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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미월)

진실한 미월(羋月)은 어떠했을까?

by 중은우시 2018. 11. 16.

글: 정보(程步)


역사드라마는 고대의 역사문화를 보여주고, 선인의 공덕과 위업을 말하며, 민족자신감과 자부심을 높여주니 공로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부작용도 있다. 드라마이기 때문에 허구로 만들다보니 갈등도 만들어야 한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은 지나치게 치켜세우거나 지나치게 끌어내려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재미도 있다.  심지어 갈등을 야기하기 위하여, 인물과 사건을 장관이대(張冠李戴)하는 경우도 있다. 아주 사이좋은 어려움을 같이 겪은 전우를 한 사람은 배신자, 매국노로 그려야 한다. 그리하여 후인들이 소송을 걸어 명예훼손을 주장하는 경우도 드물지않게 발생한다. 그리고 진실한 역사의 시비를 섞어서, 진가를 구분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것은 문제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서료더미를 뒤져서 관련된 사료를 열거하여, 진실이 무엇인지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선태후 미월에 관한 기록은 <사기>의 "진본기", "양후열전", "저리자감무열전"과 "흉노열전"에 나타나고, <전국책>의 "진책" 양편, "위책", "한책"에 각각 1편씩이 있다.


미월이 진선태후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진본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소양모초인(昭襄母楚人), 성미씨(姓羋氏), 호선태후(號宣太后)". 성만 있고 이름은 없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병마용(兵馬俑)에 잔존한 글자 '미월'과 아방궁 잔와(殘瓦)의 '미월'이라는 글자를 근거로 하여, 미월이 선태후의 이름이라고 본다. 새로운 물증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 설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미월은 언제 태어났는가?

<진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미월은 진소왕42년에 죽었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적어놓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추측해볼 수 있다. <진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소왕3년에 '왕관(王冠)"이라고 했다. 만일 진소왕이 16살 혹은 18살에 즉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를 가지고 추산해보면, 미월은 최소한 진혜왕13년에는 진혜왕비가 되어야 한다. 설사 16살에 자식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진소왕이 즉위때 그녀는 이미 34살은 되었을 것이다. 즉 미월은 늦어도 진효공22년에는 태어났다. 이때는 바로 상앙이 열후에 봉해진 해이다. 죽었을 때의 나이는 76세가 된다. 그녀의 아들 진소왕과 같은 나이 혹은 그 이상 살았던 것이다.


미월은 정이 많고 음란했었나?

그렇다. 미월은 장수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그녀가 성생활을 계속 유지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들이 즉위한 후, 미월은 공개적으로 좋아하는 대신들과 사통한다. 혹은 공개적으로 면수를 두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는 아마도 당시의 성관념이 개방적인 것과 관련있을 것이니 이상하게 볼 것도 아니다. 진시황의 모친도 공개적으로 면수를 두었다. 그저 마월은 면수를 잘 통제해서 사고를 치게 만들지 않았을 뿐이다. 진시황의 모친은 색욕에 빠져서, 자식을 임신하여 낳았을 뿐아니라, 노애의 반란까지 불러왔었다.


<전국책>의 기록에 따르면, 미월에게는 좋아하는 대신이 있었는데 이름이 위추부(魏醜夫)이다. 병이 위중할 때 미월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자기가 죽은 후에 위추부를 순장시켜 달라고. 위추부는 당연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월에게 말할 수 있는 대신인 용예(庸芮)를 찾아가서 말을 좀 해달라고 부탁한다. 용예는 미월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묻는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느낌이 있을까요 아니면 없을까요?" 미월이 대답한다. "없다." 용예가 말한다. "느끼지 못한다면, 태후는 왜 하필 사랑하는 사람을 전혀 느끼지도 못하는 죽은 사람을 위해 순장하려 합니까. 만일 사람이 죽은 후에도 느낀다면, 선왕이 지하에서 오래전부터 분노하고 있을 것입니다. 태후께서는 그 동안의 잘못을 메우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없을텐데, 어떻게 위추부를 만나서 즐길 시간이 있겠습니까?" 미월이 그 말을 듣고, 위추부를 순장시키겠다는 생각을 포기한다.


미월은 초위왕(楚威王)의 공주인가?

