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채동번
왕망은 한평제(漢平帝)를 독살하고, 그의 어린 아들 영(嬰)을 폐했다. 그리고는 한나라의 강산을 차지하고 스스로 국호를 신(新)으로 고쳤으며, 연호를 시건국원년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부득불 전한과 작별하고 후한시대로 돌입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왕망이 찬위한 후에 영을 정안공(定安公)으로 봉하고, 그를 정안공부(定安公府)에 연금시키고, 아무도 그와 말을 나누지 못하게 하였다. 그저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을 보내줄 뿐이었다.
이때, 재동(梓潼) 사람인 애장(哀章)은 소위 "천서(天書)"를 왕망에게 바친다. 그런데, 왕망은 이 천서에 열거된 순서에 따라 공신들을 임명하게 된다.
왕순(王舜)을 태사안신공(太師安新公)에 봉하고, 평안(平晏)을 태부취신공(太傅就新公), 유흠(劉歆)을 국사가신공(國師嘉新公), 애장을 국장미신공(國將美新公)에 봉하니 이들을 사보신(四輔臣)이라 불렀다.
그리고 견감(甄邯)을 대사마승신공(大司馬承新公), 왕심(王尋)을 대사도장신공(大司徒章新公), 왕읍(王邑)을 대사공융신공(大司空隆新公)에 임명하니 이들을 삼공(三公)이라 불렀다.
또한 견풍(甄豊)을 경시장군(更始將軍), 손건(孫建)을 입국장군(立國將軍), 왕흥(王興)을 위장군(衛將軍), 왕성(王盛)을 전장군(前將軍)으로 봉하니 이들을 사장군(四將軍)이라 불렀다.
애장은 졸지에 고위직에 오르게 되었으니, 너무나 기뻤고, 왕망에게 삼궤구고의 예를 드려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왕순, 평안, 유흠, 견감, 왕심, 왕읍, 견풍, 손건등 8명이야 원래 왕망의 심복이었으니 괜찮은데, 왕흥, 왕성의 두 사람은 애장이 마음대로 이름을 날조해서 집어넣은 경우였다. 그러니,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애장은 그렇다고 솔직히 털어놓을 수도 없었으며, 그저 혼자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알았으랴. 왕망은 이를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사람을 사방에 보내서 조사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두 사람과 성명이 같은 사람들은 장군에 오를 수 있었다. 일이 교묘하게 되느라고 성문영사(城門令史)중에 왕흥이라는 자가 있었고, 호떡을 파는 장사꾼중에 왕성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바로 불려와서 조정에서 일하고 장군의 직위를 받는다. 이 두 사람은 하늘에서 떨어진 관직을 받았으니 아마도 꿈인가 생시인가 했을 것이다.
이처럼 신황조의 구조를 짜나가고 있는데, 돌연 서향후(徐鄕侯) 유쾌(劉快)가 병사를 일으켜, 왕망을 토벌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유쾌가 즉묵에서 피살되기는 하였지만, 왕망은 유씨의 후손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 걱정되어 아예 한나라제후왕들을 모두 서인으로 폐했다. 오로지 옛 노왕(魯王)인 유민(劉閔), 중산왕(中山王) 유성도(劉成都), 광양왕(廣陽王) 유가(劉嘉)는 일찌기 왕망의 공덕을 칭송한 바 있으므로 서인으로 강등되지 않을 수 있었다.
한평제의 황후는 정안태후(定安太后)가 되었는데, 원래 그녀는 왕망의 딸이었다. 그러나 성격이 부친과는 달랐다. 왕망이 황제위를 찬탈한 이후, 매일 궁궐에 머물면서 수심이 가득했다. 왕망은 그녀의 나이가 아직 젊은 것을 생각해서 궁중에서 적막하게 살기 힘들 것이라 생각하고, 자기의 심복인 손건의 아들인 손예(孫豫)를 딸에게 소개해준다. 손예로서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의사를 데리고 정안태후의 병을 보러가는 것처럼 해서 정안태후의 방으로 갔다. 그의 눈빛이 심상찮음을 느끼고 정안태후는 내실에 들어간 후, 말을 전해준 시녀는 공연히 얻어맞는다. 손예는 바깥에 서있었는데, 안에서는 채찍질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고, 할 수 없이 그냥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왕망은 딸이 절개를 지키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재가시킬 생각을 접었다.
이 일이 전해진 후, 또 다른 호색한이 나타나서, 태후와 결합하고 싶어했다. 이 자는 바로 경시장군 견풍의 아들인 견심(甄尋)이었다. 견심은 성격이 경박하여, 문화심류(問花尋柳)하는 스타일이었다. 왕망이 손예를 사위로 삼고싶어한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이 좋지 않았었다. 나중에 손예가 실패했다는 말을 듣자 한가지 방법을 강구해서 행동에 들어갔다.
