여전히 상을 받기를 거절한다. 그래서 태후가 조서를 내린다: 왕망을 태부에 봉하고, 안한공(安漢公)이 된다. 봉읍 이만팔천호를 추가하고, 소상국의 옛집을 안한공의 관저로 삼는다."

 

왕망은 황공해 했다. 비록 칭호를 받아들였지만, 어떻게 해도 증가된 토지와 민호는 받으려 하지 않았다. 여러번 사양한 끝에, 결국 조정은 천하에 혜택을 내린다. 그리하여 모든 백성이 왕망의 은혜를 입는다. 이리하여 전국에서 왕망에 대하여 찬부절구(贊不絶口)한다.

 

이해의 연말, 한평제가 붕어한다. 바로 이 때, 무공현령 맹통은 우물에서 돌을 하나 파낸다. 붉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고안한공망위황제(告安漢公莽爲皇帝)". 대신들은 이것을 천조(天詔)라고 여겨, 왕망에게 "섭황제(攝皇帝)" 즉, "섭행황제지사(攝行皇帝之事)"를 하고, 황태자 유영은 '유자(孺子)'로 삼는다.

 

이 때의 왕망은 황제가 되려는 의도가 명백히 드러났다. 그는 점점 자신이 황제가 되는데 걸리적거리는 각종 장애를 제거한다. 이때 각종요소도 왕망을 도와주었다. 그가 등극하기전 수십년간, 여름에 서리가 내리고, 겨울에 천둥번개가 치고, 지진이 빈발하며,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고, 일식월식이 나타난다. 하늘이 노했다고 생각하여 백성들의 인심이 흉흉해진다. 돌맹이가 발견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이 상서를 내린 것으로 생각한다. 마침 왕망이 올라간 후, 재난이 크게 감소하여, 사람들은 왕망이 바로 하늘이 내린 인재라고 여기게 된다.

 

왕망이 섭황제가 된 후, 한 하급관리 치박현 창흥정장이 조정에 상소를 올려 말한다: "꿈에 천공(天公)이 나에게 말하기를: 섭황제가 진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말하기를 진짜라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정안에 새로운 우물이 하나 나타났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 결과 다음 날, 정장은 평지에 깊은 우물이 하나 나타난 것을 보게 된다. 동시에, 전국각지에서 앞다투어 '천명'을 담은 물건을 보내온다. 내용은 모두 왕망이 하늘의 뜻에 따라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앞에 두고, 왕망은 그저 사양했다. 그가 사양할수록, 신민들은 더욱 절박하게 그가 등극하기를 바랐다. 그가 사심이 없을수록, 신민은 미친듯이 그가 즉위하도록 밀어부쳤다.

 

마침내 8년 11월, 즉 왕망이 '섭황제'가 된지 만3년이 되는 해에, 누군가 조정에 왕망의 즉위를 재촉하는 신적(神跡)을 진헌한다. 왕망은 마침내 즉위하여 진짜황제가 된다.

 

이때부터 국호를 "신(新)"으로 바꾼다. 왕망은 동시에 유영의 황태자 명호를 폐지하고, 그를 정안공(定安公)에 봉한다. 그리고 정안공에게 방원백리의 땅을 하사한다. 그리고 한나라의 종사를 그 곳에 설치한다. 이때부터 서한214년의 역사는 끝이 난다.

 

지금 보자면, 왕망이 그 시대에 민주적 선거에 의하여 탄생된 황제라고 말하더라도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다. 왕망이 황제가 되는 것은 당시의 저명한 학자 양웅(揚雄)이 <극진미신(劇秦美新)>이라는 글에서 왕망은 "배오제(配五帝), 관삼왕(冠三王)", "봉약천명(奉若天命)"이라고 하여 왕망의 공덕이 무량함을 찬양했다.

 

당연히 어떤 연구학자들은 그들 '신적'이 왕망이 황위에 등극하기 위하여 스스로 만들어낸 추악한 자작극이라고 본다. 이것은 그저 왕망의 찬탈하려는 야심을 보여주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다만, 각종 실제상황을 종합해보면, 당시의 그런 환경하에서, 이것은 아마도 신민들이 자발적으로 한 행위일 것이다. 왜냐하면 왕망은 이전에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은혜를 베풀었다. 이들 행위에 백성들의 진실한 바램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왕망이 즉위하기 전에 삼십여년간 한 행위가 신민들의 옹호와 사랑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왕망이 황가의 호지원(呼池苑)을 폐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이 곳으로 옮겨서 거주하게 해주었다. 이주하는데 필요한 식사와 밭을 만드는데 필요한 기구 및 가축과 작물은 모두 현재관청에서 공급해주었다. 그는 경성에 싼값에 공급해주는 주택을 지어 빈민들이 거주하게 해준다. 그는 태학의 학생을 늘이고, 학교를 건설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교육받게 해준다. <한서.왕망전>에서는 왕망이 장안성에 적지 않은 연구소를 건립하여, 고전문헌서적을 연구하는데 공헌이 있는 사람을 모조리 이 곳에 소집하여 학문연구를 하도록 해주었다. 이외에, 그는 이데올로기건설에도 주력하여, <주례>의 각종 예의제도를 학습하고, 등급에 따라 복장, 주택, 혼상의 양식을 만든다. 그리고 아동과 노인에게 형별을 가하지 못하도록 규정한다. 부녀는 중죄가 아니면 체포하지 않도록 한다. 매번 천재를 만나면, 왕망은 앞장서서 고기를 먹지 않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여러가지 사실을 보면, 왕망은 기실 역사의 요구에 순응하여 정권을 장악했고, 개혁방안을 제정한 것이다. 전체 세계를 살펴보면, 종교의 창시자는 대부분 넓은 흉금과 위대한 인격을 지녔다. 그들을 신앙하는 사람들은 왕왕 우상의 몸에서 나오는 광환을 볼 뿐 그들의 몸에서의 결점은 보지 않는다. 다만, 서한시기 외척이 정권을 농단하는 어지러운 상황하에서, 이렇게 민의에 순응하고,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왕망은 최종적으로 철저히 실패하고, 참혹하게 죽는다. 심지어 혓바닥마저 사람들이 잘라내서 먹는다. 그러나 그가 최후로 몰렸을 때도, 여전히 수천의 사람들이 그와 동귀어진하기를 바랬다. 이것이 아마도 그에게 약간의 안위를 주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