아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미월의 모친은 약간 음란하여, 3명의 자식을 낳았다고 한다. 첫째가 딸인 미월이고, 둘째가 아들인 위염(魏冉)이며, 셋째가 아들인 미융(羋戎)이다. 만일 모친이 초왕비라면, 개가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개가이후에 다시 초왕과의 사이에 아이를 낳았을 가능성도 거의 배제할 수 있다. 설사 위씨성의 남자와 사통했다고 하더라도, 아들을 낳은 후 드러내놓고 위씨성을 붙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미월의 모친은 분명 초나라종친인 미씨성의 남자에게 시집갔을 것이다. 미월을 낳은 후, 여러가지 원인으로 혹은 버림받았거나 혹은 위공자에게 보내졌거나 하여 아들 위염을 낳는다. 그후에 다시 버림받거나 혹은 전란중 도망쳐서 원래의 초나라로 돌아오고, 원래의 남편과 다시 만나서, 아들 미융을 낳았을 것이다. 그 외에 만일 미월이 초나라공주라면, 사서에 분명히 기록해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집해>에는 명확히 적고 있다. 진혜왕후는 초공주이고, 미월이 아니다. 이를 보면 그녀는 출신이 비교적 비천했을 것이다.


미월과 황헐(黃歇)은 청매죽마인가?

아니다. 춘신군 황헐은 진시황9년에 죽는다. 만일 그가 미월과 청매죽마라면, 죽었을 때 나이가 104살쯤 되어야 한다. 황헐은 초고열왕22년, 즉 진시황6년에 초왕을 도와 아들을 낳게 하는데, 만일 이때 60살로 본다고 하더라도, 미월과 최소한 44살의 차이가 난다. 청매죽마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당연히 동명이인인 다른 사람이라면 별론으로 한다.


미월은 적공주가 시집갈 때 배가(陪嫁)로 진나라에 따라왔을까?

가능성이 있다. 미월이 어떻게 진나라로 왔는지, 어떻게 하여 진혜왕의 비로 들어갔는지 역사서에 기록이 없다. 초공주의 시녀 혹은 노비로 진나라에 배가로 왔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그녀의 출신이 절대 공주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공주가 다른 공주를 따라서 배가하는 경우는 없다. 첫째는 체통에 맞지 않고, 둘째는 초나라는 그 정도로 엉망인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월의 모친은 비록 왕실종친인 미성의 남자에게 시집ㅇ르 갔지만, 왕실은 여러 대를 내려오며 번성하여, 갈래가 많으므로 대를 내려갈수록 쇠락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게다가 왕실종친도 범죄를 저지를 수 있고, 권력귀족에게 밉보일 수 있다. 그러면 남자는 하옥되고 처자식은 관노가 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그래서, 미월이 공주의 배가 시녀 내지 노비로 진나라에 왔다가, 나중에 진혜왕의 눈에 들어 비빈이 되었을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나중에 진소왕이 즉위하게 되자 미월은 진혜왕후인 초공주를 죽이고, 많은 진소왕의 형제와 대신을 죽인다. 이것은 사서에 기록이 있다. 아들의 성공적인 즉위를 위해서인지 원래 초공주와 원한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미월과 아들은 총애를 잃어서 연나라에 인질로 가게 되었는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인질로 간다는 것은 중시된다는 것이다. 각나라의 태자는 일반적으로 외국에 인질로 갔다. 초고열왕은 태자때 일찌기 진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다. 진소왕의 장남도 위나라에 인질로 가 있다가 나중에 위나라에서 죽는다. 진시황의 부친은 장남이 아니지만, 진효왕의 총비인 화양부인이 눈에 들어 양자로 삼고 다시 조나라에 인질로 보내어진다. 그리고는 태자에 봉해지며 나중에 진장왕에 오른다. 그오에 모친이 아들을 따라 외국에 인질로 가는 경우는 없다. 설사 총애를 잃어서 냉궁에 들어가더라도, 왕궁내에서 연금되는 것이다.


미월이 의거를 죽이고, 일거에 진나의 서쪽 화근을 없앴는가?

아니다. 사서에 진나라와 의거간의 전쟁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주로 진혜왕과 진무왕때 일어난다. 진혜왕 11년에 "의거에 현을 설치하다." "의거군이 신하가 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의거에 진나라의 현을 설립하고 의거군은 진왕의 신하가 된 것이다. 진혜왕 후원10년에는 "의거 25개성을 정벌하여 취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의거군이 다시 반란을 일으킨 것같다. 진무왕원년에는 "의거를 토벌하다"라고 적었다. 그 이후, 진나라는 더 이상 의거를 공격한 기록이 없다. 의거는 이미 멸망한 것이 분명하다. 미월은 몇년후 진무왕이 죽고 진소왕이 즉위하면서 권력을 자악한다. 그래서 의거를 합병한 공로는 미월의 것이 아니다. '흉노열전'에는 선태후와 흉노융왕이 사통하여 두 아들을 낳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만일 사실이라면, 투항하여 신하가 된 전 흉노융왕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일국의 군주가 먼 길을 와서 태후의 내궁에서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다는게 말이 되지 않는다.