이때 왕망은 대신들을 임명한 천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점점 천서로 인하여 자리를 얻은 대신들에 대하여 엄격하게 대하기 시작하였고, 다시는 황당한 얘기를 퍼뜨리지 못하게 단속했다. 견심의 부친인 견풍은 원래 대사공이었는데, 왕망이 공신을 임명할 때, 자기의 지위는 원래 자기보다 낮던 사람들보다 오히려 아래가 되어서, 항상 앙앙불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견심은 왕망이 이미 천서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리하여 그 명의로 정안태후를 얻을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우선 천서를 위조하여 이백(二伯)을 두도록 왕망에게 올려서 왕망을 시험했다. 왕망은 두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우백(右伯)에 임명하고, 태부 평안을 좌백(左伯)에 임명했다. 견풍은 이 방법이 괜찮다고 생각하여 다시 왕망에게 천서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올렸다. "고한평제후, 응위견심처(故漢平帝后, 應爲甄尋妻, 고 한평제의 황후는 견심의 처가 될 것이다)" 그는 왕망이 이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앞으로 태후가 자신에게 시집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궁중에서 한가지 소식이 들려왔다. 왕망이 노기충천하였다는 것이다. 견심은 이제서야 자신이 일을 잘못벌였다는 것을 알았고, 금은을 수습해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과연 많은 사병들이 견씨집을 포위했고, 견심을 수색했다. 견풍은 사정을 물어본 후에 놀라서 혼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고, 바로 아들을 붙잡아서 함께 입조하여 죄를 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들 견심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목숨으로 사죄하기로 하고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왕망은 견심이 이미 도망쳤다는 말을 듣고 바로 전국에 체포령을 내렸다. 견심은 화산으로 도망쳤는데, 결국 붙잡혀서 장안으로 끌려왔다. 그는 고문끝에 친구인 시중(侍中) 유분(劉棻), 유분의 동생인 장수교위(長水校尉) 유영(劉泳), 기도위(騎都尉) 정륭(丁隆), 좌관장군(左關將軍) 왕기(王奇) 등까지 끌어들여 모조리 하옥되었고, 모조리 사형을 당했다.
유분의 스승은 유명한 문인인 양웅(揚雄)이었는데, 그도 이 사건의 혐의자가 되어서 조사를 받았다. 양웅은 촉도 성도사람이었다. 원래 말을 더듬었는데, 사고는 민첩했다. 평소에 그는 사마상여를 아주 존경했고, 사마상여의 작품을 모방하기를 즐겼다. 한성제때, 대사마 왕음의 추천으로 궁중에서 일했고, <<감천>> <<하동>>의 2부(賦)를 바쳐, 한성제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한애제, 한평제의 두 황제시절에는 승진하지 못해서 평소에 우울하게 지냈고, 그저 글이나 쓰며 시간을 보냈다. <<태현경>> 과 <<법언>>의 두 책을 썼다. <<법언>>은 <<논어>>를 본떠서 쓴 글이고, <<태현경>>은 <<주역>>을 본떠서 쓴 글이다. 글이 어려워서 보통사람들은 읽기가 쉽지 않았다. 유흠은 양웅의 재주와 학문을 높이 평가해서, 아들인 유분으로 하여금 양웅을 스승으로 모시게 한 것이다.
이때 양웅은 이미 대부(大夫)직을 받았으며, 천록각교서를 하고 있었다. 돌연 유분때문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양웅은 자신의 나이가 이미 70이 넘었으므로 혹형을 견디기 힘들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죽어버리겠다고 생각해서, 이를 악물고 누각에서 뛰어내린다. 그러나, 죽지는 않았다. 신하 한 사람이 그가 나이도 많은데, 누각에서 뛰어내려, 얼굴이 붓고 코가 멍들고 한 것을 보고는 가련하게 생각하여 그를 부축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스스로 왕망에게 보고했다. 왕망은 그의 죄를 면해주었다. 단지 견심, 유분등을 죽였을 뿐이다.
이번 변고로 연루된 사람이 수백명에 이르게 된다. 그중에서는 양웅 한 사람만 살아남는다. 나중에 양웅은 왕망을 칭송하는게 그를 위하여 <<극진미신문(劇秦美新文)>>이라는 글을 써서 바치는데, 후세인들의 조소를 받게 된다.
가련한 양웅은 만년에 조심하지 못하여, 후세인들에게 웃음거리를 남기고, 자신의 명성을 훼손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당시 광록대부인 공승(龔勝)도 덕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왕망의 찬탈이 있자, 바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되돌아가서,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왕망은 찬위후에 그를 매수하고자 하였고, 사람을 보내여 예물을 많이 하사했다. 그래도 공승은 응락하지 않았고, 결국 절식하여 죽고 만다.
그외에도 많은 명사(名士)들이 왕망이 찬위하자 관직을 버렸다. 제(齊)의 사람 설방(薛方), 율융(栗融), 패(沛)의 사람 진함(陳咸), 북해(北海) 사람 소장(蘇章), 산양(山陽) 사람 조경(曹竟)등이 그들이다. 왕망이 이들에게 다시 관직을 맡을 것을 부탁했지만, 모두 여러가지 이유를 대며 거절했다. 패의 사람 진함은 그 자신이 관직을 버렸을 뿐아니라, 이미 관직에 나간 세 아들 진참(陳參), 진풍(陳豊), 진흠(陳欽)까지 불러들였고, 그들에게도 왕망의 밑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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