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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광무제)

유수(劉秀): 왜 신분도 고귀하지 않고, 뜻도 크지 않은 그가 동한을 개국할 수 있었을까?

by 중은우시 2018. 7. 2.

글: 역사변연(歷史邊緣)


유수는 동한의 개국황제이다. 역사에서 광무제(光武帝)라 칭한다. 역사상 광무제 유수에 대한 평가는 아주 노파. 그는 위로는 천명을 받아, 혼란을 수습하여 바로잡아 천하를 안정시키고, 한 마음으로 국가의 진흥을 꾀했으니, "중흥지주(中興之主)"라는 것이다. 명말청초의 대사상가 왕부지(王夫之)의 광무제에 대한 평가는 "삼대이하칭성치(三代以下稱盛治)"였다. "삼대 이래로 천하를 얻은 자는 오로리 광무제 뿐이다." 심지어, 하, 상, 주 삼대이후, 오로지 광무제가 여러 황제들 중에서 최고라고 말한다.


광무제 유수는 어떻게 민심을 얻고, 광무중흥의 동한시대를 열 수 있었을까?


첫째, 유수는 민심을 잘 휘어잡았고, 백성들의 옹호를 받았다. 사료기록에 따르면, 유수는 재위기간동안, 국가건설을 중시하고, 백성의 고통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전후로 9번 명령을 발하여 노비를 해방시키고, 노비에게 잔혹하게 대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고 여러번 조서를 내려, 죄수의 죄를 사면하여 서민으로 해주었다. 그는 조세와 요역을 경감시켰고, 구휼자금을 풀었으며, 수리사업을 벌였다. 400여개 현을 철거하고 병합시켜, 관리의 수를 줄였다. 천하통일후, 유수는 기본적으로 군사를 일으키지 않고, 변방지구의 소수민족에 대하여도 다독이는 것을 위주로 했다. 이런 조치들은 모두 인심을 크게 얻게 만든다.


둘째, 유수는 관용적이고 도량이 넓었다. 이것이 인심을 얻는 관건이었다. 관용으로 '반역지도'의 마음을 평정한 적도 있다. 하나의 사례는 24년, 유수는 한단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왕랑(王郞)을 주살한다. 그리고 대량의 비밀문서를 얻는다. 거기에서는 의외로 많은 각주군의 장수들이 왕랑과 결탁하며, 유수를 비방하는 서신들이 발견되는데, 수천건에 달했다. 심지어 수십통은 자신의 부하가 몰래 왕창(王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신이었다. 그러나 유수는 서신에 나오는 내간(內奸)을 추궁하지 않고 즉시 장수들을 모은 후에 모든 서신을 불태워 잿더미로 만든다. 오한(吳漢)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이들 서신을 남겨 두었더라면, 숨은 내간들을 적발해낼 수 있었을텐데..." 유수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충성서신을 불태워 버리면, 반란을 꾀했던 자들이 안심해도 되니, 이후 다시는 내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조치는 인심을 안정시키고, 또한 일찌기 왕랑과 결탁했던 자들도 유수에 대하여 기꺼이 복종하게 만든다.


다른 하나의 사례는 관용으로 '일민(逸民)' "은사(隱士)'의 마음을 얻고, 길들여지지 않았던 사람들의 마음까지 얻은 것이다. 태원군 광무현에는 주당(周黨)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지방에서 명망이 아주 컸다. 조정에서 여러번 그에게 관직을 내렸지만, 그는 맡지 않았다. 나중에 부득이하여 주당은 단포단의(短布單衣)를 입고 나무껍질(樹皮)로 머리를 싸매고 가서 조정관리를 만난다. 그런데, 유수가 직접 그를 만난다. 주당은 유수를 보고서, 자신의 성명을 말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직접적으로 자신은 관리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유수도 억지로 그에게 권하지 않았다. 나중에 박사 범승(范昇)이 상소를 올려, 주당이 황제의 앞에서 교만하고 무례했으니, '대불경'의 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때 유수는 이렇게 말한다: "자고이래로 명왕성주(明王聖主)에게도 모두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백이 숙제는 주속(周粟)을 먹지 않으려 했고, 주당도 나의 봉록을 받지 않으려 했다. 이는 각자의 듯일 뿐이니, 그에게 40필의 비단을 내려주라." 


동마(銅馬)를 함락시켰을 때, 유수는 항복해온 동마의 장수들을 후하게 대해주고, 제후에 봉한다. 이들은 마음 속으로 의심을 품는다. 그리하여 유수는 그들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고, 자신의 원래 부대를 지휘하도록 해준다. 유수는 친히 말을 타고 각 부대를 순시했다. 그 장수들은 모두 감탄하며 말한다: "소왕(蕭王. 유수는 일찌기 갱시제에 의하여 소왕에 봉해진 적이 있다)은 적심(赤心)을 복중(服中)에 품고 있다. 어찌 목숨을 다하여 충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외에 유수는 신하들의 마음을 잘 회유했다. 그리하여, 군신공화해(君臣共和諧)의 국면을 만든다. 한번은, 광무제가 공신들과 연회를 베풀었는데, 그가 이렇게 물었다: "만일 너희들이 시국의 대변화국면을 맞지 않았더라면, 너희는 어떤 성취를 얻었을 것같으냐?" 등우(鄧禹)가 먼저 말한다: "나는 젊었을 때 공부하려고 했으니 아마도 군(郡)의 문학박사가 되었을 것같습니다." 유수는 등우가 너무 겸손하다고 여겨서 이렇게 말한다: "너는 명문세가의 자손이고, 품성과 덕망과 뜻이 모두 높으니, 연공조(掾功曹)정도야 걱정이 없었을 것같다. 마두(馬武)는 별 생각도 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용맹하고 힘도 있고 담량도 있으니, 아마도 수위(守尉)를 하며 강도를 잡는 일을 했을 것같다." 광무제가 그 말을 듣고는 웃으며 말한다: "네가 도적이 되지 않고, 붙잡히지 않아서, 시골의 정장이라도 할 수 있으면 괜찮았을 것같다." 모두 가가대소한다. 이를 보면, 유수는 이들 공신들과 아주 친밀하게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나라초기의 학자 왕부지가 '삼대 이래로 군신이 서로 간에 아름답게 정을 주고 받은 것은 동한이 가장 좋았다."고 찬탄한 것이 이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