미월이 진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는가? 

아니다. 미월이 살아 있을 때, 동생 위염, 미융, 아들 고릉군(高陵君), 경양군(涇陽君), 그리고 동족인 향수(向壽)등을 이용하여 진나라이 군정대권을 장악한다. 그녀가 죽을 때까지 진나라가 취득한 성취는 많은 부분이 그녀의 공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미월은 어쨌든 여자이고, 사회전통문화나 자신의 학식 그리고 여인으로서 문제를 보는 방식이나 방법으로 인하여 그녀는 나중의 여후, 서태후와 마찬가지로 작은 일에서는 정명간련(精明干練)했고, 궁정투쟁에서는 악독한 면을 보였지만, 고첨원촉(高瞻遠矚), 굉도대략(宏韜大略)은 부족했다. 조정을 42년간 장악했지만, 진나라는 머리가 없는 파리처럼, 사방으로 싸움을 벌였다. 통일된 전략은 없었다. 그리하여 투입은 많은데 수확은 적었다.


미월의 아들 진소왕은 총명예지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저 큰 공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고, 귀가 얊았다. 쉽게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렸다. 미월이 살아 있을 때, 진소왕은 아마도 모친의 속박을 벗어나서 자신이 주재하려고 계속 시도했던 것같다. 이것은 그가 외삼촌 위염을 한때 파면했다가 다시 기용하고, 미월이 죽자 즉시 재상에서 파면하고 함양에서 쫓아낸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42년이 지나서야 진소왕은 마침내 기를 펼 수 있었다. 그는 도망자인 범수(范睢)를 재상에 앚히고 장평대전을 일으킨다. 장평대전에서 진나라병사의 절반이 사상되었는데, 그는 아무 생각없이 백기의 거짓전공보고를 믿는다. 조나라군대 40만이 항복했는데 일거에 모두 갱살해 버렸다는 말을. 그리하여 진소왕은 흥분하여, 진군이 2년간 고전하면서 사상자가 많이 나와서 한동안 쉬어야 한다는 것도 생각지 않고, 손자 자초가 조나라의 한단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도 생각지 않고, 즉시 한단대전을 일으킨다. 결과는 일패도지였다. 미월이 40년간 통치하면서 얻은 하내(河內)의 땅을 모조리 잃어버린다. 하동군수 왕계(王稽)는 영지를 버리고 도망쳤고, 진군의 부사령관 정안평(鄭安平)은 2만의 진군을 데리고 적에 투항한다. 이때 진소왕은 정신을 차린다. 백기(白起)와 사마근(司馬靳)을 사사하고, 범수와 왕계를 죽인다. 


전체적으로 평가하자면, 미월과 진소왕이 정권을 장악한 기간은 모두 56년인데, 그동안 진효공이 상앙변법으로 축적했던 기반을 모조리 잃은 것이다. 그저 남군(南郡) 절반을 늘였을 뿐이다. 이 기간동안 조나라는 중산국을 집어삼키고, 제나라는 노, 송을 병합하고, 초나라는 오, 월을 멸망시킨다. 그후 진나라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장왕3년, 위무기에 의해 함곡관까지 물러난다. 이는 상앙변법이후 백년간 없었던 일이다. 진시황6년, 조,위연합군은 최읍(蕞邑)을 공격하는데, 이곳은 함양에서 겨우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이곳은 바로 나중에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병력을 주둔시켰던 희수홍문(戱水鴻門)이다. 이것은 더더구나 백년동안 없던 일이다. 만일 진시황이 영명하고 예지롭게, 공격이 최선이 수비라는 방식으로 연합군을 물리치지 않았더라면, 진나라는 아마도 멸망했을 것이다.


당연히 역사드라마를 보면서 너무 따질 필요는 없다. <미월전>을 다 보고나서, 역사상 선태후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름이 미월이다. 그리고 상앙, 황헐, 진소왕도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아도 유익할 것이다.